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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풍기의 선물의 文化史(12) 화장품] 여인들의 오랜 벗이자 동반자 

고구려 쌍영총, 수산리 고분 등 벽화에 화장한 여인 등장… 신라 승려의 연분제조 기술, 일본서 인기 끌 정도로 오랜 역사 

김풍기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여러 기록을 통해 삼국시대에 이미 화장술이 발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KBS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 역을 맡은 배우 하지원이 화려한 화장과 의상·장신구 등을 한껏 뽐내고 있다.
삼국시대에 이미 얼굴 화장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고안돼 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쌍영총이라든지 수산리 고분 등의 벽화에서는 뺨에 연지를 붉고 선명하게 찍은 사실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머리 모양이나 장신구 등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몸을 치장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공예 또한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전완길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백분(白粉)의 사용과 제조 기술이 높은 수준이었다고 한다. 신라의 한 스님이 692년 일본에서 연분(鉛粉)을 만들어서 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일본의 기록에 남아 있다. 아마도 백분에 납 성분을 적절히 섞어서 만든 연분은 부착력이 좋아지고 잘 펴지기 때문에 화장품 발달사에서는 획기적인 발명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그만큼 삼국시대의 화장품 만드는 기술은 꽤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고, 그것은 화장품 수요가 사회적으로 많았다는 점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거칠게 말하면 화장품 선물은 근대 이전보다 근대 이후에 사회적으로 부상(浮上)한 행위라고 하겠다. 우리 삶에서 소용되는 모든 물건은 선물로서 가치를 지닌다. 심지어 왕이 신하에게 드넓은 땅을 식읍(食邑)으로 내리는 것도, 꼬마가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먹던 사탕을 내미는 것도, 어찌 보면 선물의 한 행위일 수 있다.

그렇게 넓혀가다 보면 우리 삶의 모든 행위가 선물 아닌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선물의 범위를 넓히면 선물을 살피는 의의가 없어진다. 너무 넓은 범위는 정의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까 말이다.

근대 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화장품 선물과 관련된 기록이 거의 없다. 고전소설이나 잡록류(雜錄類)의 산문에서 물론 선물의 편린(片鱗)을 발견할 수는 있다.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화장품을 선물하는 일화가 삽입돼 있지만 그마저도 자주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빗이나 거울·목걸이 같은 귀중품을 선물로 주는 것은 비교적 많은 편이지만, 이런 물건을 화장품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고려 여인들의 ‘향낭 사랑’


▎고구려시대 쌍영총 고분 벽화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 볼 연지와 입술화장 등이 눈에 띈다.
화장품은 시각적인 몸치장을 위해 바르고 그리는 것들과 좋은 향기를 내기 위한 향료 계통을 총칭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장품은 어느 시기에나 있었지만 그 종류가 갑작스럽게 많아진 것은 아무래도 근대 이후의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근대 이전 이 땅에서 화장품의 종류도 적었을 것이고 유통망 역시 부실했을 것이다. 선물을 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물건을 구해야 하는데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선물 기록을 남기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기록이 거울이나 빗과 같은 장신구에 머무르는 것도 이런 환경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 외에도 화장품 선물 관련 기록을 이전의 기록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몇 가지 연유가 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선물을 하는 문화적 풍토가 형성돼 있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큰 원인이다. 화장품은 기본적으로 집에서 만들어 자급자족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구입하기도 어려웠거니와 남자가 화장품 같은 것들을 집 안의 여성에게 선물하는 것은 낯뜨거운 일로 치부됐다. 그렇지만 화장품이 선물용으로 전혀 유통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1123년(인종 1)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개경에 한 달 남짓 머무는 동안 자신이 관찰한 고려의 풍습을 적은 책인 <고려도경(高麗圖經)>(권20)에는 고려 귀부인들의 치장이 묘사돼 있다. 당시의 여성들은 담박한 화장법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향유 바르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든지 분을 바르되 붉은빛이 도는 연지를 사용하지 않았다든지 하는 것은 12세기 고려 여성들의 전반적인 화장 경향을 보여준다.

대신 여러 가지 장신구를 선호했다는 점도 읽을 수 있다. 특히 비단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허리에 참으로써 좋은 냄새가 나도록 한 것은 삼국시대 이래 꾸준히 전승돼왔던 좋은 향기에 대한 선호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 향낭에 무엇이 들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아마도 향이라든지 사향과 같은 종류가 들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한다) 그 냄새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면서 유행을 탔을 것이다.

