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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영화 제작 입문한 78세 태권도 사범 강익조 

I CAN, I WILL, I DID!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ins.com
태권도 인생 66년은 자기 극복의 길 … “젊은이에게 자신감 주는 영화 되길”

강익조 사범은 고사 ‘새옹지마(塞翁之馬)’에 나오는 새옹과 닮았다.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가서 뉴욕한인회장까지 올랐지만 숱한 실패와 좌절로 기나긴 시련기를 겪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태권도였다. 영화 'I CAN I WILL I DID' 속 주인공 10대 소년의 모습에서 그가 보이는 듯하다. 강 사범이 처음 제작한 영화다.


▎강익조 사범은 ‘뉴욕한인사 100인’에 들 만큼 뉴욕 한인사회의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가 자전적 이야기를 소재로 만든 영화 'I CAN I WILL I DID'가 미국 각종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고 있다. 강 사범의 주먹에서 78세 나이를 무색케 하는 힘이 느껴진다. / 사진· 전민규
“아이들 도장을 바꿔야겠어요!”

학부모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태권도장 한쪽에 드러누워 있는 아이를 흘겨본다, 아이의 이름은 토드. 여섯 살 된 발달장애아다. 학부모들은 토드 때문에 자기 아이들이 운동을 제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토드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나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태권도장의 사범이 나섰다. 학부모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다. 미국 동부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에서 ‘강 태권도&합기도장’을 운영하는 강익조 사범이다.

“만약 여러분 자식이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아이에게도 올바르게 클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강 사범은 어린 제자들과 함께 허드슨강을 끼고 있는 베어 마운틴으로 산행을 갔다. 해발 265m인 서울 남산보다 약간 높은 산이지만 아이들에게는 만만찮은 등산 코스였다. 결국 산 중턱에서 아홉 살 아이가 더 못 올라가겠다며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You got to go(가야 해)!”

아이를 격려한 사람은 토드였다. 세 살 많은 형이 일어설 때까지 “I can I will I did”를 반복했다. 강 사범이 도장에서 ‘더는 못할 것 같다’고 투정부리는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다.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는 것 같았던 아이에게도 강 사범의 가르침이 스며든 것이다. 강 사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먹고 사는 수단’에 그쳤던 태권도 지도에 사명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제자들에게 큰 것을 준 적이 없어요. 태권도 수련에 도움 되는 말들을 수백 수천 번 했을 뿐입니다. 그런 말들이 아이들 가슴속으로 파고들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자기극복에 대한 확신. 강 사범의 66년 태권도 인생을 요약하는 에센스다. 그가 또 한 번의 극기(克己)를 준비한다. 78세, 황혼의 나이에 영화 제작자로 변신했다. 영화 제목도 로 지었다.

태권도는 몸싸움 아닌 수양의 길


▎영화 촬영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을 묻자 강익조 사범은 “연기”라고 대답했다. 'I CAN I WILL I DID' 촬영 현장. / 사진제공·강익조
1960년 서울 성북구 미아동에 낸 작은 태권도장이 시작이었다.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져 경기도 의정부에 있던 미군기지인 캠프 스탠리에서 미군들에게도 태권도를 지도했다.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였다. 막 새마을운동 노래가 들리던 시절 태권도장 하나로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1968년 미국 이민법 개정으로 미국 가는 길이 수월해진 때였다.

당시 미국은 동양무술의 각축장이었다. 미국에 동양무술을 선보인 일본 가라테가 주류였고, 중국 쿵푸가 대중화되기 시작하던 시절이었다. 홍콩 배우 이소룡이 출연한 무술영화 <당산대형>(1971)이 공전의 히트를 친 덕분이다.

하지만 태권도의 존재는 미미했다. 고(故) 조시학 사범이 1961년 뉴욕에 처음 태권도장을 열었을 무렵만 해도 태권도 사범들은 ‘코리안 가라테’ 간판을 걸고 도장을 운영할 정도였다.

10년간 태권도는 꾸준히 성장했다. 강 사범이 미국에 갈 즈음인 1971년엔 인기 동양무술로 자리 잡았다. <동아일보>는 1971년 12월 3일자에서 미국 태권도 현황을 이렇게 소개했다. ‘미국 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뉴욕에서만도 태권도장을 거쳐간 공식 인구는 21만여 명이며, 유단자만도 1300명이 넘는다.’

