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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시인에게 사랑을 묻다] 곽재구 - 고향을 떠나 고향을 찾은 사람 

“절망한 자, 땅 끝에서 새가 되리” 

글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 사진 지미연 객원기자
선승의 화두처럼 꿈에서도 시를 놓지 못하는 시인…아침마다 전남 순천 동천 물가를 산책하며 고통에서 길어낸 평화를 노래

곽재구 시인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뒤 60년 되는 해 남도 땅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가족이 와해됐고, 광주의 대학생으로 5·18을 겪었다. 개인적의 삶도, 시대의 흐름도 험난한 질곡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주 끈질기게 아름다움과 꿈에 대해 노래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온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고 싶었다.


곽재구(郭在九·62) 시인을 만나러 남쪽 순천으로 내려갈 때, 순천만을 물들이는 노을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를 상상했다. 그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가 쓴 동화 ‘아기참새 찌꾸’의 주인공 찌꾸를 닮았을 것도 같았다. 과연 만나보니 동글동글 동안이다. 다만 웃음만큼은 시원하다. 호탕하다기보다 몸속 저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린 듯 길게 끄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다 환해지고 듣는 사람 입가도 저절로 벌어진다.

그의 시집 가운데 <와온 바다>가 있거니와, 그는 이 땅의 정겨운 포구를 찾아 바다와 바닷가 사람들을 우리에게 소개해준 <포구기행>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와온 바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그는 며칠 전 ‘격렬비열도’를 다녀왔다고 했다.

“격렬비열도는 우리나라 서쪽 맨 끝에 있어요. 서산 태안반도에서 비를 만났지만 배를 타고 들어갈 수 있었지요.”

2002년 출간된 <포구기행>의 속편이라 할 또 한 권의 ‘포구기행’이 내년에 나올 예정이라고 하는데, 고등학교 친구인 시인 나해철과 최두석과 같이 들어가 등대까지 보고 나온 격렬비열도도 등장할 듯하다.

“모든 땅 끝에 포구가 있잖습니까. 그리고 거기에는 배를 타고 나갈 수 있는 바다가 있으니 출발의 장소이기도 하고요. 절망한 누구라도 땅 끝에 가면 새가 되어 날 수 있어요.”

광주에서 5·18을 몸소 겪은 그는 이후 오랫동안 이어지던 억압의 시절, 절망이 깊었다고 한다. 그 시절 포구마을에 가면 평화롭고 따스한데다 출발하는 이미지에 고무되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단다.

“갯마을 고깃배는 뽕짝을 틀고 다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삶이라는 게 별 게 아니로구나, 저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격렬하게 싸우고 아파하다가도, 그래서 오래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포구를 찾게 되었어요.”

늘 바람이 부는 바다와 바다 내 내음보다 더 짙은 사람들의 삶을 그린 그의 포구기행이 절망 속에서 탄생했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리고 와온 바다에 도착하니, 그의 얼굴은 더욱 환해지고 눈빛은 더 빛나며 말소리마저 빨라졌다.

세상의 중심이 된 와온 바다


▎수백 마리의 흑두루미가 전남 순천만에서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다. 순천만의 아름다운 자연은 시인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시적 상상력을 부르는 원천이 된다.
사람의 삶을 끌고 가는 힘은 바로 ‘이름’이라고, 시인이라는 자신의 이름값을 다하기 위해 하루 8만6400초 모두 시에 바치고 싶어 하는 곽재구는 사람 이름이나 지명, 꽃과 나무의 이름까지 세상 만물의 이름에 의미를 붙이고 풀이한다. 본래 시인이란 이름에 생명을 불어넣는 술사(術士)이기도 하지만 곽재구의 풀이는 언제나 따뜻한 편을 비추고 있다. 와온 바다를 눈앞에 두고 그는 따뜻하게 눕는다는 뜻의 와온(臥溫)을 이렇게 해석했다.

“따뜻할 온(溫) 자를 풀어보면 물과 사람과 입과 피로 되어 있잖습니까. 사람이 마신 물이 따뜻한 피가 된다는 뜻인데, 그렇게 따뜻하게 누워 있으니 ‘평화’지요.”

