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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인간의 위대한 여정(30)] ‘행정하는 인간’ 호모 아드미니스트란스(Homo Administrans) 

행정의 필요가 낳은 문자의 탄생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
기원전 3200년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창세기' 에덴동산의 유래…고대도시 우룩의 토판문서는 도시문명의 핵심인 사유재산 표시

▎이라크 바그다드 술라마니야 박물관에 소장된 [길가메시 서사시]의 제5토판. / 사진:배철현
기원전 3200년경 도시 안에서 거주하고 있는 엘리트들이 원활한 소통을 위해 만든 진정한 의미의 문자(文字)가 오늘날 이라크 남부지역에 등장했다. 이 문자의 기호들은 진흙 토판의 표면이 아직 마르지 않은, 부드러운 상태의 갈대나무 줄기를 뾰족하게 만든 필기구에 의해 표시됐다. 인류 최초의 문자는 평평한 표면 위에 쓴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진흙 위에 눌려진 형태였다. 이와 같은 진흙 토판들은 작렬하는 중동의 태양 아래에서 바로 견고해지기 시작해 시간이 지나면서 반영구적 유물이 됐다. 이 견고성 때문에, 현재 셀 수 없는 토판(土版)문서들이 아직도 고고학자들의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과 문헌학자들의 판독을 거쳐, 수십만 장의 토판문서가 영국,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의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현재까지 5% 이하의 토판문서들이 판독돼 전시됐다. 이 초기문서들은 ‘쐐기문자(cuneiform)’로 알려졌다. 그 생김새가 마치 ‘못’(라틴어 cuneus)과 같이 생긴 ‘형태’(라틴어 forma)라 ‘쐐기문자’라 부른다. 쐐기문자는 바빌로니아 문화와 역사의 상징이다.

고대근동 최초 문자인 원-쇄기문자의 기원

고대근동에서 발굴된 최초 문자는 ‘원-쐐기문자(protocuneiform script)’였다. ‘원(原)’이란 접두사는 역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후대 등장한 문화나 문자를 연구하고 유추해서, 이들의 조상에 해당되는 형태를 재구성한 개념을 표시한다. 19세기 독일 언어학자들은 독일어가 속한 인도-유럽어들을 비교연구하면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 이들 언어학자 중 스스로를 ‘신-문법학자들(Neo-Grammatiker)’라고 불리는 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언어현상의 보편적 가설을 내놓았다. 하나는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시간(時間)이라는 강력한 괴물의 영향을 받아 변하는 것처럼, 언어도 변한다. 언어는 누군가에 의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을 추적할 수 없는 태초로부터 서서히 변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됐다. 인류는 그 전까지는 누군가가 언어와 문자를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믿어 왔었다.

둘째, 언어들의 변화는 동시대 시점에서 보면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 긴 시간 단위에서 통시적(通時的)으로 보면 중요한 현상을 드러낸다. 그 현상이란 규칙성(規則性)이다. 만물의 변화가 무작위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어떤 법칙을 기반으로 변한다. 이 법칙의 규칙성은 과거지향적이라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예측할 수 없다.

‘원-쐐기문자’들은 거의 그림글자다. 그림글자이지만 도시와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 일관된 의미를 지닌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됐기 때문에 문자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원-쐐기문자들이 발견된 장소는 다음과 같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오늘날 이라크 남부지역)와 엘람지역(오늘날 이란 남서부 후제스탄주)이다. 이 두 지역에서 기원전 3200년으로 추정되는 원-쐐기문자 문헌들이 발굴됐다. 이 지역들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카룬강과 케르카강 유역에 형성된 거대한 침적토 평원에 위치해 있다. 문자의 등장은 이들이 생성된 환경조건, 지형적인 변화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정착을 위한 테크네와 아르스, 그리고 문자

문자가 처음 등장한 이곳들은 인간이 정착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이곳들은 오히려 강수량이 많은 지역이나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들과 비교하여 인간에게 적대적이고 가축과 동, 식물을 기르기에는 황량하다. 도시와 같이 일정한 수의 인간들이 거주하고, 이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개척된 것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이라는 인류역사의 원칙을 원용하지 않더라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그리고 문명을 구축하려는 강력한 의지를 통해서 자연을 조작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런 조작을 ‘테크네(techne)’, 로마인들은 이것을 ‘아르스(ars)’로 불렀다. ‘테크네’와 ‘아르스’는 동양에서 각각 ‘기술(技術)’과 ‘예술(藝術)’로 번역됐다. 이 지역들은 농사를 짓기에는 강수량이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토판문서들 이외에 이곳에서 발견된 원료(原料)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동일한 토양과 기후조건으로 생산되는 농작물은 소수였다. 설상가상으로 이 지역은 태고적부터 흘러내려 온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강바닥으로부터 몰고 내려온 침적토 위에 형성됐기 때문에, 갑작스런 비나 홍수에 취약했다. 소수의 인구만이 임시로 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시절에만 거주했다.

