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정신의 미학(21)] 조선의 마지막 ‘유의(儒醫)’ 석곡(石谷) 이규준 

유학 바탕으로 의학 이치를 연구하다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객원기자
양기 부족이 병의 원인이라는 부양론(扶陽論) 정립…성리학 학설 비판해 사문난적으로 몰렸다는 이야기도

▎박순열 증손부가 동해면 석리 이규준 본가의 창고에서 장부도 목판을 꺼내 보여주고 있다.
“구한(舊韓) 말엽에 사람들이 동해에 공자(孔子) 같은 분이 태어났다고 했는데, 그 분은 바로 석곡(石谷) 이(李) 선생이다. 이 선생의 학문에 대해서는 우리 스승 초려(草廬) 정(鄭) 선생께 들을 수 있었다. 정 선생은 이 선생의 제자로 스승의 학설을 독실하게 지켜 우리 학파의 선봉장이나 다름없었는데, 뜻을 미처 펼치지 못한 채 재앙이 닥쳐 돌아가셨으니, 당시 선생의 나이 37세였고 나는 18세였다. 대들보가 부러지고 촛불이 꺼진 것과 같으니 훌륭한 가르침을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대구한의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저자명 이규준’으로 찾아낸 유일한 책 <석곡산고(石谷散稿)>의 발간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국한혼용문이다. 발간사는 반듯한 글씨체로 1959년 손진규가 썼다고 적혀 있다.


‘공자 같은 분’이라는 비유가 궁금증을 일으킨다. 어떤 점이 이런 소문을 나게 했을까. 그런데도 여태 그 이름 석 자를 쉽게 듣지 못한 건 또 무슨 까닭일까.

인터넷에는 석곡이 남긴 저작이 방대하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런데도 책은 좀체 보기 어려웠다. 더욱이 석곡이 한의학 분야의 석학인데 한의대 도서관에도 이 한 권이 전부라니. 그의 흔적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석곡(石谷)은 조선 말기의 유학자이자 의학자인 이규준(李圭晙, 1855∼1923)의 호다. 철종 7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69년의 삶을 마감했다. 경북 영일(迎日) 지금의 포항에서 태어났다. 먼저 포항시에 물었다. 이규준은 2014년 ‘포항을 빛낸 인물’로 선정됐다. 포항시가 설화 주인공 연오랑세오녀를 시작으로 포은 정몽주, 진각국사 배천희 등에 이어 7호로 뽑았다. 지방자치단체가 석곡을 주목한 것이다. 포항시는 석곡에 심취한 황인(68) 향토사학자를 소개했다.

이규준은 포항시 남구 동해면 임곡리에서 출생했다. 유년기에 이웃한 남쪽 석리(石里)로 옮겼다. 석곡(石谷)이란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10월 16일 포항 동해면을 찾았다. 포스코(포항제철)를 지나 구룡포로 이어지는 동해안 영일만 지역이다. 면소재지 시립도서관에서 황인 씨를 만났다. 그는 도서관 옆 동해중, 동성고에서 국사 교사를 지냈다. 도서관 이름이 ‘석곡도서관’이다. 2009년 도서관을 열면서 이곳 출신 인물을 알리자며 붙였다고 한다. 석곡도서관 서형철(57) 관장도 이규준 알리기에 푹 빠져 있다.

이규준은 여러 저작을 남겼다. 본래는 유학자였다. 그는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 방향은 중국 송대(宋代) 유학자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고대인 한당(漢唐)의 주석을 존중했다. ‘육경주(六經注)’ 26책이 있다. 또 <경수(經髓)> 3편1책, <논어> 3책, <효경(孝經)> 1책, <당송고시(唐宋古詩)> 1책, <후천자(後千字)> 1책 등을 정리했다. 서양의 역사와 문물을 비평한 <포상기문(浦上奇聞)> 1책, 수학에 관한 <구장요결(九章要訣)> 1책도 전한다. 또 조선 성리학을 논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 <석곡심서(石谷心書)>, 시·산문·기행문 등을 모아 사후 발간된 문집 <석곡산고> 등이 있다.

경전 주석 송대(宋代) 버리고 한당(漢唐) 견해 존중


▎2009년 3월 경북 포항시는 이규준의 고향 남구 동해면에 그의 호를 딴 ‘석곡도서관’을 지상 3층으로 개관했다.
후기에는 의학에 몰두했다. 그 성과물이 <황제소문대요(黃帝素問大要)> 2책, <소문구독속해(素問句讀俗解)> <본초(本草)> 2책, <의감중마(醫鑑重磨)> 3책 등이다.

동해면 석리에는 이규준의 본가가 남아 있었다. 황인, 서형철 관장의 안내로 먼저 본가를 찾았다. 2층 양옥이다.