사실 ‘온’ 자에는 ‘피 혈(血)’이 아니라 ‘그릇 명(皿)’ 자가 들어 있지만, ‘그릇 명’을 ‘피 혈’로 본 것은 그의 따뜻한 눈이 빚은 멋진 착각이리라.

해는
이곳에서 와서 쉰다
전생과 후생
최초의 휴식이다
당신의 슬픈 이야기는 언제나 나의 이야기다
구부정한 허리의 인간이 개펄 위를 기어와 낡고 헤진 해의
발바닥을 주무른다
달은 이곳에 와
첫 치마폭을 푼다
…(중략)…
인간은
해와 달이 빚은 알이다
알은 알을 사랑하고
꽃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고
삼백예순날
개펄 위에 펼쳐진 그리운 노동과 음악
새벽이면
아홉 마리 순금빛 용이
인간의 마을과 바다를 껴안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와온 바다’)


오랫동안 이상향으로 품어온 산티니케탄


▎곽재구 시인은 인도의 시성 타고르에게 큰 영감을 받았다. 타고르는 그의 이상향이자 고향이고, 인생의 비상식량 같은 역할을 했다.
2001년 순천에 자리 잡은 뒤 펴낸 시집 <와온 바다>의 표제작 ‘와온 바다’에서 해는 걸음을 멈추고 달은 속살을 드러내며, 사람은 노동하고 사랑하면서 종내에는 인간의 마을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평화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인이 사랑하는 평화의 장소는 와온 바다 말고 또 하나 있다. 바로 인도 시인 타고르 집안이 만든 산티니케탄(Santiniketan)이다. 산티니케탄이라는 이름 자체가 말 그대로 ‘평화의 마을’이라는 뜻인데, 그는 오랫동안 이상향으로 품어온 이 마을에서 2009년과 2010년 1년 반을 살며 ‘쫌뽁다(벵골말로 챔파 아주머니)’로 불리며 살았다. 시집 <와온 바다>의 후반부에 ‘산티니케탄’이라는 시가 나온다.

해는
달 속에서 뜨고
달은
해 속에서 뜨고
해는 솟아올라
저무는 달에게
챔파꽃 레이를 걸어주고
…(중략)…
어린 꽃들은
코끼리 등 위에서 피어나고
어린 코끼리들은
어린 꽃들의 이마 위에서 잠들고
서로 사랑하다가
서로 웃다가
꽃이 피고
저녁이 오고
어린 새들이
별과 별 사이를 날아다니고


시집 <와온 바다>는 이렇게 와온 바다와 산티니케탄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기실 와온 바다와 산티니케탄은 ‘평화’라는 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그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누군들 평화를 원하지 않을까마는 그에게 평화는 중요한 화두임을 알겠다. 광주에서 나고 자라 대학까지 다닌 그는 ‘광주가 세상의 중심’인 줄 알고 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와온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와온에서 편안히 누운 것은 해나 바다가 아니라 ‘와온 샘(선생)’이라 불리는 곽재구, 바로 그였다.

그에겐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평화가 절실했던 것 같다. 차를 운전하며 한적한 동네를 지날 때 옛 생각이 떠올랐는지 문득 “세상에서 가장 낯선 단어가 내겐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말”이라고 했다. 어떤 그리움도 없다고. 그의 시와 글이 하도 따뜻하고 곱기에 이 말은 더욱 의아하게 들린다. 물론 그가 현실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누구보다 날카로운 음조를 품고 있었지만.

“외국으로 입양 간 아이들이 한국이나 부모에 대해 어떤 감정도 없노라고 얘기하지요? 제가 딱 그렇답니다.”

1954년 갑오년에 태어난 그는 연탄이 귀하던 어린 시절, 새끼줄에 맨 연탄을 사오는 심부름을 자랑스럽게 하던 어린이였다. 그러나 지방지 신문기자였던 아버지가 5·16으로 ‘부패언론인 정리’에 휩싸여 일자리를 잃으면서 집안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연일 어머니와 아버지의 다툼으로 불안했을 그 시절에도 그는 ‘소설가’를 꿈꾸고 비행기를 띄울 요량으로 동무들과 함께 중국집의 망가진 선풍기 날개와 자전거 체인을 끌어모으는 탁월한 상상력을 지닌 아이였다. 그러나 끝내 비행기는 뜨지 못했다. 비행기를 띄우기로 한 날 집안이 풍비박산 났기 때문이다. 먼저 어머니가 떠났고, 머지않아 아버지도 떠났다. 동생과 그는 먼 친척집에 맡겨졌다.