이 지역의 기후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5000~4000년 사이 페르시아만 수면은 높았다. 오늘날의 해변은 거의 물에 잠겨 있었으며 내륙도 홍수에 의해 지속적으로 범람하여 대부분 지역이 소택지였다. 이런 기후가 기원전 3500년경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강수량이 줄어들면서 범람도 따라서 사라지고 바다수면도 낮아져, 바닷물이 내륙에 더 이상 유입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은 이제 홍수 위협에서 벗어났다. 이전의 늪지역이 이젠 경작 가능한 평원이 됐고, 항구적인 정착촌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강수량은 줄어들었지만, 경작 가능한 지역에서 ‘집약적인 농사’가 시도됐다. 강과 호수와 근접한 땅들이 들판으로 구획됐고 인위적인 수로들이 건설됐다. 초기 정착자들은 수로를 비교적 쉽게 만들었다. 충적된 평원은 비옥했고 강우량은 풍족했다. 자연적인 재해 가능성은 줄어들어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이 가능했다.

에덴동산의 유래를 찾아서


▎기원전 1684~1647년 사이에 유프라테스강 서쪽 바빌로니아 니루(도시)의 수로공사 책임자가 제작한 쐐기문자 지도다. 쇼엔콜렉션에 소장돼 있다. / 사진:배철현
에덴동산은 원래 ‘이 지역’을 지칭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의 원래 번역은 ‘에덴에 있는 한 정원’이란 의미다. 히브리어로 ‘간 베-에덴(gan be-Eden)’에서 풀과 나무, 그리고 동물들이 존재하는 구획된 지역을 ‘정원(gan)’이라 부른다. 그러나 학자들은 ‘에덴’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못했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특별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에덴’이란 단어를 히브리어가 속한 셈족어를 동원하여 설명하면 이렇다. 셈족어 어원에 ‘아다나(adana)’는 ‘풍족하다, 사치스럽다’라는 의미다. 특히 셈족어들 중 가장 늦게 기원 후 7세기에 등장한 아랍어는 셈족어의 원래 자음들을 간직해, 그 어원을 추적하기 쉽다. ‘에덴’은 아랍어 어근 ‘ġadana’와 유전발생학적으로 연결돼 있다. 특히 아랍어 동사 9형인 ‘이그다나(igdanna)는 ‘(여인의 머리를) 사치스럽게 늘어뜨리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에덴’의 어원을 셈족어에서 찾으려는 시도는 억지다. 우리는 이런 시도를 ‘민간어원설’이라고 부른다. 민간어원설이란 단어의 기원을 학문적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례들 안에서 의미를 찾는 시도다. ‘에덴’의 어원은 수메르어로 ‘탁 트인 공간, 대초원지역’을 의미하는 ‘에딘(edin)’에서 유래했다.

수메르어 쐐기문자를 살펴보면 이 단어가 지닌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수메르어 문자 ÍD.EDIN으로 표현됐다. 여기서 ‘에딘(Edin)’이란 단어 앞에 붙은 ‘이드(id)’는 바닷물이 아닌 강물이나 수로가 공급하는 신선한 물을 의미한다. 흔히 ‘강’을 뜻한다. 수메르어에는 단어 앞에 접두해 그 다음에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한정하고 결정한다. 이런 글자를 결정사라고 한다. ‘에딘’ 앞에 강물을 의미하는 id가 접두해, ‘에딘’은 물이 풍부한 평원이란 사실을 나타낸다. 수메르어 ‘에딘’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물로 영원히 물이 공급되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장소라는 의미다. 이곳은 진귀한 과일과 보석이 나무에 달려 있는 심연(abyss)의 공간이다. 에덴동산 이야기를 기록한 저자는 아마도 바빌로니아에서 이런 공간을 봤을 것이다. 그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이상향인 에덴에서 쫓겨난 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신화적인 공간으로 ‘에덴동산’을 기술했다.

