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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종의 한자 時評(9) 山是山, 水是水] 지나친 부정은 정답이 아니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성철 스님 명언, 자명한 이치 등을 깨우치는 말… 핵만 앞세우는 북한에 대화 거론하는 것은 무리

▎성철 스님이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란 말은 자명한 이치, 본원으로의 회귀 등을 깨우치는 말이다. 산과 물이 좋기로 유명한 한탄강 일원. 한탄강은 강원 철원군에서 경기 연천군을 흐른다.
산시산, 수시수(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로다, 물은 물이로다.” 우리 불교에 큰 족적을 남겼던 성철(性徹) 스님의 말로도 유명하다. 자명한 이치, 눈앞에 있는 것 그대로의 깨달음, 본원(本原)으로의 회귀 등을 깨우치는 말이다. 그러나 원전은 중국의 송대(宋代)다.

청원행사(靑原行思)라는 당시의 선종(禪宗) 대사가 남긴 말이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처음 산을 볼 때 산은 산이었고, 물은 그저 물이었다. 나중에 산을 볼 때 산은 산이 아니었고, 물은 물이 아닌 듯했다. 제대로 깨달을 무렵 산을 볼 때 산은 역시 산이었고, 물은 역시 물이었다”는 내용이다.

산과 물을 거론하는 부분의 언급을 한자로 적자면 이렇다. “看山是山, 看水是水(간산시산, 간수시수). 看山不是山, 看水不是水(간산불시산, 간수불시수). 看山仍然山, 看水仍然是水(간산잉연산, 간수잉연시수)”다.

세 가지 마음 경계를 가리킨다는 설명이 따라 붙는다. 초심의 상태, 수행할 때 찾아 드는 부정과 의심, 그러나 종내 깨달음을 얻었을 때의 경지다. 순수하면서 잡티가 없었을 때의 상태가 반문과 의구심으로 이어지다가 끝내 원래 상태로 회귀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불가에서 일컫는 수행의 과정으로 볼 때 첫 단계는 미숙함, 그 다음 단계는 궁리(窮理), 마지막은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첫 단계에서 드러낸 직관(直觀)으로서의 깨침이 결국 마지막 단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초심(初心)의 긍정, 순수와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하기도 한다.

얼핏 보면 그저 말장난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 만하다. 그러나 화두(話頭)를 부여잡고 사생(死生)의 결단으로 수행하는 참선의 경지에서는 매우 심각한 말이고, 철저한 깨달음일 수 있다. 우리 인생 또한 그와 닮은 점이 있다.

순수한 상태에서의 직관적인 지향, 그를 이리저리 살피고 헤쳐볼 때 드는 의구심과 회의(懷疑), 그러다가 막바지에 이르러서 멀리 바라보는 아득한 출발점. 내가 찾아 헤매던 것이 먼 곳에 있지 않고 내 가까운 곳, 삶의 바탕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는 점을 깨닫는 마음 상황이다.

중국의 지식 사회에서는 청원행사가 언급했던 이 세 마음의 경계를 멋있게 표현했던 글이 유행한다. 청(淸)나라 말기에 태어나 빼어난 천재를 보이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문인 왕국유(王國維)의 글이다.

그는 예전 유행을 탔던 사(詞)의 세 작품에서 각 구절을 뽑아낸다. 산과 물을 두고 벌인 참선의 세 가지 경계를 설명하려는 글이다. 문학적으로 매우 완성도가 높은 구절 셋을 뽑아 그 마음 경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 첫 구절은 이렇다. “어젯밤 하늬바람 닥쳐 푸른 잎 떨어질 때 홀로 높은 다락에 올라 세상 저 멀리로 뻗는 길을 봤지(昨夜西風凋碧樹, 獨上高樓, 望盡天涯路).” 초심의 단계다. 상당히 큰 포부를 안고 삶의 여정을 시작하는 청년의 힘찬 기상이 담겼다.

그 다음 단계는 노심초사(勞心焦思)다. “옷 허리띠 느슨해지도록 그리워했지만 후회는 하지 않아, 그 사람 생각에 아주 초췌해졌네(衣帶漸寬終不悔, 爲伊消得人憔悴).” 여기서 ‘님’은 찾아 헤매는 진리, 종국의 성취라고 해도 좋다.

