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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교수의 ‘조선을 만든 사람들’(23)] 조선성리학의 최초 순교자 정몽주(2) 

역사의 불합리에 죽고 순수한 모범으로 부활하다 

김영수 영남대 정외과 교수
이색-이성계의 연합정권을 꿈꿨던 성리학자 정몽주. 하지만 그의 이런 꿈은 끝내 좌절됐다. 인간 정몽주의 삶의 성공은 바로 그 실패에 있었다. 한때 이성계 진영에 참가했던 정몽주는 마지막 순간 입장을 바꿈으로써 충렬의 화신으로 역사의 전당에 영원히 봉헌됐다.

▎2014년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에서 그려진 정몽주(임호 분).
지난 호에서 정몽주의 김득배 제문을 소개했다. 그 속에는 더 많은 의미가 내포돼 있다. 정몽주는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의 죽음을 동시대의 사람들과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것은 고려 내부에 매우 새로운 유형의 정신이 탄생했음을 시사한다. 제문에 나타난 정몽주의 질문들은 고려 사회에서는 낯선 것이었다. <고려사> 전체에 그런 질문은 없다. 그것은 정몽주가 홍언박(洪彦博)처럼 자신이 사는 세계에 고착돼 그 안에서만 의미를 이해하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현세에 있으면서도 현세를 초월해 그 너머에서 문제를 통찰하려는 인간이었다. 행위에 불변의 원칙을 가져다주고 삶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을 탐색했던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삶과 행위는 하루살이처럼 부질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혼란을 가져온다. 세계는 더 이상 조화롭지 않고 모든 것이 이원적 대립으로 나타난다. 이럴 때 인간은 현실 속에 가라앉거나 아니면 현실의 뿌리를 뽑는 두 극단을 택할 수 있다. 앞의 경우 역사의 의미는 질문되지 않으며 뒤의 경우 역사의 의미는 살아갈 터전이 없다. 하지만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할 때 그는 분열된 인간이며 그 의식은 ‘불행한 의식(unhappy consciousness)’이다.


▎임고서원에 있는 ‘동방이학지조’비. ‘이학’은 성리학을 뜻한다. 성리학은 안향이 13세기 말 처음 소개했고 1367년 성균관 중수를 계기로 정치적·정신적 운동으로 발전해 조선 건국의 이념을 제공했다. 정몽주는 이때 성균관 학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제문에 나타난 정몽주는 바로 그런 상태에 있었다. 그 혼란을 그는 ‘명(命)’으로 해소하려고 한다. 그것은 알 수 없고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뜻이다. 역사의 이 모든 불합리를, 그리고 이 혼란을 체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역사를 묵묵히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정몽주의 김득배 애도 시를 보자.

“서생이란 글공부가 합당하건만/ 어찌 장군기로 삼군 거느렸소/ 충혼장백은 이제 어디 있는지/ 청산을 돌아보니 흰 구름만 떠 있네.(自是書生合討文 何麾羽將三軍 忠魂壯魄今安在 回首靑山空白雲)”(<祭金元帥>)

청산 위의 흰 구름, 그것은 슬픔과 허무 그리고 ‘어쩔 수 없음’의 표상이다. 성리학은 인간의 구원을 인간 밖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완성하려는 시도다. 즉 인간은 그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이 세계에서 구원될 수 없다고 본다. 세계의 구원도 궁극적으로 나의 구원에서 비롯된다. <대학>이 제시하는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격물은 곧 평천하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의 실제가 그처럼 논리적이고 정합적인가? 인간은 그 자신을 스스로 구할 수 있는가? 또한 구원된 인간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가? 세계는 구원돼야 할 존재인가? 성리학자들은 인간이 내적으로 그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는 점을 증험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나 인류, 만물로 확대된 자아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것은 역사에서 한 번도 완전히 입증되지 않았다. 거기에 성리학자들의 곤경이 존재했다. 세계는 자신의 단순한 확장 이상인 것이다. 하늘은 세계를 선하게 창조했지만 다만 하나의 가능성으로만 남겨뒀다. 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이 분열의 크레바스다. 정몽주의 ‘명(命)’은 그 점에 대한 비통한 고백인 것이다.