이 정도로 여성들의 치레가 대단했다면 그녀들을 위한 물품 판매소가 있었을 것이고, 대도시를 중심으로 발달했을망정 약간의 선물 문화도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맥락에서 화장품 선물 행위가 일정 수준으로는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것이다.

여성들의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던 근대 이전 우리 사회에서 그녀들의 화장술은 전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환경이 어떠하든 용모를 꾸미고 몸을 단장하는 일은 모든 여성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대부분의 화장품이 자급자족되던 시대에, 한 가문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그들 나름의 화장법이나 화장품 만드는 법이 전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단오가 되면 여성들이 창포 달인 물에 머리를 감는 것도 머리카락의 윤기를 보존하면서 좋은 향이 배어나도록 하는, 화장법의 일종이었다. 이시필(李時弼, 1657~1724)이 18세기 초에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소문사설( 聞事說)>에 이미 얼굴에 바르기 위한 화장품인 면지(面脂) 만드는 방법이 소개돼 있고, 180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가 저술한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도 입술 연지를 찍는 다양한 방법이 소개돼 있는 것만 봐도 사회적으로 화장술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문학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고전소설 중에 <여용국전(女容國傳)>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여성의 얼굴과 화장 도구 및 화장품 등을 의인화한 소설이다. 이민희 교수에 의하면 <여용국전> 계열의 이본(異本)은 상당히 여러 종이다. 이본이 많다는 것은 많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화장품 의인화한 소설 <여용국전>


▎청자상감국화문모자합(靑磁象嵌菊花紋母子盒). 14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큰 합(母盒) 속의 작은 합(子盒)에 분·연지·눈썹 먹 등을 담는 고려시대 화장구다.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효장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에 여러 외적이 침략하자 신하들과 함께 힘을 합쳐서 이를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이는 곱고 깨끗한 얼굴에 때가 끼고 치아에 치석이 끼고 머리에는 이가 생기는 상황이 생기자 다양한 화장 도구 및 화장품으로 다시 얼굴을 정갈하게 가꾼다는 것을 의미한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여러 도구와 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미용의 과정은 여성들의 생활을 잘 반영하고 있어서 읽는 재미가 있다.

우선 나라 이름 ‘여용국(女容國)’은 여성의 얼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효장(曉粧)’이라는 황제의 이름은 새벽에 화장을 한다는 의미다. 신하들은 승상인 동원청(銅圓淸-거울)을 비롯해 문신과 무신 각각 9명씩 모두 18명이 등장한다.

문신으로는 주연(朱鉛-연지)·백광(白光-얼굴 분의 일종)·방취(芳臭-향수의 일종)·백원(白圓-얼굴에 바르는 분)·납용(蠟容-밀기름)·차연(叉延-비녀)·윤안(潤顔-곤지)·검박서(기름종이)·유진(참기름)이 등장하고, 무신으로는 섭강( 强-족집게)·소쾌(梳快-얼레빗)·소진(梳眞-참빗)·양수(楊樹-칫솔)·관정(淨-세숫물)·사영(모시실)·말영(磨零-비누)·포엄(布掩-휘건, 씻을 때 목이나 허리에 감아놓는 수건의 일종)·포세(布洗-수건)가 등장한다.

여용국을 침략하는 적으로는 구니공(垢泥公-얼굴에 낀 때)·슬양( -이)·황염(黃鹽-치석) 등이다. 이름만 봐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이 나서서 얼굴과 치아·머리카락 등을 깨끗하게 닦고 정리하는 내용이 소설 전체의 줄거리다. 이들 행위가 일상에서는 매일 일어나는 것이지만 이렇게 의인화하는 순간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변한다. 독자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찾아내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여기에는 모발을 관리하고 단장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가 하면 피부 관리에 관한 내용도 들어 있으며 색조화장과 향수까지 등장한다. 작자는 얼굴을 단장하는 전체 과정을 통해서 정치를 말하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화장을 하는 행위가 개인적으로는 남성의 총애를 받으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과하면 비판의 대상으로 변한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가 되면 화장이 사치의 한 행태로 인식됐던 점을 고려하면 <여용국전>과 같은 작품은 여성의 화장이 그저 사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엄정한 자기 관리와 상통한다는 점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화장을 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여성들의 삶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도록 하려고 했다.

분을 팔러 다니는 사람에 관한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고려 말 문인 이색(李穡)의 기록이다.[분매자(賣粉者), <목은시고> 권14] 그러니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분을 팔러 다니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기록에 잘 등장하지 않다가 조선 후기에 와서야 다시 발견된다.