강 사범은 태권도 정신을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많은 외국인이 동양무술을 격파나 발차기, 몸싸움으로만 생각하잖아요? 태권도는 단순히 몸싸움이 아닙니다. 내·외적 수양이에요. 내적으로는 자기극복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 외적으로는 타인과 공동체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무술이 지위 고하를 불문하고 차려, 경례를 하게 합니까?”

강 사범은 1971년 미국에 태권도장을 열면서 다른 도장에서는 보기 드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수련 후 10분 동안 제자들과 둘러앉아 질의응답을 하는 것이다. “왜 선생님과 부모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그분들에게서 듣고 배워야 할까?” 제자들이 스스로 깨달아 대답하는 기회를 줬다. ‘I can I will I did’도 중요한 화두였다.

“아이들이 태권도에 입문해 검정띠를 딸 때까지 이 말을 천 번은 반복해야 합니다. 장벽을 만날 때마다 되뇌도록 하면 나중에 아이들끼리 “I did(정말 해냈다)!”며 기뻐합니다. 무턱대고 강요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이지요.”

이렇게 강 사범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 아직도 잊지 않고 찾아온다. 2009년에는 제자 200여 명이 맨해튼의 한 레스토랑에서 사은회를 겸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로널드 디피노 박사는 하버드대 암센터를 거쳐 현재 MD앤더슨 암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강 사범님은 인생을 자신 있게 사는 법을 지도해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라고 감사를 표했다.

무술에서 깨달음을 찾는 강 사범에게 당시 무술영화는 몸싸움에 불과했다. 홍콩 무술영화가 동양무술을 미국에 전파하는 역할도 했지만 화려한 액션이라는 정형화된 틀에 가둔 책임도 있다는 게 강 사범의 생각이었다. 피를 흘리고 승부를 짓는 고루한 연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서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태권도를 만나 장애를 극복하는 10대 소년의 이야기를 영화에 담았습니다. 고아에다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던 소년 벤은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됩니다. 정신적·육체적 상처가 극에 달한 사람들, 특히 청소년들은 주저앉고 맙니다. 태권도를 소재로 해서 당신들도 이겨낼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습니다.”

뉴욕한인회장 놓고 박지원과 맞대결


▎강익조 사범이 만든 영화 'I CAN I WILL I DID' 시사회가 지난 7월 30일 뉴욕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열렸다. 영화 상영이 끝나자 관객들이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날 티켓은 매진됐으며, 재상영 요청이 쇄도했다. / 사진제공·강익조
미국 이민 초기에는 태권도장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아내 강행자 씨와 함께 과일가게도 같이 운영해야 했다. 당시 1만 달러 정도 자본으로 개업할 수 있는 업종이 별로 없었다. 미주 한인들이 경쟁적으로 과일가게 창업에 뛰어든 이유였다. 과일가게 상인들 모임인 ‘뉴욕한인청과상조회’는 지금도 뉴욕 한인사회에서 가장 큰 직능단체다.

일이 잘 풀려 1979년에는 청과상조회 회장을 맡았고, 1년 후에는 뉴욕한인회장 선거에도 나갔다. 그때 맞붙었던 상대가 국민의당 전 대표인 박지원 씨다. 1970년대 미국에 가서 가발사업으로 기업을 일군 박 전 대표는 1980년 선거에서 역대 최연소 뉴욕한인회장으로 뽑혔다. 그의 기세에 밀렸던 강 사범은 절치부심한 끝에 2년 뒤 17대 뉴욕한인회장에 당선됐다.

강 사범의 공약은 뉴욕한인회관을 짓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 내 한인회관은 전두환 정부의 지원으로 세운 LA한인회관 하나뿐이었다. 그는 당선 직후부터 1년 5개월 동안 모금함을 들고 한인 행사장을 뛰어다녔다. 두 달이면 구두가 닳아서 바꿔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 노력 끝에 26만 달러를 모아 맨해튼 한복판에 있는 6층짜리 건물을 매입했다. 뉴욕 한인의 힘만으로 마련한 첫 터전이다.

그는 뉴욕한인회관 현판식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뉴욕 동포의 숙원인 한인회관을 마침내 구입했습니다. 경사스러운 사실을 발표하는 이 자리가 매우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는 이 공로로 뉴욕한인회장을 연임했다. 전무후무한 일이다. 1984년부터는 미주한인회총연합회장도 맡았다. 영광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달이 차면 기울기 마련이다. 태권도에서 멀어질수록 실패의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지고 있었다.