‘순교’가 된 정몽주의 죽음


▎[고려사] ‘정몽주 열전’. 정몽주의 어머니 이씨가 안고 있던 난초 화분을 떨어뜨려 놀라는 태몽을 꿨다고 해서 정몽주의 어린 시절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다. 난초는 속세에 물들지 않은 고결한 기품을 뜻한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정몽주의 절규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늘이 역사에서 이념 혹은 목적을 실현하는 방식을 발견하게 된다. 정몽주는 김득배의 죽음을 통해 역사의 참다운 이념을 근본적으로 자각했다. 김득배의 죽음에 대한 비탄은 역사의 불합리에 대한 의문이지만 동시에 역사에서 참으로 실현되지 않은 것의 발견 혹은 고양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실현이 삶의 목표가 되고 정몽주는 마침내 그 이념의 서식처가 됐다. 하지만 역사의 이념은 그의 의식 속에서 이미 탄생됐으나 그것은 아직 현실 세계 속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김득배의 죽음은 그 사실을 분명히 자각하게 했을 뿐이다. 이념의 성숙은 정몽주에게 그의 삶 모두를 요구했다. 그리고 정몽주는 생의 종국에 마침내 그 같은 인간의 전형이 됐다. 현실적으로 이념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의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문은 정몽주 자신의 정신적 운명에 대한 예언이다. 그는 정치 속에서 그의 정신을 완성하고자 했으므로 이 또한 그의 정치적 운명이기도 하다. 정몽주도 본질적으로 김득배와 같은 죽음을 맞았다. 정치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정략의 희생양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김득배와 달리 그는 자신의 죽음에 내포된 이념적 의미를 자각하고 있었다. 정몽주의 죽음은 조선인의 영혼을 울렸고, 단순한 정치적 사건을 넘어 정신적 사건이 됐다. 순교란 세계와 인간의 크레바스를 죽음을 통해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리학의 이념이 세계와 정치 속에 존재하는 방식이며 그래서 정몽주의 죽음은 순교가 됐다. 조선을 세운 건 이성계와 정도전이지만 조선의 정신적 탄생은 정몽주의 죽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송시열은 “(정몽주가) 조선 문명의 창성을 열어놓아 우리 동방 사람으로 하여금 망극한 은혜를 받게 했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이 기독교의 탄생에서 가진 의미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플라톤은 이 세계에서 정신이 실현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교처럼 대개 산중(山中)이나 혹은 기독교처럼 십자가 위에서만 실현되는 것이다. 정몽주의 절규는 세계 속에 나타난 정신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다. 세계는 정신이 살기에 척박한 곳이다.

