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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의 어드벤처(16)] 아랍 전쟁이 빚어낸 국경의 흉터 

“당신은 히브리어를 배워야만 하오!” 

김미루 사진작가
민족주의 광풍에 휩싸인 이스라엘의 비극… 이집트에서는 모국 이스라엘에 맞서는 여인에게서 문명의 회복력 엿봐

▎시나이반도 동부에 있는 누웨이바는 성서(聖書)에서 모세와 함께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머문 곳으로 거론된다. 덕분에 이곳에 자리 잡은 히피 캠프 ‘라스 샤이탄’의 의미도 가볍지 않다. 라스 샤이탄의 전경.
타야는 정실마나님 움마흐무드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앞서 말한 대로 경주용 낙타를 기르고 팔곤 한다. 과거 베두인에게 낙타는 유일한 운송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 베두인은 모두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낙타는 관광객을 위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낙타로부터 나오는 음식은 베두인이 영양을 보충하는 귀중한 자원이기도 했다. 낙타고기는 결혼식 같은 특별한 축제 때 올리는 음식이었다. 베두인은 낙타의 젖통에서 짜낸 생젖을 그대로 마시는데, 나에게는 그것이 위에 부담을 줘 마시기가 힘들었다. 가공 안 된 낙타 젖은 미지근하고 걸쭉한데, 뜨거운 차와 섞어 마시기도 한다.

하여튼 지금 낙타의 젖이나 고기는, 그것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상업적인 가치가 없다. 그리고 관광객을 위한 낙타 태워주기도 별로 수익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타야는 낙타를 길러 큰돈을 버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 방법이란 결국 경주용 낙타를 기르는 것이었다. 지역 경기에서 우승한 낙타는 사우디의 부자들에게 팔 수 있다. 아라비아반도의 산유국들에게 낙타 경주는 수백만 달러의 이권이 걸린 매우 심각한 비즈니스다. 어떤 최상급 낙타는 미화 100만 달러를 호가한다. 아랍에미리트에서 거래된 기록적인 가격은 270만 달러였다.

그런 낙타에는 특수한 체형을 만들기 위해 꿀과 밀크를 포함해 매우 풍요로운 식단을 짜서 먹인다. 그리고 특별히 디자인된 러닝머신 위에서 특수훈련을 받는다. 사우디나 아랍에미리트의 부자들이 경주용 낙타를 먹이려고 매달 1000달러를 쓴다는 것을 생각하면, 타야가 요르단에서 키운 우승 낙타들을 4만 달러에 팔았다는 것은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우디 부자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가격이 싼 편이고 승률도 좋은 모양이다.

사막에서 만난 문명과 반문명의 묘합(妙合)


▎경주에 나선 낙타 등 위마다 로봇 기수(騎手)가 달려 있다. 예전에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어린아이를 기수로 썼다.
낙타 사육이 주된 수입원이기는 했지만, 타야는 사막에 자그마한 투어리스트 캠프도 운영하고 있다. 짭짤하게 사는 인물이다. 내가 지난번에 묵었던 아우데 엄마의 텐트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사막 깊숙한 곳이었다. 관광캠프는 보통 때는 비어 있다. 그런데 타야는 아우데, 아흐마드 그리고 칼리드로 하여금 관광객을 자기 캠프로 데려오게 한다. 그래서 가끔 캠프가 관광객에 의해 사용되곤 한다.

아우데는 나에게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이곳을 기간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캠프를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실 그래서 나는 이집트로 가는 길에 구태여 와디럼에 들르게 된 것이었다. 장엄한 랜드스케이프 속에서 혼자 외롭게 생활할 수 있다는 발상 그 자체가 너무도 매혹적이었다.

물론 캠프이기 때문에 물이나 음식과 같은 생필품이 제공되고, 또 침대, 변소, 부엌 같은 생활편의시설이 제공된다. 이 문명과 반문명의 묘합(妙合)은 나에게 창조적인 예술의 회오리바람 같은 흥분을 자아냈다. 아, 이런 곳에서 오랫동안 은자처럼 지내보고 싶다. 내 인내를 가늠하는 실험일 뿐 아니라, 모든 해탈과 카타르시스의 체험을 거쳐 궁극에는 생산적이 되는 어떤 변모를 떠올렸다. 자연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들에게 광야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은 결코 희한한 것이 아니다.