강 회장은 강 사장으로 또 한 번 변신한다. <한미일보>라는 언론사를 만들고 정수기를 한국에 수출하는 사업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특히 강 사범은 정수기 사업을 아쉬워했다. 자신이 정수기 크기를 부엌에 알맞게 개조한 ‘카운터톱모델’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미련이 남아 정계에도 기웃거렸다. 1994년 고향인 제주도에 돌아와 모교 총동문회장을 맡는 등 인맥을 넓혀 나갔다. 당시 고건 명지대 총장이 주도한 ‘새시대 포럼’에도 들어가 활동했다. 1996년 15대 총선 때 제주도 서귀포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떨어졌다.

“한국 정치를 너무 몰랐습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수중에 남은 돈이 6만 달러밖에 안됐지만 부족한 선거자금은 변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낙선한 뒤 욕심을 접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태권도 하나만 믿고 제주도에서 서울로 온 10대 소년이었다. 빛나는 영광도 있었지만 쓰라린 실패도 맛봤다. 가진 것 대부분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남은 건 다시 태권도였다. 그는 지나간 실패를 고맙게 생각한다.

“‘I can I will I did’는 성공한 자의 오만이 아니라 실패한 사람의 믿음입니다. 맨손으로 뉴욕한인회관을 일군 것뿐만 아니라 계속되는 실패를 통해서 ‘나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더욱 가슴에 새겼습니다. 그걸로 만족합니다.”

시나리오 쓰고 주연 맡아 노익장 과시


▎강익조 사범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자는 수백 명이다. 태권도장을 방문한 옛 제자들이 강 사범과 함께 합을 맞춰보고 있다. / 사진제공·강익조
왜 굳이 영화일까. 강 사범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무술감독으로 활약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1968년 개봉한 <웅녀>라는 영화에서였다. 원래 무술감독이었던 안일혁 씨가 어느 날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강 사범이 남은 촬영을 맡은 것이다. 그때 뿌린 씨앗이 49년 지나서야 꽃을 피우는 셈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맨땅에 헤딩’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내 뜻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 것 같아 시나리오 집필, 제작은 물론 주연까지 맡았다.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시행착오 연속이었다.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데만 5년이 걸렸다. 200만 달러에 달하는 제작비도 문제였다. 제자들이 발벗고 나섰다.

“2009년부터 한국영화 시나리오 100여 편을 구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제가 한글로 초고를 쓰면 한인 제자 5명이 영어로 번역했지요. 장성한 제자들이 알음알음 마련해준 40만 달러를 종잣돈 삼아 촬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거듭된 시행착오 중에서도 가장 힘겨웠던 것은 무엇일까? 강 사범은 연기를 꼽았다. “NG를 계속 낼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보통 한 컷에 열 번 이상 촬영했지요. 자연스러운 연기, 영어 발음도 어려웠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2016년 영화를 완성했지만 아직 배급사를 찾지 못했다. 강 사범은 'I CAN I WILL I DID'의 작품성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여러 독립영화제에서 강 사범의 영화에 호평을 보냈다. 올해 5월 1일 플로리다에서 열린 ‘선스크린 필름 페스티벌’에서 장편영화 부문 대상과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지난 7월 30일 뉴욕에서 개최된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는 개막작으로 선정됐다. 강 사범은 “주인공 소년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그린 점을 높게 평가해준 것 같습니다”며 흡족해했다.

많은 명사가 은퇴 후 회고록을 집필한다. 말 그대로 삶을 되돌아보는 의미에서다. 희수(喜壽)를 넘긴 강 사범에게도 'I CAN I WILL I DID'는 스스로를 회고하는 영화일까? 그는 “나이는 숫자가 아니냐?”고 반문하며 다음 작품을 얘기했다.

“이번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미숙한 점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 점을 반성하면서 ‘다음에는 확신을 가지고 제대로 영화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태권도를 전 세계에 확실히 알릴 수 있도록 큰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보여주고 제작을 요청할 겁니다.”

어떤 점이 미숙했느냐는 질문에 강 사범은 말을 아꼈다. 전형적인 영화 제작자다운 모습이 드러났다. 다만 미숙한 게 연기였는지 묻자 “연기보다는 제가 의도한 흐름에서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고 답했다. 다음 작품에서도 태권 도복을 입은 강 사범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이 커졌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무척 힘듭니다. 그래도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곧바로 부딪쳐서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I CAN I WILL I DID'가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ins.com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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