김득배 제문은 고려의 태내에서 새로운 유형의 정신과 인간이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첫 번째 기록이다. 불교 역시 인간과 세계의 뿌리에 대한 한반도인의 질문에 천년 동안 답해 왔으며 많은 헌신자를 배출해왔다. 하지만 정몽주처럼 그 뿌리를 역사와 정치 속에서 동시에 발견하려고 던진 질문은 처음이었다고 생각한다. 불교의 출가(出家)나 도가의 죽림(竹林)이 시사하는 바처럼 역사와 정치는 어떤 의미에서 진리로부터 버림받은 영역이다. 성리학은 이에 대해 처음으로 체계적 반론을 제기했다. 출가와 죽림이 인륜(人倫)을 방기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관은 고려 말 한반도에 유입된 이래 이제현과 이색 등 혁신적 지식인들에게 수용됐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로 역사와 정치 속에서 질문되고 자신의 문제로 자각된 것은 정몽주로부터 비롯됐다. 따라서 이 비극적 사건은 인간의 야수성과 정치의 무자비함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면서 동시에 고려 말 새로운 정신운동과 정치 운동의 첫 기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몽주의 비탄은 일차적으로 ‘정치’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됐다. 당대 그리고 공민왕의 정치적 도덕성에 대한 격한 항의였다. 하지만 이 비극의 아래에는 정치의 어두운 본질이 존재한다. 왕의 입장에서 보면 장군들의 죽음은 왕국의 안전을 위해 불가피했다. 그것은 비록 외적과의 전쟁은 아니지만 실은 또 하나의 전쟁이다. 그리고 내전 역시 똑같은 참극을 초래한다. 홍건적과의 전쟁이 끝났을 때 공민왕은 기쁨과 함께 반란의 가능성도 보았을 뿐이다. 정치를 있는 그대로 보면 정치는 어느 곳에서나 평화와 전쟁의 경계에 놓여 있다. 가깝게는 조일신의 난과 기철의 획책이 그 실례다. 하지만 26세의 청년 정몽주에게는 애국의 배후에 놓인 반역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명백한 것이며, 적어도 왕은 그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치에 대한 청년 정몽주의 이해는 아직 일천한 것이다. 이상적인 정치의 목적은 인륜의 실현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정치는 인간성에 대한 도전이며 인륜과 자연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다. 정치는 때때로 윤리를 넘어선 영역이며 그래서 윤리학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분야다. 그리고 이 지점이야말로 역사학을 이해하는 데 빈번히 실패하는 곳이며 동시에 정치학이 좀처럼 설득할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군들의 애국적 위업과 반역이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 통절한 분열로 인해 인간성과 역사의 정의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좌절했을 것이다. 김용과 홍언박은 오히려 그 분열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정치의 불가피성에 깊이 사로잡힌 존재들이다. 그것은 이들이 이미 인간성의 한계를 넘어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도덕을 정치의 중심에 놓았던 조선정치도 반드시 도덕적인 것은 아니었다. 조광조의 죽음이 그 첫 번째 증거다. 조선은 정몽주를 추앙하면서도 그 사도를 자임한 조광조를 죽였다. 그의 죽음은 조선 성리학의 두 번째 순교다. 그런데 그가 죽은 것은 사림의 주장처럼 ‘소인(小人)’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림의 정치는 이른바 ‘군자(君子)’ 사이의 더 잔인하고 살육적인 붕당정치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치적 도덕이나 평화는 진리에 의해 보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일 가능성이 크다. 정치의 이러한 특성은 정몽주의 좌절 이래 조선정치에서도 깊이 있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서삼경의 요체 꿰뚫었던 정몽주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송시열의 초상. 그는 조선 도학(道學)의 기원이 정몽주에 있으며, 정몽주의 본질이 충성보다는 도학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율곡 이이는 정몽주는 충신일 뿐 조선 도학의 기원은 아니라고 보았다.(왼) / 정몽주 영정.
정몽주는 충절의 화신으로 역사에 기억된다. 하지만 이색이 정몽주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로 평가했음에도 정몽주가 한국 성리학 운동 초기의 리더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약하다. 조선시대에도 그 점이 잘 부각되지 않았다. 사실 <포은집>에는 시가 대부분이고 이학에 관한 글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황도 정몽주가 “해동의 유종이신데 후학이 불행히도 논저를 미처 보지 못했고 성균관에서 횡설수설하셨다는 말씀에 대해 우리가 그 실마리를 찾으려 해도 증거할 데가 없다”(<臨皐書院祭文>)고 말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순절의 아우라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송시열은 고려를 위한 순절은 “선생께서 하신 지극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멀리 기자의 도를 이어받고 가까이 주자의 법을 지켜 우리 조선의 성대한 문명(我朝文明之盛)을 열어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대대로 끝없는 은혜를 받게 하신 것이야말로 헤아릴 수도 없고 두루 알 수도 없는 것이다.”(<圃隱先生集重刊序>)고 역설했다.