최종의 긍정 단계는 이렇게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 속을 찾아 헤매다가 문득 돌아보니 그 이는 희미한 불빛 아래에 있더군(衆裡尋他千百度, 驀然回首, 那人却在燈火闌珊處).” 돌고 돌아, 그리고 찾고 헤매다 결국 내 곁에 있는 것의 발견을 지칭한다. 골백번을 찾고 찾았지만 내가 그리워했던 님은 내 바로 옆, 불빛이 희미한 곳에 서있다는 내용이다.

섣부른 선심정책도 경계해야


▎불교계의 대표적 지도자인 조계종 6, 7대 종정(宗正) 성철 스님(1912~93).
풀이는 다소 갈릴 수 있다. 우선은 인생의 세 단계다. 뜻을 세우고, 처절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어느덧 내 옆에 와 있는 성공이다. 세 구절을 뽑아내 문장을 적은 왕국유는 큰 사업을 이루려는 사람, 학문의 커다란 성취를 꾀하는 이에게 찾아 드는 세 가지 단계를 직접 거론해 구문(構文)의 의도가 그에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의 계획과 실천, 성취만으로 풀기에는 어딘가 부족하다. 그래서 송나라 때 선사(禪師)가 남겼다는 “물은 물, 산은 산”이라는 깨달음의 경지로 풀어 보려는 시도가 있다. 상당한 포부와 이상을 지닌 채 들어서는 수련의 첫 단계, 그리고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학습과 궁리의 둘째 단계, 그러나 내가 찾아 헤매는 진리가 일상의 자연스러움, 초심의 진지함, 순수함에 있었다는 깨달음의 셋째 단계다.

달리 새겨보자면 발심의 순서를 넘어선 뒤 찾아 드는 부정과 회의가 방황으로 번지다가 결국 온갖 궁리와 모색 끝에 직관(直觀)과 순수(純粹)의 경계로 돌아온다는 점을 말하려는 의도도 있다. 풀이의 방향이 다소 다르지만 필자로서는 뒤의 방식을 더 받아들이고 싶다. 우리가 찾는 진리, 지녀야 할 의향,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살아가면서 마구 흔들려 불필요한 혼란을 빚을 때가 많아서다.

그래서 “산은 산이로다, 물은 물이로다”로 쉽고 간명하게 깨달음의 바탕을 설명한 성철 선사의 언급에 선뜻 감응한 기억이 새롭다. 인생, 사회, 국가로 이런 경우를 적용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어렵게 찾아 헤매며 제 깜냥에 따라 삶의 목표와 사회의 지향, 국가의 발전을 논의하지만 마지막으로 향해야 할 경지는 그리 복잡하지 않다.

삶은 진솔한 노력으로 안정적인 성취를 향해 가야 마땅하고, 사회와 국가 또한 번잡한 중의(衆議)에 휘둘려 방향을 놓치기보다는 뭇 사람이 모두 평온하며 풍족한 삶을 이루도록 크게 방향을 잡아가야 하는 법이다. 이 자명(自明)한 이치를 누가 함부로 부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세속의 삶은 언제나 그렇듯이 분주하며 번잡하다. 제가 지닌 이해의 틀로 세상을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의가 시끄럽고, 때로는 심각한 이견(異見)을 드러내 죽고 살기로 싸우려 나설 때가 많다. 우리사회는 어떨까. 사실 그로부터 전혀 자유롭지 않아 문제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제법 시간이 흘렀다. 전 정부의 착오와 오류를 시정하고 개선하는 데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정권의 교체에 따라 불가피한 측면이 많다. 게다가 전임 정부의 파행적인 운영이 적지 않은 문제를 남겼다는 점도 그를 부추긴다.

그래도 지나친 부정은 정답이 아니다. 핵과 미사일을 앞세우는 북한에 대화와 화해를 거론하는 대북정책은 안보의 근간을 단단하게 설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토대를 흔들 수 있다. 섣부른 원자력 폐기 공론화, 국가재정 부담에 초연한 듯한 복지와 선심정책도 위험하다. 산업 경쟁력, 국가 발전 잠재력의 증강은 우리에게 직관으로 보는 ‘산(山)’이자 ‘물(水)’인데 그를 의구심으로 보는 시각이 두드러져 걱정이다.

유광종 - 중어중문학(학사), 중국 고대문자학(석사 홍콩)을 공부했다. 중앙일보에서 대만 타이베이 특파원, 베이징 특파원, 외교안보 선임기자, 논설위원을 지냈다. 현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저서로 <유광종의 지하철 한자 여행 1, 2호선>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백선엽의 6·25전쟁 징비록 1, 2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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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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