한국에도 숀 펜(Sean Penn)이 직접 각본을 만들고 감독한 [광야로(into the Wild)]라는 영화가 소개돼, 실제 주인공인 크리스토퍼 맥캔들리스(Christopher McCandless, 1968~1992)의 삶을 아는 사람이 적지 않다. 크리스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에모리 대학을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매우 성실한 성격에 운동선수로서의 기량도 출중한 인물이었다. 하버드 법과대학에도 갈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구비한 앞날이 창창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문득 삶의 진실을 알고 싶어 자신의 통장을 톡톡 털어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완벽한 무소유의 인간으로서 엄지손가락 하나 믿고(히치하이킹) 여행을 떠난다.

크리스는 베링해협까지 도달하겠다는 결심으로 알래스카에 도착한다. 그가 1992년 4월 테클라니카 강에 도착했을 때 강바닥이 단단히 얼어 쉽게 도강할 수 있었다. 이후 발견한 버려진 버스에 주거를 정하고 자연 속에서 삶의 사투를 벌이지만, 반문명적인 삶이 얼마나 고달픈가를 절실히 깨닫는다. 구도자로서 그의 문제의식이 다다른 결론은 이러했다: “행복이란 오직 타인과 더불어 공유할 때만이 리얼하다(Happiness is only real when shared).”

그는 문명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강을 건너려 했으나, 7~8월의 테클라니카 강은 수심과 유속이 엄청나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113일간의 일기를 남겼는데, 아마도 독초를 식용으로 알고 잘못 먹은 모양이었다. 그는 서서히 죽어간다. 107일째 일기에는 “블루베리,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적혀 있다. 그 후 113일까지 그는 점만 찍어 놓았다.

바위산 중턱에 마련한 한 폭 서재


▎타야는 낙타 사육과 함께 요르단 사막에 투어리스트 캠프를 운영했다. 한 텐트 구조물 내부에 침대 두 개가 놓여 있다.
슬리핑백 속에 든 크리스의 시신은 2주 후 근처를 지나던 사냥꾼에 의해 발견됐다. 그의 실험은 특별한 감동을 우리에게 전한다. 어떠한 종교적 구도자보다도 더 리얼한 문제의식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그는 미국의 문학과 영화예술을 통해 불멸을 획득했지만, 나는 크리스처럼 죽을 생각은 없었다. 나는 캠프를 보자마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크리스처럼 고립될 수는 없지.’ 사막에서 오랫동안 안전하게 버티는 모든 방도를 점검했다. 나는 반드시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

거대 암석 사이의 계곡에 둥지를 튼 캠프는 다음의 요소들로 구성돼 있었다. 첫째는, 다섯 개의 작은 텐트가 있었는데 쇠막대기 프레임으로 만든 반영구적인 것이었고, 그 안에는 메탈프레임 침대가 두 개씩 놓여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같이 쓸 수 있는 큰 텐트가 하나 따로 있었고, 가리개가 덮인 라운지 영역이 있었다. 그리고 바위와 시멘트로 만든 공동취사시설이 있었고, 또 공용화장실이 따로 지어져 있었다. 이 화장실에는 몇 개의 샤워와 수세식변기가 하나씩 놓여 있는 몇 개의 방이 있었다. 변소에는 천정이 없다. 이 캠프 동편의 바위언덕 꼭대기에 큰 쇠 물통이 놓여있어 부엌과 변소에 물을 공급한다. 아우데는 내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물탱크 트럭이 와서 쇠 물통에 물을 채울 것이라고 말했다.


▎캠프 옆 바위산을 100여m 오르면 투어리스트 캠프 전경을 조감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온다.
내가 아우데의 엄마 텐트에서 살았던 모습을 돌이켜보면 이 관광캠프는 정말 사치스러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입고 싶은 무엇이든지 입어도 좋다는 것, 그러니까 안 입고 싶은 것을 안 입어도 된다는 것, 이런 것이 나에게는 대단한 자유였고 사치였다. 내가 그곳에 있는 짧은 시간 동안에 나는 주변을 부지런히 정찰해 내 서재를 만들 수 있는 곳을 찾아 놨다.