고려에서 성리학 운동이 본격화된 것은 1367년(공민왕 16년) 정몽주가 31세 되던 해다. 이해 홍건적의 전란으로 불탄 성균관을 중수하고 사서재(四書齋)와 오경재(五經齋)를 두어 학생 100명을 선발했다. 사서재는 사서(논어·맹자·중용·대학), 오경재는 오경(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 전문반이다. 사서를 기본 텍스트로 정한 것은 고려의 국학이 경학(經學) 중심의 성리학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1289년 충렬왕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간 안향이 성리학과 조우한 지 78년 만이었다.


▎성균관 중영을 계기로 시작된 성리학 운동 초기의 핵심 멤버였던 김구용의 시비.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에 있다. 정몽주보다 한 살 아래로 두 사람은 절친이었다. 1384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체포돼 유배 도중 사망했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1360년대 전후 일부 젊은 학인 사이에서 성리학은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성균관 학관이었던 김구용은 “경전을 가지고 수업하는 자들이 앞에 열을 지었으며 비록 휴가 중이라도 질문하는 자들이 집에 잇따라 와서 많이 배우고 갔다”고 했다.(정도전, <若齋遺稿序>) 그 전환의 요체는 “사장은 말예(末藝)이고, 이른바 신심(身心)의 학문이 있는데 그 말은 <대학>과 <중용> 두 책에 갖춰져 있다”는 청년 정몽주의 전언에 담겨 있다. 이제현, 이색을 거치며 온축된 성리학이 마침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정도전의 회고를 보면 이제현, 이곡, 이인복은 고문운동을 통해 화려함보다 질박한 기풍을 강조해 문풍을 혁신했다. 성리학을 철학적으로 소화해 본격적으로 확산시킨 것은 이색의 공이었다.(<陶隱文集序> 戊辰十月) 이제현이 기초를 놓고 이색이 집을 세운 것이다.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박의중, 김구용, 권근, 윤소종 그리고 자신이 이색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으로 전회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367년 성균관의 중영과 커리큘럼의 변경은 성리학의 확산에 큰 분수령을 이뤘다. 여기에 이색을 필두로 그 사도들이 대거 집결해 새로운 문명운동과 정치운동이 태동했다. 한국인의 정신적·정치적 지향이 변혁되고 향후 500년간 지속할 한국 역사의 한 장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곳에서 이색 외에 가장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발휘한 게 정몽주였다. 당시 성리학 관련 저술의 유입은 매우 초보적이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기본 텍스트인 <사서삼경>에 대한 주자학적 이해의 요체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정도전은 “우리 동방 500년에 이 이치를 안 자가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라고 평했다. 이색 역시 정몽주의 설명이 “시원시원하고(豪爽) 탁월해서 두서없이 말해도(橫說堅說) 적당하지 않은 게 없다(無非的當)”고 평가했다. 호병문(胡炳文, 1250~1333)의 <사서통(四書通)>이 유입돼 대조해보니 정몽주의 해석은 정확했다. <사서통>은 원말의 학자 호병문이 주자서에 대한 주석에 착오가 많은 것을 보고 하나하나 대조해 주자의 본의에 어긋난 것을 삭제하고 1326년 완성했다. 이 저서는 주자학 이해의 표준서로 널리 인정받았다.