“아버지가 맡길 때는 아마 돈을 부쳐준다고 했겠지요. 첫 달엔 돈도 왔겠지요. 그다음부터는 소식마저 끊어졌고요.”

험한 시절의 따뜻했던, 흰 쌀죽의 추억


▎순천 와온 바다에서 그는 평화를 찾았다. 이 해안에는 가로등이 총 열여덟 개 있는데, 휘고 낡은 열여섯 번째 등을 자신의 등으로 삼았다.
모두 힘들게 살던 그 시절, 어린 형제가 군식구로 전전하는 것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기조차 힘든데, 그는 이런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때 학교도 못 가고 소꼴을 먹였다는 소리도 들리고, 동생은 고아원으로 들어갔었다는 얘기도 있다. 부모 이야기를 할 때면 망설이고 주저하는 말투가 되는 그가 먼 친척 집에서 살 때 겪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준다.

“그 집도 정말로 가난해서 판잣집에 누우면 하수구가 졸졸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장마철이었어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식량이 떨어져 사흘을 굶었지요. 배는 고프고 힘도 없고 비는 쏟아지고. 곧 집이 물에 떠올라 배가 되겠구나 싶었지요. 그런데 어디선가 마늘 냄새가 풍겨오는 거였어요. 주인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주인집도 같이 굶고 있었는데 음식 냄새라니! 굶주린 소년의 코와 배를 얼마나 요동치게 했을 것인가. 그런 와중에도 그는 그들 형제에게 돌아올 음식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인집에서 형제를 불렀고, 흰 쌀죽을 두 그릇이나 먹였다고 한다. 마늘과 간장만 넣은 죽이었지만 그보다 달고 맛난 음식이 있었을까. 그러나 이때의 기억이 따뜻하고 달게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푸근한 기억이라기보다 뭔가 의아한, 의문으로 남아 있었어요. 도대체 죽을 쑬 쌀이 어디서 온 것일까, 어떻게 우리에게도 죽을 나눠줬을까. 나중에 생각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훔친 거였어요. 만약 돈 주고 산 것이라면 쌀이 아니라 보리쌀을 샀겠지요. 훔친 쌀을 보리로 바꾸면 의심을 받을 테니 그대로 죽을 만든 것이었겠지요.”

부모에게 버림받고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던 불안한 시절은 부모에 대한 그리움을 막았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 17년간 그를 달래준 와온 바다의 바람과 꽃, 물고기 친구들에게 “이제 평화의 시절이 왔어”라고 나직이 고백하게 된 그는 시집 <와온 바다>에서 이미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을 조금씩 내보이기도 했다.

“먹감색의/ 작은 호수 위로/ 여름 햇살/ 싱싱하다/ 어릴 적엔 햇살이 나무들의 밥인 줄 알았다/ 수저도 없이 바람에 흔들리며 천천히 맞이하는 나무들의 식사시간이 부러웠다/ 엄마는 어디 가셨니?/ 엄마는 어디 가셨니?/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면/ 그중의 한 나무가/ 배고픈 나에게 물었다” (‘무화과’)

그의 유년 시절에서 따뜻한 기억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난 담임선생님이 마련해주었다. 장래 희망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소설가’라고 대답한 그에게 선생님은 “소설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아느냐?”고 물었고 그는 “세상 어린이들에게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라는 답을 내놓았다. 이런 기특한 대답에 선생님은 기뻐했고, 그를 어여삐 여겨 집에 데리고 가서 책도 빌려주곤 했다.

“선생님 댁에서 학교로 가는 길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재구야’ 하고 저를 불러내 자전거 뒤에 태우고 등교하셨어요. 자전거 짐받이에 선생님 도시락이 있었는데, 따뜻한 도시락 위에 앉아 선생님 옷을 잡고 학교에 갔었지요.”

따뜻한 추억이 된 이 등굣길은 훗날 그가 글을 쓸 때 ‘그 도시락의 온기만큼 따뜻한 글을 쓰겠다’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비록 어머니에게 “니 애비를 닮아 하는 짓도 똑같다”는 말을 듣곤 했지만, 그는 이런 따뜻한 추억의 힘으로 그 험한 시절을 버텨온 것 같다.