대규모 수로공사와 농사가 빚은 행정의 필연성


▎우룩 제4지층. 이곳에 에안나 신전이 건설됐고, 이 신전과 도시를 위한 행정문서가 기록됐다. / 사진:배철현
기원전 3200년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 강수량이 점점 줄어들어, 특별한 기술이나 혁신 없이는 생존하기 어려웠다. 경작할 수 있는 ‘에딘’은 점점 넓어졌다. 확장된 농지에 물을 끌어대는 것이 중요한 과업으로 떠올랐다. 대규모 수로공사를 통해 강물을 끌어와야 했다. 인류는 처음으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자연을 수정해야 하는 위기에 봉착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 전역이 수로공사 지역이 됐다. 이때부터 대규모 수로건설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창출시키는 모체가 됐다.

엘람지역은 카룬강과 케르카강이 흐르는 이란의 남서부 후제스탄에 형성됐다. 위에서 언급한 바빌로니아 지역과 유사한 자연환경이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점에서 다르다. 먼저 후제스탄의 충적토에 형성된 평원은 바빌로니아 남부지역에 비해 훨씬 작다. 둘째, 이 지역은 연강우량 250mm를 유지하여 건지농법(乾地農法)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 결과 이 지역 정착지는 바빌로니아와 달랐다. 후제스탄의 동쪽에 위치하여 바빌로니아와 자연적인 경계가 된 자그로스 산맥의 고산지대는 협곡으로 자연스럽게 구분됐다. 이 지역에 구분된 고산지대 땅들은 광활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정착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정기적이고 적절한 강우량과 협곡에서 생산해내는 다양한 채소와 곡식으로 비교적 영구적인 농경 정착지가 형성됐다. 이들은 바빌로니아 지역처럼 대규모 수로공사가 필요없었다.

자그로스 산맥지역에서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소택지를 살펴보면, 최초의 문자를 탄생시킨 이 두 지역이 전혀 다른 자연환경을 지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란의 작지만 소규모 정착지에서 이라크의 대규모 도시가 형성됐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자연환경을 최대한으로 관찰해, 자신들에게 고유한 문명을 창출했다. 프랑스 아날 역사학파 학자들이 역사연구 방법론에 적용한 용어인 ‘라 롱두레(la longue durée)’의 분석이 잘 적용된다. 단기적이나 중기적인 역사연구는 역사적인 인물이나 전쟁과 같은 사건들 중심이지만, 그 문명사적 의미는 기후와 같은 자연환경을 고려하는 ‘장기적인 기간(la longue durée)’을 통해 근본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남부 메소포타미아에서 인류초기 문명이 기원전 3200년에 등장한 이유는 저지대에서 위협적인 홍수가 물러났고, 많은 사람이 정착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인 ‘에딘’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수메르인들은 이 자연환경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대규모 수로공사로 넒은 지역에서 대규모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도시, 즉 인구집중과 인구증가가 가능한 지역에서 수메르인들은 복합적이지만 정교한 소통체계인 행정(行政)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행정은 주로 농산물과 가축에 관련된 경제행정이었다.

‘고대의 거대도시’ 우룩의 왕, 길가메시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에 소장된 우룩 토판문서. 기원전 3100년의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배철현
수메르인들은 좁은 지역에서 집약농업을 하면서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시민들 간의 소통을 기억에만 의존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이 수확한 농산물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도시의 곡식창고에 맡기거나 도시에 세금을 냈다는 증거인 영수증 없이는 행정이 불가능했다. 첫 번째 토판문서의 등장은 기억과 권위에만 의존했던 사회조절방식이 이제 정교한 감시(監視)와 행정(行政) 체계로 전환됐다. 다른 사람에게 빌려준 물건이나 신전에 세금으로 낸 농산물이나 가축의 수량만 기록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기억만으로 담을 수 없는 복잡한 내용들을 담을 수 있는 기록이 필요했다. 그것은 또한 개인의 ‘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인 확인이 가능한 체계였다. 이 체계가 바로 초기 수메르인들이 완성한 정보 기록 체계다. 우리는 이것을 ‘행정’이라고 부른다. 초기 행정기록들은 대부분 물건의 양과 그 물건의 주인에 대한 표시다. 그리고 또한 그 물건들이 만들어진 장소와 보관된 장소, 그리고 그런 정보를 기록한 서기관들에 관한 내용도 점차로 첨가됐다.