이성계-이색 연합정권을 꿈꾸다


▎원대의 학자 호병문의 [사서통]. 서문을 보면 독자들이 주자서를 읽고도 그 뜻을 알지 못할까 염려해 책을 지었다고 밝혔다. 이 책은 주자서 해석의 표준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이 책이 유입되면서 정몽주의 해석이 정확했음이 입증됐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하지만 정몽주는 단순한 학자가 아니다. 그는 뛰어난 시인이자 외교관, 행정가, 정치가로서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한 르네상스적 인간이었다. <신정률(新定律)>의 편찬은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다. 당시 고려 법전의 표준은 1346년 반포된 원의 <지정조격(至正條格)>이었다. 하지만 당시 고려와 원은 법률 현실이 달랐고, 고려의 법률도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몽주는 고려율과 명의 <대명률>을 비교, 참작해 1392년(공양왕 4년) 2월 새 법전을 완성했다.(<포은선생문집> ‘本傳’) 이는 국가개조를 위해 정몽주가 구상한 청사진의 일부였을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두 달 뒤 그는 피살됐고 고려왕조도 곧 사라졌다. 정몽주는 단순한 사변적 이념가가 아닌 걸출한 경세가였다.

정몽주의 정치적 일생은 이색과 이성계의 사이에 존재했다. 이색은 14세기 말의 사상 혁신, 이성계는 정치 혁신의 중심이었다. 사상이 정치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물질적 표현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색은 이를 제공하지 못했다. 이색 주위에 결집한 정도전, 이숭인, 권근 등 신진 성리학자에게 이는 큰 난관이었다. 1374년 공민왕 사후 대외정책의 변동을 둘러싼 정치투쟁에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 성리학의 사도들은 정치적 서식처를 찾아 뿔뿔이 흩어졌고, 종국에는 생명을 건 정적으로 변모했다. 이성계는 정몽주보다 두 살 위다. 이성계는 젊은 시절부터 정몽주를 친애했다.

“처음에 공은 태조의 인정을 가장 두텁게 받아 누차 태조의 막하(幕下)에 부름을 받았다.”(<연려실기술>) 둘은 비슷한 시기에 정치적 삶을 시작했다. 이성계는 1356년(공민왕 5년)에 개경에 왔고, 정몽주는 1360년에 급제했다. 두 사람이 직접적 관계를 맺은 것은 1364년(공민왕 13년)이었을 것이다. 이해 초 이성계의 고종사촌 삼선, 삼개가 여진족을 이끌고 화주(영흥) 이북지역을 점령했다. 이때 28세의 정몽주는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의 종사관으로 출전했다. 고려군이 연전연패하자 2월 이성계가 출전해 적을 격퇴했다. 그 뒤 1380년(우왕 6년) 44세의 정몽주는 이성계의 조전원수가 돼 역사적인 황산전투에 참가했다. 1383년 이성계가 호발도를 격퇴할 때도 동북면조전원수로 이성계 막하에서 종군했다. 그는 이성계에게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 이성계의 초상화에 쓴 찬사를 보자.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에 소재한 충렬서원에는 정몽주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그의 충절을 상징하는 시 ‘단심가’도 볼 수 있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풍채의 호준함은 화봉(華峰)의 송골매요/ 지략의 심웅함은 남양(南陽)의 용이로다/ 묘당에서 국정을 판결하고/ 군막에서 승리를 결정하네/ 창해에서 큰물 막고/ 함지에서 일출을 도우니/ 역사에서 옛사람을 찾아도/ 아마 공 같은 이 드물겠네.”(<松軒李侍中畵像讚>)

1388년 위화도회군에서 돌아온 뒤 이성계는 대대적인 전제개혁에 나섰다. 공전제의 회복은 고려 말 최대의 개혁과제였다. 하지만 그것은 전통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빼앗는 것이기도 했다. 이색은 반대파의 중심에 섰다. 정몽주는 주저하며 입장을 정하지 못했다. 당시 그는 이성계파의 핵심 인물이었다. 반이성계파 김종연이 노린 첫 살해 대상도 이성계에 이어 정몽주였다. 하지만 이성계와 이색의 분열은 정몽주에게는 악몽이었다. 그의 이념과 개혁의 분열을 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몽주는 양자의 타협과 공존을 위해 이성계-이색의 연립정권을 강력히 추진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성공한 연립정권은 매우 취약해 곧 붕괴했다. 공존의 여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정몽주는 거의 끝까지 이성계를 떠나지 않았다. 1389년 11월 이성계 암살과 우왕 복립을 기도한 김저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이성계를 비롯한 정몽주, 정도전, 조준 등 이성계 진영의 핵심 9인이 흥국사에 모여 우왕, 창왕의 폐위와 공양왕의 옹립을 결정했다. 우왕과 창왕은 얼마 뒤 처형됐다. 그 공으로 정몽주는 9공신의 일원이 됐다. 신하들이 왕의 목숨을 좌지우지했으니 왕정의 이념에서 보면 대역부도라 할 수 있다. 이황의 제자 정구(鄭逑)는 정몽주의 이런 점을 의심했다. 하지만 이황은 “사람은 과오가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과오가 없는 가운데 과오가 있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퇴계집>)며 이를 준열히 비판했다.