“시가 나를 구제했다”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계엄군에게 줄줄이 끌려가는 대학생들. 곽 시인도 당시 계엄군에 붙잡혀 몽둥이질을 당하는 등 커다란 상흔을 입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꿈꾸기를 멈추지 못하는 소년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 말마따나 아버지를 닮아 현실보다는 꿈과 동경에 더 몰두했던 소년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이미 시를 쓰고 있었다. 명문 광주제일고 1학년 가을, 그는 진짜 스승을 만났다. 훗날 시인이 된 친구 박몽구가 시 동인이 되자며 그에게 시 한 편을 건넸다.

“자기가 어젯밤에 쓴 시라며 갱지에 개미가 꾸물꾸물 서울 가는 글씨로 적은 시를 보여주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여자가 데친 사과빛 얼굴을 하고 가을 속으로 떠났다. 바람이 새들의 날개깃에서 부풀고 있다’는 구절에 충격을 받았어요.”

그날 이후 그는 공부는 작파하고 시 쓰기에 빠져버렸다. 나해철과 최두석도 ‘용광’이라는 동인에서 함께 시를 쓰던 친구였다. 고3이 되어서도 대학 입시 준비를 하지 않던 그는 동국대 문창과 장학생으로 응시했다 떨어지고 전남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대학 1학년 때 타고르를 만난다.

“당시 시대가 그렇기도 했지만 김지하와 신동엽 시를 많이들 읽었지요. ‘핏자국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김지하의 시는 아픔이고 뜨거움이죠. 그런데 타고르의 시는 하늘나라 솜사탕이에요. 이럴 수가 있나! 싶었어요.”

그때부터 타고르는 그의 이상향이자 고향이고, 인생의 비상식량이 되었다. 그러니 뒷날 산티니케탄을 찾은 것은 고향을 찾은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험난한 시대, 굴곡 많은 가족사로 얼룩진 이 땅 말고 그의 진정한 고향은 그곳이었던 것이다.

대학 시절 봉두난발에 거지꼴을 하고 다녔다는 그는 교수의 출석 호명에 대답 대신 손만 들어 교수가 기분 나빠 나가버릴 정도로 특이한 학생이었지만 한순간도 시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시를 쓰고 버렸는지 모릅니다. 대학 때 시를 열심히 잘 쓰는 선배가 후배들을 불러 모닥불을 피워놓고 시작 노트를 한 장씩 찢어 태우곤 했는데, 그 모습이 멋지고 좋아 보여 저도 똑같이 했지요. 좋은 것은 배워야 합니다.”

군대도 해안 등대지기로 근무하며 시를 썼던 그는 제대하고 친구 나해철의 어머니가 건네준 5만원으로 대학 근처 고택의 한 칸에서 살며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아침 텅 빈 전남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다 군인에게 제지를 당한다.

“전날 밤 공수부대가 기숙사와 동아리방까지 다 뒤져 학교는 적막했습니다. 본능적으로 공포가 일었지요. 그런데 이 학교 학생인 내가 학교를 못 지나가랴 싶어서 운동장에 들어섰지요.”

다행히 초라한 행색에 주민 행세를 해 체포는 면했지만 ‘돌아올 때는 이 길로 올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리고 밤에 학교 뒷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군인들을 만났다. 한 상병의 수하에게 “언제 봤다고 반말이냐?”는 대답을 하자 몽둥이찜질이 시작됐다. 아픔조차 못 느낄 만큼 심한 매질이었다.

“대위가 보이기에 ‘장교님, 살려주세요!’라고 외쳐 겨우 살아났지요. 무릎이고 뭐고 다 깨져서 기어가며 주민들을 불러 업혀왔습니다.”

집주인이 집 천장에 숨겨주고 주민들이 장독과 골습(骨濕)에 좋다며 만들어준 똥물까지 먹은 그는 5월 27일 전남도청 철수가 있던 날 다리를 절며 시내로 나갔다.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보상이 있었을 때 사람들이 저더러 보상을 받으라고, 보상금 받아 좋은 일하는 센터라도 만들자고 했지만 하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더 험하게 맞고 죽은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시에는 의외로 5·18을 그린 시가 없다. “못 본 사람은 사명감으로도 쓸 수 있지만 겪은 사람은 필설로 다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흥행하는 5·18을 그린 영화 <택시 운전사>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5·18을 다룬 작품은 아무리 잘 그린다고 해도 현실의 10분의 1도 못 따라가니 쓴소리밖에 할 수 없어 안 보게 된다고.