연락을 받고 박순열(82) 종부가 집에 있었다. 석곡의 증손부다. 생전에 석곡을 뵌 적은 없다. 시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어른이 서울을 갔다 오시면 말에는 언제나 곡식이 가득 실렸다고 해요. 그러면 어려운 이웃에 나눠 주고…. 가족이 서운해 하면 내 먹을 건 또 생긴다고 했답니다.” 석곡이 아픈 사람을 낫게 하고 아낌없는 사례와 존경을 받았다는 뜻이다.


▎석곡도서관 1, 2층 벽면에 마련된 ‘이규준 코너’. 이규준은 이제마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종부는 창고에 보관된 목판을 보여주었다. 철제 틀에 목판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관리는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모두 365장입니다. 제가 물려받은 게 366장인데 1장이 줄었어요. 10년 전쯤 한 기관이 관리하겠다고 나서 옮긴 적이 있습니다. 어쩐 일인지 이후 1장이 분실됐어요. 그래서 되찾아와 직접 보관하는 겁니다.”

그동안 한국국학진흥원이 몇 차례 들렀지만 기탁은 한사코 거부했다. 종부는 인체의 5장6부가 그려진 장부도 목판을 꺼내 보여 주었다. 석곡이 책을 찍기 위해 제작한 목판 600여 장 중 현재 남아 있는 365장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548호)로 지정돼 있다. 친필 자료와 일부 서책은 다른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종부는 집 왼쪽 배추밭을 가리키며 서당이 있던 자리라고 설명했다. 석곡서당이다. 기숙사도 있었다고 한다. ‘석곡서당기’에는 선생 45세(1899년)에 세운 것으로 나온다. 서당의 학규(學規)가 남아 있다. 첫 부분은 이렇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전날 배운 걸 암송한다. 미명에 세수하고 양치질하며 스승에게 나아가 차례로 수업한다….” 학규는 자세하다. 체계가 느껴진다. 본래 이곳엔 건물 7채와 방앗간에 딸린 전답까지 있었다고 한다. 도로가 집 뒤로 나면서 공간이 줄었다. 마당에는 당시 약을 찧던 절구가 놓여 있었다. 종부는 “서당이 복원되고 그 안에 목판이 보관되는 게 소원”이라고 덧붙였다.

학설 ‘부양론’은 서병오-이원세-소문학회로 이어져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는 이규준의 묘소. 석곡학회는 매년 10월 마지막 일요일 이곳을 찾아 뜻을 기린다.
일행은 본가를 나와 포항시 장기면 죽정리 화주산 석곡의 묘소로 이동했다. 산속으로 들어가 자동차에서 내려 다시 800m를 걸어야 하는 길이다. 묘소를 향해 100m쯤 걸었을 때 황인 씨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며 길옆을 가리켰다. “여기가 석곡의 사상을 전파한 제자 이원세(李元世)의 유골이 산포된 곳입니다.”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무위당(無爲堂) 이원세는 유불선과 기독교를 공부하고 마음까지 치료하는 심의(心醫)로 석곡의 제자였다. 그는 석곡의 의학을 이어받아 발전시켰으며 이론에서 처방까지 막힘없이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치료했다.

무위당은 스승이 또 있었다. 시·문·글씨·그림·가야금·장기· 바둑·의약 등에 능해 ‘팔능거사’로 불린 대구의 석재(石齋) 서병오(徐丙五)다. 당시 석곡은 석재 집에 자주 들렀다. 한번은 석곡이 누구도 못 고친 석재의 높은 혈압을 잡아 주었다고 한다. 석재는 곽종석에게 사사받았지만 그때부터 석곡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다. 대전대 한의대 오재근(38) 교수는 “석곡의 의학은 석재를 거쳐 무위당에게 전해졌다”고 말했다. 석재는 만년에 “공자 이후 석곡이 탄생했다”고 회고했다. 석재는 일곱 살 나이 차에도 밥상을 마주하지 않을 만큼 존경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일군의 지식인이 있었다. 이름하여 ‘유의(儒醫)’다. 석곡은 조선의 마지막 유의로 대미를 장식했다. 한의학계에서는 “북쪽에 이제마가 있었다면 남쪽에는 이규준이 있었다”는 말을 한다. 석곡은 사상체질(四象體質) 의학으로 유명한 동무 이제마(1837∼1899)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통한다.

그의 의학 사상은 <황제소문대요>와 <의감중마>에 남아 있다. 황제(黃帝)는 공자가 “죽음과 삶의 이치에 통달했다”고 한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다. <소문대요>는 동양 의학의 경전으로 통하는 <황제내경>을 석곡이 자신의 이론에 입각해 81편을 25편으로 줄여 정리했다. 4권2책으로 1904년 저술돼 2년 뒤 밀양에서 처음 간행됐다.