정몽주 암살에 분노한 이성계


▎박위의 영정. 고려 우왕 집권 초기에 김해부사가 됐다. 2차 홍건적의 침입 때 26세의 정몽주와 처음 만나 친분을 맺었다. 1390년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결심한 후 박위와 제휴해 군사적 지원을 받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사진제공ㆍ김영수
위화도회군 뒤 피비린내 나는 숙청이 거듭됐다. 반 이성계파의 수많은 정치가, 장군들이 음모에 휘말려 처형되거나 유배됐다. 정몽주는 개혁과 충성 사이에서 방황했다. 1390년 5월 윤이·이초 사건에 직면하자 정몽주는 결국 이성계에게 대항해 왕조를 지킬 것을 결심했다. 이 사건의 내용은 고려인 윤이·이초가 이색, 우현보의 명의로 이성계파를 제거하기 위한 명나라의 파병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색을 비롯한 피의자들이 대거 투옥됐다. 이성계 진영의 최후의 대공세였다. 정몽주는 개혁이 결국 역성혁명으로 가고 있는 것을 감지했다. 정몽주는 “윤이·이초 무리는 죄가 본디 명백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이 사건이 조작됐다는 주장으로 이성계 진영과의 결별을 알리는 공식선언이었다. 그러자 두려움에 떨던 공양왕도 이성계와 싸울 의지를 굳혔다. 이방원은 정몽주의 변심을 걱정했다. 그러자 이성계는 “우리가 혹 무고를 당한다면 몽주는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를 변명해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와 관계되는 일이라면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초청했다. 술을 권하며 하여가를 읊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연려실기술>)

1392년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를 천재일우의 기회로 삼아 이성계 일파의 제거에 나섰다. 당시 이방원은 생모의 시묘살이 중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절박해지자 이방원은 정몽주의 암살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강하게 반대했다.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 있으니 다만 마땅히 순리대로 받아들일 뿐이다.” 정몽주의 암살은 곧 역성혁명을 의미했다. 위화도회군 이후의 정치가 역성혁명의 문턱까지 도달한 것이다. 이제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면 이성계 자신과 가문의 멸망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주저했다. 정몽주와의 인연도 깊었고, 역성혁명의 길이란 그만큼 험로였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음에도 이성계의 결론은 ‘명(命)’이었다. 생이든 사든 운명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성계는 어느 정도 로맨틱한 인물이며 동시에 뼛속까지 정치가는 아니었다.

이지란을 포함해 이성계의 막하 인물은 누구도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이방원은 마침내 결심했다. “아버님께서 내 말을 듣지 않지만 정몽주는 죽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마땅히 그 허물을 책임지겠다.”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건국을 최종 결정한 것은 이방원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를 죽인 이방원에게 분노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로 세상에 알려졌는데 너희가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이 일을 몰랐다고 여기겠는가? 부모가 자식에게 경서(經書)를 가르친 것은 충성하고 효도하기를 원한 것인데 네가 감히 불효한 짓을 이렇게 하니 내가 사약을 먹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총서>)

그러나 이성계의 주장은 순진하거나 위선적이다. 그는 왕명 없이 회군했으며 이미 두 명의 왕을 죽였다. 공양왕은 목숨을 걱정해 이성계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충성’이란 정치적 수사일 뿐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주장대로 행동해야 했다면 그는 모든 권력을 반납하고 자결했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이성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이방원의 행위를 비난할 근거가 없었다. 이방원에 대한 그의 비난은 어쩌면 그 자신에 대한 분노였을 것이다.