캠프 서편에 있는 약 100m 높이의 바위산 중턱에 나는 아주 널찍하고 평평한 곳을 찾아냈다. 그 끝에서 보면 캠프 전체가 내려다보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 동굴처럼 생긴 암반이 형성돼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있으면 그늘과 방풍의 효능이 보장된다. 그곳에 책상과 의자를 하나씩 놓고 끝없이 펼쳐진 모래와 산들을 바라본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얼마나 신선한 한가로움일 것인가! 그곳에 책상을 놓으면 등허리를 아프게 하지 않고 나는 저술을 계속할 수 있으리라! 네가 의자에 앉아 쓰고 있을 동안에 세속풍광과는 전혀 다른 저 세계의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환상적인가!

캠프의 구조와 환경상태에 관해 나는 매우 고무됐지만, 그곳에서 보낼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번 여행의 본래 목적은 이집트로 가 내가 산 낙타를 보는 것이었다. 하루속히 아카바 항구로 가야만 했다. 빌리지에서 점심을 먹은 후, 아우데는 나를 페리 선착장으로 데려가 줄 택시를 하나 불렀다. 그러나 페리의 시간표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전에 이집트에서 이쪽으로 타고 왔던 페리의 시간표만을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대기 라인이 얼마나 길었는지, 그 승선의 느낌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만을 기억했다.


▎널찍하고 평평한 암반에 햇볕과 바람을 막아줄 반(半) 동굴까지, 은자의 서재로 쓰기에는 제격이었다.


아랍 전쟁이 빚어낸 국경 검문소의 풍경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길. 200m가량의 이 길을 간 것이야말로 나에게는 죽음의 행진이었다. 이스라엘 측에는 ‘웰컴’이라는 팻말 하나 없다.
택시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 운전사는 나 보고 왜 구태여 배를 타느냐고 반문했다. 이스라엘의 에일라트(Eilat)를 거쳐 타바(Taba)로 가서, 그곳에서 누웨이바(Nuweiba)로 가는 택시를 타면 된다는 것이었다. 아카바만(灣)의 가장 깊숙한 지역에는 요르단과 이스라엘과 이집트 3국의 국경이 맞닿아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통과하기만 하면 바로 이집트로 갈 수가 있었다. 아우데는 운전기사의 발상에 동의했다. 두 사람 모두 내가 미국 여권을 가지고 있어 아무도 나를 국경에서 저지하지 않을 것이며, 매우 쉬운 여행이 될 것이라고 확신을 심어 줬다. 이스라엘은 친미국가니까 잘 대해 줄 것이며 또 페리를 타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를 것이라고 했다.

택시가 나를 요르단·이스라엘 국경 체크포인트에 내려 놓은 것은 오후 3시의 일이었다. 요르단 쪽 출입국관리소로부터 출국도장을 받았을 때, 그들은 나에게 기다란 폴이 달린 커다란 여행가방 카트를 하나 내줬다. 나는 그 카트에 나의 특대 산악용 백팩과 바퀴 달린 카메라가방을 싣고 두 국경 사이의 200m가량의 아스팔트길을 덜덜거리며 카트를 밀고 나아갔다. 이 행진이야말로 내 인생에서 체험하기 어려웠던 죽음의 행진이라는 사실을 새카맣게 잊어 버리고, 단지 한 가지 일만을 나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입경 스탬프를 내 패스포트 위에 받지 말고 별도의 종이 위에 받아야지! 그래서 앞으로 아랍 국가를 드나들 때 트러블이 없도록 해야지!

이런 생각만 하고 있을 때, 나는 이미 내 여권 위에 수없이 많은 아랍 국가의 입경 스탬프가 찍혀 있다는 위험한 사실을 상기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내 여권 위에 찍힌 레바논 입경 도장들이 나에게 끔찍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꿈도 꾸질 못했다! 나는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었다!

이스라엘 국경 안에 들어서자마자 모든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었다. 이완되고 친절한 분위기가 경직되고 적대적인 분위기로 돌변했다.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합리성이 증대되고, 합리성이 증대될수록 인간을 옥죄는 시스템이 발달한다.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한 관리가 나의 여권을 보더니 즉각 타자에게 그것을 넘겼다. 그 사람은 나의 여권을 가지고 사라졌다.