이규준의 대표 학설은 부양론(扶陽論)이다. 생명의 근원은 양기(陽氣)이지만 항상 부족하기 쉽고 음(陰)은 남아돌기 때문에 양기 부족이 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병은 양기를 북돋워줘야 낫는다는 이론이다. 양기는 또 신장이 아닌 심장에 있다고 보았다.

석곡은 부양론에 따라 처방에선 온열제의 주약인 부자를 애용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양을 돕는 부자·인삼 등 조양지약(助陽之藥)을 많이 썼다. 그에게 ‘이부자(李附子)’라는 별명이 붙은 까닭이다.

문제는 부양론이 기존의 의학 이론을 뒤집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조선은 물론 동양 의학은 음을 길러 화를 내려야 한다는 원나라 주진형(朱震亨)의 자음강화(滋陰降火) 이론이 지배했다. 또 양기도 심장보다 신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의감중마>는 이규준이 <동의보감>을 자신의 부양론에 맞게 요약한 의학 임상서다. 임상에서 실제로 부양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의감중마>를 국역한 한국한의학연구원은 해제에서 이규준이 <동의보감>을 냉혹하게 평가한 것으로 정리했다. 석곡은 <동의보감>이 “중국의 원·명대까지 의서를 한데 모아 병과 약을 모두 채록한 건 의학의 바다와 같다”면서도 “산만해 주장하는 바가 없다”고 꼬집는다. 결정적으로는 <동의보감>이 음을 돕고 양을 깎아 내렸다고 비판한다. <의감중마(醫鑑重磨)>는 <동의보감>을 거듭 연마했다는 책 이름 그대로 부양론에 따라 <동의보감>의 치료와 처방을 재정리한 것이다.

마음은 황제(黃帝)와 노자처럼, 행동은 공자처럼


▎이규준이 책을 찍기 위해 제작한 목판 600여 장 중 남은 365장은 현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화주산을 걸으며 석곡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제자 무위당은 석곡이 남긴 <소문대요> <의감중마>를 가르치는 한편 스승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신방신편(新方新編)>을 펴냈다. 그는 2001년 98세로 생을 마쳤다. “아무것도 남기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유골은 스승의 묘소로 가는 길에 뿌려졌다.

30분을 족히 걸어 묘소에 도착했다. 묘소는 소나무에 둘러싸여 햇볕이 드는 안온한 자리였다. 참배한 뒤 비석을 살폈다. 비문은 석곡의 마지막 제자 조규철이 썼다.

이규준은 어려서 유학 경전과 제자백가를 독학으로 섭렵했다. 그 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름난 학자를 찾아 토론을 벌였으나 의문을 풀 수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사서오경을 위주로 공부해 40세에 깨달음을 얻는다. 서당을 연 것도 그 무렵이다. 그는 주역과 천문학·의학 등 다양한 분야로 관심을 넓혔다.

비문에는 ‘나의 마음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처럼 유(遊)하고 나의 행동은 공자처럼 지키고자 한다’고 새겨져 있다. 공자가 펼친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병자를 고친 것은 공자의 인(仁)을 실천하는 방편이었다.

그의 사상은 당시의 주자(朱子) 성리학에서 벗어나 기(氣) 철학과 양명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학통은 영남에 있었지만 지역에서 세를 형성한 퇴계학맥이 아닌 기호학맥을 이었다. 이규준은 율곡 이이-우암 송시열-매산 홍직필을 이은 임재 서찬규에게 나아가 배웠다고 스스로 밝힌다. 퇴계 이황의 학설에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으로 이규준이 기존 학계에서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를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면서도 퇴계 제자인 류성룡과 김성일의 종택을 방문하는 등 교류는 있었다.

1991년 석곡은 묘소에서 새로운 후학을 맞이한다. 그의 학설에 공감한 한의사·한의학자들이다. 사후 68년 만이다. 그 무렵 한의사 친목단체인 동의학우회는 부산에서 무위당을 만난 뒤 석곡학회를 창립했다. 학회는 이듬해 이름을 ‘소문(素問)학회’로 바꾼다. 한의사들이 자칫 석곡의 큰 학문에 누를 끼칠 수 있다며 범위를 한의학으로 국한시킨 것이다. 이름은 <황제소문대요>에서 땄다. 소문은 ‘근본을 문답한다’는 뜻이다.

소문학회는 그때부터 매년 10월 마지막 일요일 묘소를 참배한다. 회원은 전국에 250여 명. 학회는 해마다 학술대회 등을 열어 석곡을 세상에 알리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행사가 열렸다. 벽안의 후학도 생겼다. 제임스 플라워는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느라 이규준의 묘소를 직접 찾았다.

