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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물건(4)] 미쉐린도 반한 밍글스 강민구 셰프의 그릇 

“요리의 무한한 창의력 담는 캔버스” 

글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콜드브루 방식으로 우려낸 멸치 육수부터 토종 버섯까지 좋은 식재료 개발에 관심...“한식이 덜 알려졌다는 것은 그만큼 세계적으로 커 나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죠”

바닐라 아이스크림에 간장을 입힌 피칸을 곁들이고, 세계 3대 진미로 꼽히는 푸아그라(거위간)를 된장에 재워 굽는다. 서울 논현동의 레스토랑 밍글스(mingles) 얘기다. 한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메뉴로 세계적 미식 평가지 미쉐린도 감탄한 이곳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33세의 강민구 셰프. 그가 내놓은 ‘셰프의 물건’은 다름아닌, 텅 빈 그릇이었다.


▎강민구 셰프가 직접 주문해 제작한 해인요 백자. 그는 “담음새만으로 음식 맛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별을 받는 것도 어렵지만 받은 별을 지키는 건 더 어렵다. 세계적 미식 평가지 미쉐린 가이드의 별점 얘기다. 지난해 발간된 첫 서울판에서 별을 획득했던 셰프들은 지난 11월 8일 두 번째 서울판 발표를 앞두고 부쩍 긴장했다. 강민구 셰프도 그중 한 명. 발표 전인 11월 2일 밍글스에게 만난 그는 “어떻게 될지 정말 모르겠어요”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긴장된 얼굴이었다. 하지만 발표 당일 그의 표정은 환하게 바뀌어 있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별 하나를 지켜냈기 때문이다.

미쉐린 가이드의 ‘암행어사’로 불리는 평가원은 밍글스를 이렇게 묘사했다. “가장 한국적인 맛에서 남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맛을 끌어내는 강민구 셰프. (…) 그의 창의력은 밍글스를 차별화하는 중요한 요소다.” 강 셰프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단어가 ‘창의력’이다. 그리고 그가 창의력을 가장 빛낼 수 있는 도구는 완성된 요리를 담는 그릇이다. 지난해 2월 레스토랑을 지하에서 지상으로 확장 이전하면서 가장 신경 썼던 부분도 그릇이라고 했다.

“칼이나 다른 조리도구도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손님에게 직접적으로 와 닿는 건 아니잖아요. 그릇과 잔은 손님의 눈과 입에 직접 닿는다는 점에서 특별히 중요하지요.” 그에게 그릇이란 자신이 심혈을 기울인 요리와 손님을 만나게 해주는 무대인 셈이다. 그릇을 캔버스 삼아 자신의 창의력을 맘껏 선보인다.

밍글스의 시작은 소박했다. 임대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곳을 찾아 논현동의 한 건물 지하에 문을 열었고, 그릇은 강 셰프가 이곳저곳으로 발품을 팔아 하나둘씩 장만해왔다. “어디서 프랑스 접시를 저렴하게 판다는 소식이 들리면 가서 사오는 식이었어요. 아무 그릇이나 쓸 수 없는데, 저희는 순수 개인사업자이다 보니 100% 갖춰놓고 영업을 시작할 수도 없었어요.” 그러다 밍글스가 차츰 인정을 받고 자리 잡으면서 확장 이전을 결심했을 즈음, 그는 그릇도 새로 갖추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눈여겨봐왔던 도자기 브랜드 해인요에 연락해 밍글스의 요리만을 위한 백자 세트를 주문했다.

왜 백자를 골랐을까.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아한 느낌을 주면서 요리와 잘 어울리는 게 백자예요. 같은 요리라도 담음새에 따라 맛이 달라지거든요. ‘보는 맛’도 있지만 실제로 그릇의 보온·보냉 효과로 인해 미각에 영향을 주기도 하니까요. 고온에서 구워낸 백자는 열에 강하고 튼튼하니까 딱이죠.”

여러 백자 브랜드 중에서도 김상인 작가의 해인요를 고른 이유는 뭘까? “해인요는 조선시대 백자 문화가 꽃피던 시기의 기법을 되살려 사용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의 백자를 만들어냅니다. 밍글스의 철학과도 잘 맞아떨어졌어요.”

그중에서도 그는 ‘호박선 접시’로 불리는 넓고 둥근 백자를 각별히 아낀다. 지름 30㎝ 정도 되는 큰 원형 접시의 정중앙에 작은 호박선 요리를 배치한다. 여백의 미를 강조하며 오감이 요리에 집중되도록 하는 장식이다. 호박선을 다 먹고 나면 접시 한가운데의 꽃 모양이 드러나 눈까지 즐겁게, 그가 직접 고안했다.

보기엔 양식, 먹으면 한식


▎밍글스 스타일로 재해석한 호박선 요리. 겉보기에는 양식 스타일인데 먹어보면 한식의 풍미를 느낀다.
호박선도 그저 평범한 호박선이 아니다. 원래 선(膳)은 오이·호박 같은 채소의 속을 파고 그 안에 고기·해산물 등으로 만든 소를 넣어 찐 음식이다. 그러나 밍글스의 호박선은 이런 공식에서 벗어났다. 녹색·노란색 등 색색의 호박을 얇게 뜬 편을 겹겹이 쌓은 뒤 육수와 함께 익힌다. 보기엔 영락없는 양식인데, 먹어보면 한식 맛이 난다. 이를 그는 “호박선 같아 보이지 않는데 맛은 호박선인 요리”라고 표현했다.