정몽주가 암살되자 모든 저항은 끝났다. 정몽주의 저항에는 몇 가지 생각할 점이 있다. 첫째, 군사적인 고려가 미약하다. 그는 주로 공양왕과 간관 집단의 지지에 의존했다. 그것으로 이성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본 것일까?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는 사망에 이른다고 한다. 유력한 무장들이 이미 모두 제거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나의 예외는 박위(朴威)다. 1394년 이성계의 회고를 보자.

“박위가 나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음은 오늘날 시작된 것은 아니다. 지난 경오년(1390년) 공양왕이 한양으로 옮겨 갔을 적에 정몽주의 말을 곡청(曲聽)하고는 나에게 모반하려는 마음이 있었다.”(<태조실록> 3년 3월 3일) 1390년은 윤이·이초 사건이 한창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해 7월 말 공양왕은 “도읍을 옮기지 않으면 군신(君臣)을 폐하게 될 것”이라는 비록(秘錄)에 따라 한양 천도를 결심했고 며칠 뒤 정몽주는 반이성계 투쟁을 공포했다. 이 일련의 사건은 모두 연관된 것이다. 이 무렵 정몽주는 박위의 조력을 기대한 듯하다. 박위는 1389년(창왕 원년) 제1차 쓰시마정벌을 지휘해 고려 말 왜구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한 명장이다. 정몽주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362년(공민왕 11년) 2월 무렵이었다. 당시 공민왕은 제2차 홍건적의 침입으로 안동으로 파천했다가 상주에 올라와 머물 때였다. 이때 왕을 시종하던 26세의 정몽주는 객사에서 박위를 만나 친분을 맺었다. 그 뒤 1375년(우왕 2년), 정몽주가 언양(彦陽, 울산)에 유배 중일 때 박위는 김해부사가 되어 왜구를 격퇴하고 김해산성을 수리해 방비를 튼튼히 했다. 그때 정몽주는 그의 애민과 이재(吏才)를 높이 평가하는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를 썼다. 박위는 위화도회군과 공양왕의 옹립에도 참여해 정몽주와 같은 정치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이성계가 “그가 불측(不測)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가 일조일석이 아닌데도 오히려 능히 나타내지 못했다”고 평가했듯이 결정적일 때 도움을 제공하지 못했다.

둘째, 정몽주는 개혁과 혁명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는 개혁을 지지했다. 그러나 개혁이 깊어질수록 혁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한 체제를 지탱하는 근본적인 것과의 투쟁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런 투쟁 없이 개혁이 가능할까? 정몽주가 ‘이색-이성계-이림’의 3자 연합정권을 추진한 것을 보면 가능하다고 생각한 듯하다.

셋째, 인간 정몽주의 삶의 성공은 바로 그 실패에 있었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죽음은 위업의 절정에서 그 위업으로 인해 죽는 것이다. 그때 하나의 상징이 탄생한다. 역사는 어떠한 위대성도 퇴색시키기 때문에 위대성은 역사화되기 전에 초월적 영역으로 비상해야 한다. 1391년까지 이성계 진영에 참가했던 정몽주는 마지막 순간 입장을 전환함으로써 충렬의 화신으로 역사의 전당에 영원히 봉헌됐다.