수메르 도시들 중 가장 이른 시기의 문자가 발견된 장소는 ‘우룩(Uruk)’이다. 우룩은 오늘날 이라크의 ‘와르카(warka)’다. [창세기]에는 ‘에렉’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우룩은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30㎞ 수로로 연결된 도시다. 기원전 2900년경 우룩은 5만 명 이상이 가로, 세로 6㎞ 이내 장소에 거주했다. 그 주위는 모두 성벽으로 둘렀다. 에안나 신전지역과 쿨라바 신전지역이 중앙에 위치한다. 기원전 1800년경, 바빌론 시대에 기록된 [수메르왕조실록]에 의하면, 우룩은 엔메르카르(Enmerkar)라는 왕이 건설했다. 엔메르카르는 우룩에 하늘신인 ‘안(AN)’을 위한 신전인 ‘에안나’를 건축했다. 전설적인 왕 길가메시는 기원전 2600년경 이곳의 왕이었다. 신-레케-우닌니라는 구마사제가 기원전 1500년경 12개 토판문서에 아카드어로 기록했다. [길가메시 서사시] 제1토판에는 길가메시가 세웠다는 성벽건설기록이 후대 [제1토판] 13-23행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13. 양털 가닥과 같은 성벽을 보라.
14.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난간을 보라.
15. 오래전에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가 보라.
16. 이쉬타르 여신의 거처인 에안나(Eanna)에 다가가 보라.
17. 어떤 왕도 흉내 낼 수 없다.
18. 우룩 성벽에 올라 이리저리 걸어 보라.
19. 그 기초를 조사해보고 그 벽돌을 살펴보아라.
20. 그 벽돌이 오븐에서 구운 것이 아니냐?
21. 일곱 현인이 기초를 놓지 않았느냐?
22. 일 스퀘어 마일(2.6㎢)은 도시, 일 스퀘어 마일은 대추야자 나무 숲, 일 스퀘어 마일은 진흙 구덩이, 그리고 반 스퀘어 마일는 이쉬타르 여신의 거주지.
23. 삼 스퀘어 마일과 반 스퀘어 마일이 우룩의 크기다.


사유재산 표시한 우룩의 토판문서


▎개인이 소유한 농작물과 가축의 소유권을 표시한 토판 문서. / 사진:배철현
영국 지질학자이며 고고학자인 윌리엄 케넷 로푸투스(William Kennett Loftus, 1820~1858)는 1850년에서 1854년까지 우룩 발굴을 시도했다. 그는 이곳이 성서에 등장한 ‘에렉’이라고 확신했다.

‘이라크’라는 오늘날 국명은 아랍어로 ‘알-이락(al-ʿIrāq)’이다. ‘이락’이란 이름은 ‘우룩’에서 유래했다. 고고학자들은 우룩 제 4지층(기원전 3200년)에 에안나 신전이 건설됐고 이 신전과 도시를 위한 첫 행정문서가 기록되기 시작했다.

우룩 4지층에서 발견된 행정문서가 있다. 이 문서의 초기 쐐기문자가 어떻게 행정에 이용했는지, 어떻게 사유재산이 등장했는지 자세히 보여준다.

이 행정문서는 에안나 신전에서 발굴됐다. 이 토판문서의 윗부분은 3칸으로 구성됐고 아래 부분은 한 칸이다. 윗부분 왼쪽 첫 칸에는 사람 머리의 일부분이 보이고 그 아래는 반월모양의 밀병이 보인다. 초기 행정문서에서 동사가 자주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의미를 추측하면 이렇다. 사람의 머리를 그리고 이 단어는 후에 수메르어로 ‘삭(sag)’이라고 불렀다. 머리 밑에 있는 밀로 만든 빵은 수메르어로 ‘닌다(ninda)’이다. 이 두 단어는 합쳐 수메르어로 ‘쿠(ku)’라고 부르고 그 의미는 ‘먹다’ 혹은 ‘마시다’이다. 그 칸 오른편에 있는 상하 그림글자를 통해 이 의미가 더 확실해진다. 위에 벼처럼 생긴 글자는 수메르어로 ‘쉐(she)’라고 불렀다. 바로 농작물 ‘보리’를 의미한다. 보리 볏단 두 단을 표시했다. 그 밑에는 특별한 음료를 담는 통이 등장한다. 수메르어로 ‘카쉬(kash)’라고 불리는데, 맥주를 담는 통이다.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야생인간 엔키두가 우룩도시로 진입하기 위해 통과의례를 치른다. 그 의례가 바로 ‘맥주’를 마시는 행위였다. 엔키두가 맥주를 일곱 통이나 마셔 기분이 좋았다고 기록됐다. 이 첫 칸을 굳이 해석하자면 ‘어떤 사람이 보리로 발효시킨 맥주를 바쳤다’라고 풀이할 수 있다.