상처와 폭력을 그대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


▎곽 시인은 인터뷰를 통해 “시대의 상처와 폭력을 가능하면 꽃이나 고운 비단으로 감싸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정이 그의 안식처가 되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시대의 아픔도 광주라는 최전선에서 고스란히 받아낸 셈이다. 그런데도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그의 ‘사평역에서’는 아픔과 함께 서정을 잃지 않고 있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중략)…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억압이 극에 달했던 그때, 시인들도 민주화를 위해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시를 토해내던 시절에 그의 시는 시대의 암울함과 희망을 서정을 담아 훌륭하게 표현하니 단연 눈길을 끌었다. 등단하고 두 달 만에 <문학사상>에 ‘조경님’을 발표하자 모든 일간지의 월평 난에는 ‘조경님’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늦은 밤 남면 가는/ 시외버스 차창에서/ 고단한 네 하현의 눈썹을 보았구나/…(중략)…무슨 잭슨 폴록이다 카라얀이다 요란하지만/ 경님아 그것들이 지닌 영혼은/ 밤 버스에 깜박깜박 조는/ 고단한 네 일상의 눈썹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들이 떠들어대는 피아노 협주곡은/ 오라잇 하는 네 발차소리보다 정직하지 못하고/ 그것들이 떠드는 무슨 비구상파 그림들은/ 네 손톱 끝 연연한 고향 하늘/ 봉숭아 빛 꿈보다 깨끗하지 못하다…(후략)…”

버스 안내양 조경님을 그린 이 시는 고은의 ‘만인보’보다 먼저 나온 실명시로, 사실 곽재구의 시에는 최근까지 실명시가 자주 등장한다. 이후 원고청탁을 받으면 써놓은 시에서 좋은 순으로 빼다 보낸 덕에 그는 출판계의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고, 등단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창비>와 시집 계약을 하게 됐다. 이듬해 나온 <사평역에서>부터 <전장포 아리랑> <서울 세노야>를 그쳐 1995년 <참 맑은 물살>까지 그는 남도의 토속성과 민중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시를 써냈다. 이후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에서 그의 시는 조금 변모된 모습을 보이다가 2012년 마지막으로 펴낸 <와온 바다>에서는 아픔과 함께 평화와 사랑의 목소리가 더 크게 울린다. 혹자는 그의 시가 변했다고 아쉬워하지만, 그는 일찍이 이데올로기와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시를 지향하지는 않았다.

“시대의 상처나 폭력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흉물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절이 너무나 험해서, 험하다고 생각하면 살 수가 없어 거꾸로 곱게 이야기하고 싶었지요. 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산 모든 사람에게 그 상처와 폭력을 가능하면 꽃이나 고운 비단으로 감싸서 보여주고 싶었던 거지요.”

물론 그가 싼 꽃과 비단은 피와 눈물로 얼마쯤은 얼룩진 것이었다. 그래도 1980년대는 신춘문예나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은 진짜 시인이 아니었고, 시도 피와 땀으로 쓴 시여야 진짜 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하니, 그도 열심히 공동창작에도 임하면서 시대정신을 따라갔다. 그러다 6·29선언 뒤인 1988년과 89년 중국을 방문하면서 전환을 맞게 된다.

“그곳에서는 어떻게 예술을 하고 있는지 진짜 사회주의의 예술론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그때 중국은 집단창작 같은 예술론은 아니더군요. 그런 예술론은 중국이 해방전쟁을 이끌던 시절에나 통하던 거였습니다.”