10월 21일 소문학회를 이끄는 대구 공덕한의원 피국현(47) 원장을 만났다. 그는 “한의학의 정체성은 음양오행이며 만물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는 다르지 않다”며 “그게 바로 석곡 의학의 요체”라고 했다. 학회 덕분에 이규준은 포항에 다시 알려졌다.

이규준의 부양론은 동시대를 산 이제마의 사상의학만큼 확산되지 못했다. 당시 함흥을 근거지로 한 이제마가 포항보다 서울로 진출하기 용이했을 것이라는 연구가 있다. 거기다 석곡이 기존 학설과 상반된 주장을 펼치면서 배척당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한의학에 독창적인 관점과 해법을 제시”


부양론은 한의학계에서 여전히 비주류에 가깝다. 대다수 한의대는 정규과목에 넣지 않고 부양론을 따르는 한의사도 아직은 소수에 그친다.

한국한의학연구원에서 이규준 저작의 국역을 이끄는 안상우(56) 박사는 “기존 학설과 부양론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을 감안할 문제”라며 “석곡의 이론은 이전에 보지 못한 독창적인 관점과 해법을 제시하는 건 분명하다”고 말했다. 한계도 지적했다. 석곡의 학설은 승계가 원활치 않았고 남긴 저작은 이제 겨우 국역되는 단계라는 것이다.

석곡의 생애를 연구한 김창건은 “이규준의 학문은 시대 변화와 사상적 특이성으로 점차 사라졌다. 기일원적 사고는 영남 유림과 정통 기호학파에서 부정됐고 제자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신문물 속에 하나둘 흩어졌다. 이런 여건에서 의학사상만이 이원세를 거쳐 소문학회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화주산에 오르면 영일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해면 석곡서당 자리 인근은 약전리(藥田里)다. 처방에 필요한 약초를 재배한 지역일 것이다. 동해안 궁벽한 어촌에 공자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한의학의 바다에서 먼저 만선(滿船)의 뱃고동을 울릴 날을 기다린다.

[박스기사] 지구는 둥글다? - ‘지구오증변(地球五證辨)’에서 도발적인 추론 제기


▎한국한의학연구원이 국역한 [석곡산고] 등 이규준의 저서.
이규준의 <포상기문(浦上奇聞, 포구에서 들은 이야기)>에는 ‘지구오증변(地球五證辨)’이라는 흥미로운 글이 나온다. 서양에서 정리된 지구가 둥글다는 다섯 가지 증거에 대한 변증이다. 서양의 주장은 이렇다. 두 가지만 본다.

“첫째는 영국 앞바다에서 배가 출발하면 서쪽으로 미국에 이르게 되고 서쪽으로 더 가면 일본, 상하이, 인도를 지나 다시 영국 바다에 도착하게 된다. 만약 땅이 평평하다면 반드시 배를 돌려야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해안 높은 언덕에 올라 망원경으로 들어오는 배와 떠나는 배를 살펴보면 들어오는 배는 먼저 돛대가 보인 뒤 선체가 보이고 떠나는 배는 먼저 몸체가 보이지 않은 뒤 돛대가 보이지 않게 된다. 만약 땅이 평평하다면 보일 때는 다 보이고 보이지 않을 때는 다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규준은 이렇게 추론한다.

“지세가 사방으로 네모지고 바닷물이 고리처럼 둘러 있는 까닭에 배가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가고 남쪽에서 다시 원래 있던 곳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저들이 북쪽으로 가는 것을 서쪽으로 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북쪽의 내려앉은 곳 아래는 해가 서쪽에서 뜨기 때문에 자오(子午)가 달라져 해가 동쪽에서 뜬다고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돛이 먼저 보이고 선체가 나중에 보이는 이유는 무릇 만물은 멀리서 보면 높은 것이 더 낮게 보인다. 때문에 하늘보다 높은 것이 없으나 멀리서 보면 오히려 지평선보다 낮아 보이는 것이다….”

그는 조목조목 변증한다. 물론 이규준의 주장은 현대 과학으로 보면 맞지 않다. 그렇지만 한 학자가 모든 분야에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공자는 <논어(論語)> 술이편에서 “나는 나면서부터 안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해 부지런히 알기를 추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규준은 공자의 그런 자세를 분명 실천했다. 그는 서양 학설을 언제나 전통 이론으로 분석·검증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높이 평가할 태도다.

이규준의 학문 세계는 이처럼 한의학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의학·철학·천문학 등 전인적인 학문을 파고든 선비였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공정식 객원기자

201712호 (2017.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