정몽주와 정도전의 엇갈린 평가


▎개성에 있는 정몽주의 옛 집터에 세운 숭양서원. 정몽주의 시호를 붙여 문충당으로 불리다 1575년 ‘숭양(崧陽)’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김득배 제문>은 정몽주의 삶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거기에는 이념과 역사의 분열 그리고 죽음을 통해 그 간극을 초월하려는 성리학의 인간상이 응축돼 있기 때문이다. 유교가 정치와 역사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느꼈던 비통함은 “하늘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는 공자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의 실패와 종말의 완성이라는 선악의 구조는 윤리적 역사의식에 전형적이다. 이 분열과 ‘불행한 의식’이 <김득배 제문>의 파토스(pathos)다. 정몽주의 죽음은 그러한 정서를 격렬하게 환기시킨다. 조선인은 근본적으로 이런 유형의 인간이다. 조선인은 역사의 법정에서 역설적으로 정몽주를 충성의 심벌로, 정도전은 패역의 심벌로 재판했다. 조선의 윤리세계에서 정치는 그만큼 역사와 공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식은 엄격한 의미에서 비윤리적이며 인간이 역사에서 기대하는 위로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의식은 종말의식에 의해 현재의 실패를 자위하며 불완전한 현실에 의해 더럽혀진 자들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몽주가 죽었을 때 정도전이 차지할 역사의 위치는 이미 정해진 것이다. 조선인에게 정도전은 단순히 정몽주의 미러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막스 베버는 유교가 종교가 되기에는 너무 현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유교와 도교>) 즉 초월적 가치가 결여돼 있기 때문에 현실과 이상의 긴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치를 진리와 동일시하는 성리학자들의 분열과 초월의 열망은 필연적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세속적 삶에서 구원을 발견하려는 유형의 인간이다. 이는 프로테스탄트와 같지만 그보다는 덜 세속적이다. 또한 프로테스탄트가 인간과 신을 분리해 천상을 지향한 반면 성리학자는 세속 그 자체에서 초월성을 성취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분리는 무의미하며 세계는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은 이 세계의 종말에 저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행위 속에 함축돼 있다. 그들은 땅의 인간이다. 그러나 정신적이고 보이지 않는 것조차 철저하게 현세화하고자 했을 때의 난관은 ‘천리(天理)’에 대한 형이상학적 사유가 진술하고 있듯이 이 세계가 결코 자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세계는 언제나 분열의 위기에 가득 찬 세계며 그것이 고려 말 정몽주가 경험했던 역사의 세계다. 500여 년 뒤 한말의 최익현조차 그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분열과 고통은 어떤 의미에서 조선의 정치세계에 내재한 고유한 특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몽주와 최익현은 죽음을 통해서라도 그 분열을 뛰어넘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기술하는 ‘춘추의 인간’이며 ‘이(理)의 모험자들’인 것이다.


▎박위가 김해부사로 부임한 뒤 왜구 방비를 위해 확장해 개축한 김해 분산성. 정몽주가 쓴 <김해산성기>를 통해 정몽주와 박위의 친분을 알 수 있다.
성리학자에게 이처럼 죽음은 단순한 생의 종말이 아니라 생의 완전한 개화다. 영원한 삶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들의 죽음은 생의 단발적이고 압축적인 그리고 생의 의미를 순간적으로 응축 시키는 메타포 같은 것이다. 정몽주의 태도는 현재의 역사뿐 아니라 영원한 이념으로부터 자신을 이해하는 인간의 탄생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정몽주는 역사의 불합리에 의해 죽었지만 역사 속에서 순수한 모범으로 부활했다. 이차돈이 한국 불교 최초의 순교자였던 것처럼 정몽주는 조선 성리학 최초의 순교자였다. 왜냐하면 그 이전의 유학은 삶의 ‘신념(belief)’이라기보다 하나의 ‘도구(tool)’였기 때문이다. 정몽주는 조선 문명의 상징이 됐으며 조선 문명의 이념이 서식하는 영원한 신전이 됐다. 송시열과 최익현처럼 조선인들은 500년간 정몽주로부터 마르지 않는 윤리적 감성과 상상력을 계속 자극받고 회생시켰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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