멸치 육수를 내는 방식도 색다르다. 멸치를 통째로 물에 넣고 펄펄 끓여 얻는 예의 그 육수가 아니다. 정반대 방식을 쓴다. 멸치를 볶아 가루로 만든 뒤 찬물을 천천히 여과시키는 콜드브루, 즉 냉침 방식으로 육수를 낸다. 콜드브루 커피를 만드는 방식에서 커피 대신 멸치를 넣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일정한 맛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 그가 고안해낸 방법이다. 한식의 뿌리는 소중히 여기되 밍글스만의 다양한 시도를 해서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것이다.

레스토랑 이름도 그래서 밍글스(mingles)다. ‘섞이다, 어우러지다’는 뜻의 영어 단어 ‘mingle’에서 따왔다. 밍글스는 ‘서로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어우르다’라는 글귀를 적은 카드를 놓아두고 손님을 맞는다. 그는 “한식의 전통 기법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기술과 감성을 접목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이런 그를 두고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는 “단순히 화려한 테크닉만 선보이는 게 아니라 한식의 본질과 철학을 진지하게 마주하며 요리를 하는 보기 드문 젊은 셰프”라고 평가했다.

한식은 그에게 끊임없는 영감을 준다. “우리 음식에도 우리가 전혀 모르는 새로운 음식들이나 식문화가 있어요. 한국 사람이 모르는 한식 문화를 찾아내는 것도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에요. 예를 들어 우리가 지금 외국에서 비싸게 사 오는 버섯들도, 찾아보면 우리나라에 이미 자생하고 있더라고요. 공부를 해보니 우리나라엔 20종이 넘는 다양한 야생 버섯이 있었어요. 우리가 몰랐을 뿐 우리 곁에 이미 있었던 거죠.”

이런 지식도 동료 셰프들과 함께 틈틈이 전국을 돌면서 하는 식재료 공부를 통해 얻는다. 밍글스가 내놓은 다양한 요리는 쉼 없는 연구와 그의 열린 마음에서 나온 결과물인 셈이다.

손편지 써가며 해외 레스토랑 취업 노크

강 셰프는 집안에서는 돌연변이에 가깝다. “사돈의 팔촌을 다 따져봐도 요식업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전 초등학교 시절부터 요리에 마냥 끌렸어요. 있는 재료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내는 생산적 활동이라는 데 매력을 느꼈죠.”

외식조리학과로 진학해 학교뿐 아니라 현장 경험도 쌓았다. 그런 와중에 해외에서 경험을 쌓고 싶은 욕심이 났다. 그래서 와인바에서 새벽까지 일하면서 유학자금을 모으고, 주말에는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 “한식을 새롭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해외 유학에 더 욕심을 냈어요. 결국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우리 것으로 승부를 봐야 하잖아요. 해외의 것에 열광만 하는 분위기도 바뀌었으면 했고요.”

그래서 그가 택한 곳이 미국의 일식당 ‘노부(NOBU)’다. 일식 셰프 마쓰히사 노부유키(松久信幸)가 문을 열어 세계 곳곳에 30개 이상의 지점을 낸 식당이다. “일식을 배우려고 했으면 일본으로 갔겠죠. 노부가 사실 최고 요리라고 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아시아계 음식을 서구에 알린 첨병이라는 점이 관심을 끌었어요. 그래서 노부가 어떻게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배우고 싶었죠.”

그런 이유로 미국 마이애미의 노부 지점에 이력서를 넣었다.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좌절하기 보다 다른 희망을 택했다. 미식의 성지 중 하나인 스페인의 산 세바스티안에서 미쉐린 최고점인 별 셋에 빛나는 마르틴 베라사테기 레스토랑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일을 배우고 싶다는 열망으로 100곳에 이르는 세계 각국의 레스토랑 리스트를 만들어 직접 손편지를 쓰고 e메일을 보내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찾아간 마르틴 베라사테기에서 1년 계약이 끝나갈 무렵, 그에게 또 다른 연락이 왔다. 그가 바랐던 노부에서 손짓을 해온 것이다.

이후 그는 마이애미 지점을 거쳐 바하마 지점의 부총괄셰프로 갔다가 아예 총괄셰프로 일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1년반을 일하고 2013년 귀국을 결심했다. “노부는 노부의 요리를 하는 곳이잖아요. 이젠 제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식이 해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나만의 한식을 만들어 세계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고요. 세계인이 아직 한식을 잘 모른다는 건 그만큼 한식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귀국 후엔 한동안 외식업체에 몸담으며 경험을 쌓은 뒤 그는 밍글스를 열었고, 조금씩 자신만의 요리 세계를 만들어왔다. “오픈 첫해엔 해외 유명 레스토랑에서 배워온 것에 한식을 적용하는 수준이었어요. 맛있다는 평가는 들었지만 저만의 요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죠. 그래서 저만의 색깔을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어요.” 그렇게 키워낸 밍글스는 이제 한식 세계화의 첨병이란 평가를 받는다. 한식의 민간 외교관을 자처하는 그에게 해외 레스토랑 오픈 계획을 슬쩍 물어보았다. 언젠가 밍글스도 제2의 노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아직은 해외 진출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좋은 재료를 안정적으로 수급받는 게 가장 중요한데 한식은 아직 그게 힘들어요. 국내에서도 좋은 식자재 수급이 쉽지 않거든요.”

평소 식자재를 선별하는 데 그는 유독 관심을 쏟는다. 그래서 요리에 쓸 재료를 일일이 직접 고른다. 한식의 식재료 수급이 불안정하다는 점이 그는 못내 아쉽다. 그러다 보니 그의 꿈은 레스토랑 운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아예 식재료를 만드는 공간을 자신이 직접 마련해 운영하는 것이다. “장도 스스로 담그고 발효 과정까지 직접 챙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요. 한식의 핵심인 장과 발효는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잖아요. 단순히 요리만 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국만의 식문화를 재구성하는 공간을 만들 겁니다.”

- 글 전수진 월간중앙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201712호 (201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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