18세기 전반 화장품을 팔러 다니던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마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상당히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분을 팔러 다니는 노파라는 뜻의 ‘매분구(賣粉)’로 불리는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의 글이다. 조귀명은 자신이 매분구를 만났을 때 이미 그녀의 나이가 70여 세쯤이었다고 했으니, 그가 기록한 사건이 벌어진 것은 17세기 후반일 것이다.

매분구는 원래 한양의 노비로 어렸을 때 용모가 아리따웠다. 이웃집 총각이 그녀를 좋아해서 유혹하려 했지만 응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녀는 총각에게 자신은 원래 천한 신분이지만 남의 집 담장을 몰래 넘는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다는 것, 자기 부모가 살아계시니 허락을 받으라는 것 등을 말해준다. 그러자 그 총각은 물러났고, 나중에 폐백을 갖춰서 청혼한다.

‘미(美)’를 팔아 생계 유지했던 노파의 비련(悲戀)

그녀의 부모는 그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총각은 그녀를 너무도 사모한 나머지 상사병에 걸려 세상을 뜬다. 이 소식을 들은 그녀는 “내가 그 사람을 죽였다”면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자신이 그 총각에게 몸을 허락한 적은 없지만 마음을 허락했으니, 그가 죽었다고 해서 어찌 내 마음을 바꾸겠느냐며 그를 위해 수절을 한다. 평생 혼인을 하지 않고 지내면서 연분(鉛粉)을 파는 일을 업으로 삼아 살아갔다고 한다.[‘매분구옥랑전(賣粉玉娘傳)’, <동계집(東谿集)> 卷5]

이 사건은 그 이후 성해응(成海應, 1760~1839)·강이천(姜天, 1768~1801) 등의 기록에 등장하면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부분적으로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조귀명의 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보면 조귀명의 글을 참조해서 작성했거나 당시 한양에서 유명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천한 신분의 이름 없는 여성이 보여준 절의는 선비들조차 쉽게 실천하기 어렵다는 점을 주목한 조귀명은 그녀의 행위에서 성리학적 윤리를 읽어낸다.

노비 출신의 한 여성이 자기 때문에 상사병으로 죽은 사람을 위해 수절한 내용이 지식인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이고 이렇게 기록으로 남게 됐지만, 내게 이 기록은 바로 화장품을 팔러 다니는 사람의 존재가 분명히 있었다는 점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평생의 직업으로서의 화장품 판매원은 그녀가 한세상을 살아가는 경제적 토대가 된 셈인데, 그만큼 화장품 수요자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장품 선물은 예나 지금이나 참 어려웠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의 화장품을 구입하기 위해 서성거리는 것이 문화적으로 낯선 풍경이었던 시절에는 화장품 선물은 더욱 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화장품은 개인의 선호도라든지 피부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선물을 받는 당사자의 사정을 모른 채 아무거나 구입해서 선물했다가는 선물로서의 효과를 보지 못하기 일쑤다.

그러니 자연히 여성들을 위한 선물은 화장품보다는 화장을 위한 도구나 장신구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고려시대에 이미 분을 파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기초 화장품이 유통됐지만, 그것을 선물로 주고받은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은 이런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다.

<여용국전>에서도 이미 언급된 것처럼 여성들의 화장은 적절하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으며 이는 국가를 다스리는 것에 비의(比擬)되곤 했다. 과도한 화장을 한 여성을 등장시켜서 임금의 총명을 어지럽히는 간신의 이미지로 사용하는 것은 한문학의 표현 전통 중의 하나였다.

그렇지만 ‘적절함’의 경계가 어디인지는 정해진 바가 없다. 화장하는 사람은 적절한 수준으로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사람은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화장법은 어느 시대에나 요구되지만 자연스러움의 경계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치 조선 유학자들의 ‘시중(時中)’ 개념과 비슷하다. 중도를 지키는 것은 선비들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이지만, 어느 지점이 중도인지는 시공간적 맥락에 따라 수많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화장을 하는 행위도 이와 같아서 시공간적 맥락을 정확하게 읽고 거기에 걸맞은 화장법을 선택하는 것 역시 화장하는 사람의 내공이 깊어야 가능하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 공부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 김풍기 - 강원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책과 노니는 것을 인생 최대의 즐거움으로 삼는 고전문학자. 매년 전국 대학교수들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올해의 사자성어’[2011년 엄이도종(掩耳盜鐘)]에 선정되는 등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는다. 저서로 <옛 시에 매혹되다> <조선 지식인의 서가를 탐하다>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이 있다.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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