위의 칸 둘째에 등장하는 가장 두드러진 기호는 두 개의 구멍이다. 이 구멍은 아마도 숫자를 상징한다. 수메르인들은 숫자를 표시하는 진법을 만들어냈다. 이들은 우주를 60개로 구분해 표시했다. 1년 360(5)일, 1시간 60분, 1분 60초, 원을 390도로 구분한 것은 수메인들이 우주와 자연을 관찰하면서 얻은 추상적인 결과다. 이 한 구멍은 1을 의미하기도 하고, 60 혹은 360을 상징한다. 구멍 두 개가 있으니, 2이던지 120이다. 구개 구멍 아래 다시 ‘보리’ 기호인 ‘쉐’가 그려져 있다. 이 행정문서는 2단 혹은 120단 보리를 신전에 맡긴 사람에 관한 것일 것이다. 그 맡긴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할 수 있다. 이 기호들 왼편에 여성의 음부를 상징하는 기호가 등장한다. 이 기호를 수메르인들은 ‘무누스(munus)’ 혹은 ‘미(美)’라고 불렀다. 이 물건을 신전에 맡긴 사람은 여성이다. ‘여성’ 기호가 보릿단 밑에도 등장한다. 이 칸 중간 왼편에 ‘사람 다리’ 기호가 있다. 이 기호는 후에 수메르어로 ‘굽(gub)’으로 전환돼 ‘발로 할 수 있는 모든 활동과 관련된 명사와 동사’로 사용됐다. 수메르어 굽(gub)은 ‘발’ 혹은 ‘걸음’이란 명사이기도 하고 ‘서 있다, 뛰다’라는 동사이기도 하다. 그 아래 그려진 두 개의 마름모 형태의 의미는 알려진 바가 없다. 기원전 3100년경, 그림글자는 1500개 정도였다. 이 그림문자들이 단순화와 융합과정을 거쳐 기원전 2600년경에는 600개 정도의 수메르 문자로 고정된다.

아래 부분 첫 칸에는 나무가 지팡이가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으로 동물의 아랫부분이 보인다. 누군가 사육된 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는 모습이다. 아랫부분 가운데에 아래가 열린 직사각형과 삼각형 부분이 겹쳐진 그림이 등장한다. 이 그림문자는 수메르어로 ‘구(gu)’ 즉 ‘황소’가 됐다. 우룩이라는 도시행정을 위해 필요한 경제적인 자산인 농산물과 가축을 모두 표현했다. 고대인 유목민들은 자신의 재산을 동산(動産)으로 표시했다. 특히 양이나 소와 같은 가축은 동산을 측정한 기준이 됐다. 오늘날 ‘자본’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캐피탈(capital)’은 라틴어에서 ‘소몰이’를 의미하는 ‘카푸트(caput)’에서 유래했다. 도시문명의 핵심은 사유재산이며, 이 토판문서는 한 개인이 소유한 농작물과 가축의 소유권을 표시했다.

인류는 이제 한 장소에 거주하면서 각각의 지혜를 모아 제한된 공간에서 집중경작을 통해 생산성을 극대화했고, 사유재산이 등장해 이것을 관할할 행정을 탄생시켰다. 문자는 기억을 대신해 더 많은 정보를 정확하게 보관하기 위한 행정의 도구로 등장했다. 행정은 인간의 삶을 도시 안에서 꽃피우도록 도와 주는 가장 효율적인 체계다.

※ 배철현 -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셈족어와 이란어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삼중 쐐기문자가 기록된 베히스툰비문의 권위자다. 2003년부터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2015년에 개원한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 운영위원이다. 저서로는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심연]이 있다.

201808호 (2018.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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