선양의 한 건물 앞에는 중국을 이루는 56민족의 남녀상이 거대하게 조성되어 있었고, 거기엔 확실히 영혼의 울림이 있었다. 그런 예술품은 집단창작으로 하는 게 옳은 거였다. 그리고 그것이 필요한 시기가 있다는 것을 그는 확인했다. 중국을 동서로 횡단하는 두 달씩의 여행 후 그는 이데올로기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어떤 사상이나 혁명가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민중이 뭉칠 때 좋은 세상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이니 저는 좀 이른 시기에 자유로워진 셈이지요. 제가 광주 사람이어서 그런 고민을 일찍이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의 길 위에서 고향을 찾다


▎곽 시인이 최근 방문했던 한국 최서단의 섬 격렬비열도. 고교 시절 친구인 시인 나해철, 최두석과 같이 들어가 등대까지 보고 나왔다고 한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 서석고에서 교편을 잡으며 수업 시간에 자신이 쓴 시를 학생들에게 자주 읊어주던 선생님 노릇을 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아마도 그에게 씌인 ‘길귀신’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싸움을 피해 무작정 길을 나섰던 그는 낯선 동네의 어느 친절한 이의 집에서 사흘을 평화로이 머문 적이 있다. 그때 처음 ‘손님’으로 소개됐던 따뜻한 기억 때문일까, 그는 집보다 길 위의 손님으로서 더 행복을 예감했던 것 같다. 전업 작가로 13년 시간을 그는 떠돌며 각종 매체에 필자로 이름을 날렸다. 어떤 땐 한 달에 서른 꼭지를 쓰기도 했다. 수많은 산문집과 동화, 여행기, 시선집 등도 펴내면서 수십 권의 책에 이름을 올렸고, ‘아기참새 찌꾸’는 베스트셀러로 그에게 집과 차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새 천년에 접어든 2001년 순천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정착했다.

“삶에 항복한 것이지요. 전업 작가로 밑천이 다 떨어져 지치기도 했고요. 출판사 열림원 사장이 대학 들어가면 망한다며 같이 책 만들면서 살자고 했는데, 대학 들어가서도 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오만이었지요.”

월급쟁이 교수로 살면서 글을 잘 쓸 수 없게 되는 것은, 편해져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한다. 글은 24시간 다 쏟아 붓고 거기다 신이 준 재능이라는 알파가 더해져야 겨우 독자가 읽을 만한 글이 나오는데, 교수 생활은 쪼가리 시간밖에 쓸 수 없으니 애시당초 글을 쓸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거기다 먹고살만큼의 돈은 나오고.

그러나 지금도 그는 고등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햇살이 창으로 들면 “저렇게 환한 시를 쓰라고 햇살이 빛나는구나” 하고, 새가 노래하고 매미가 울면 “저렇게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시를 쓰라는구나” 여길 만큼 24시간 시를 생각하고 있다. 선승의 화두처럼 꿈에서도 시를 놓지 못하는 그는 방마다 시의 시체가 들어차 있는 꿈을 꾼다. 그런 꿈을 안 꾸면 오히려 “꿈꾼 지 얼마나 됐나”하고 걱정할 정도다.

순천대 교수로 오면서 와온 바다를 만나고 한결 편안해졌다는 그는 아침마다 순천을 흐르는 동천 물가를 산책하며 시를 써왔다. 그렇게 쓴 시를 모아 내년에 <푸른 용과 강과 착한 사람들의 노래>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펴낼 예정이다.

“‘와온 바다’가 제가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의 시였다면 이번 시집은 순천의 삶을 담은 것입니다. 미발표된 시만 실을 겁니다.”

그동안 출판기념회도 한 번 한 적 없다는 그는 이제 세상이 달라져서 인터뷰에도 응했다고 한다. 달라진 세상에서 그는 평화로워 보인다. 인도에서 찾았던 고향을 이곳 순천의 동천과 와온 바다에서도 발견했으니, 그의 노후는 다사로울 듯하다. 그가 미리 공개하길 꺼리는 새 시집에 들어갈 시 가운데 타고르의 시 ‘챔파꽃’을 닮은 ‘호두바람’이라는 시를 발견하고 억지로 보여달라고 했다.

“소잔등에 엄마와 둘이 타고/ 지평선을 향해 걸어갔다/ 어린시절 우리집 마당에 호두나무가 있었다/…(중략)… 엄마는 소를 타고/ 지평선 쪽으로 계속 갔고/ 나는 강나루에서 내려/ 엄마를 향해 손 흔들었다/ 해가 지고/ 바람 속에서 호두 냄새가 났다/ 호두바람 속에서는 펌프샘 가에 앉아 울던/ 엄마의 눈물냄새가 난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 먹고 말아 먹는가> 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등이 있다.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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