나는 곧 어느 취조실로 끌려갔다. 러시아 사람처럼 생긴 블론드 머리카락의 여성 관료가 나를 무표정으로 심각하게 뚫어지듯 쳐다보더니, 금속 탐지기 속을 지나가게 했다. 그러고 나서 그 여자는 내 몸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내 가방과 함께 나를 옆으로 밀어놓더니, 내 가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사로운 수색이 아니었다. 내 가방의 물품과 사진기 모든 부속을 철저히 해부하는 작업이었다. 뭔가 예사롭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잘 알지 못했고 와본 적도 없었다. 취조실에는 세 명의 완전무장을 한 군인이 오직 내 일거수일투족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일차적인 안전검사를 마친 후에, 그들은 나보고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한 시간이 지난 후엔 무시무시하게 생긴 블론드 머리카락의 여인이 나를 특별실로 데려가더니, 계속 취조를 하는 것이었다. “당신 왜 레바논에 있었던 거야? 거기에 아는 사람이 누구야? 이름을 대!” 이런 소리를 듣는 순간, 그제야 섬광이 내 머리를 스쳐갔다. ‘오, 제기랄! 레바논과 이스라엘이 아직도 전쟁 중이었던가?’

내가 레바논 베이루트에 머물렀고 또 내 짐들을 그곳에 쌓아 놨었기 때문에, 내 여권에는 요르단과 이집트로부터 레바논으로 들어가는 입경 스탬프가 수없이 찍힐 수밖에 없었다. 내 미국 여권에는 전 세계 국가로부터 받은 도장이 수두룩했으니 ‘마타 하리’로 여겨질 만도 했다. 나는 베이루트에서 본 빌딩들의 처참한 외벽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습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기억했어야만 했다. 2006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은 베이루트의 라픽 하리리 국제공항까지 폭파시켰다는 사실, 이란의 지원을 받은 헤즈볼라가 완강히 저항했다는 사실, 1300명의 레바논 사람과 165명의 이스라엘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최근의 사실을 기억했어야만 했다.

나는 내가 왜 베이루트를 갔는지, 그리고 누구를 만났는지에 관해 상세히 보고해야만 했다. 나는 뉴욕에 사는 사진작가일 뿐이며 그 지역에서 할 일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했다. 물론 나의 누드사진 작품에 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 여성 관료는 내가 베이루트에서 만난 사진작가 친구들의 풀네임과 접촉정보에 관한 사실을 전부 기록하게 했다. 그리고 나에게 이스라엘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이스라엘에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며, 나는 단지 요르단에서 이집트로 가는 루트로서 우발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참을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가벼움


▎이집트 쪽 타바 게이트웨이. 이곳을 들어서는 순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러나 뉴욕에는 아는 이스라엘 친구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중에 한 사람, 자기들이 접촉할 수 있는 인물의 주소와 전화를 적어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텔아비브로부터 온 패션 디자이너를 알고 있었다. 내가 베이루트에서 뉴욕으로 돌아온 후, 그에게 베이루트에 있었다고 말하자, 그가 자기도 베이루트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베이루트에 있었던 것은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베이루트 건물에 폭격을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 친구의 이름이야말로 이 여인에게 남겨놓기에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그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다.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가? 정말 터무니없는 봉변이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나로서는 아무 말 없이 설설 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이 또 지나갔다. 나는 매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름을 남긴 레바논 친구의 삼촌이 헤즈볼라의 강력한 인물이라는 것을 기억해내었기 때문에 나는 덜덜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나는 다시 새로운 여자 관료에 의해 취조실로 끌려갔다. 그 여성은 검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내 심장작동이 멈추는 듯했다: ‘이것으로 나는 끝이구나! 그들은 나와 헤즈볼라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을 조작해내서 나를 스파이로 휘몰아 감방에 쳐 넣으려고 하는 것 같다!’

새 이스라엘 관료는 러시아 여자 같이 생긴 블론드가 나에게 물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졌다. 중범죄자에게는 항상 같은 질문을 던진다더니…. 그러고는 나 보고 컴퓨터를 꺼내서 나의 작품을 보여 달라고 했다. 뒤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내 예술작품 모두를 보여줬어도 오히려 아무 문제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내 누드 작품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에 나는 사막의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작품을 보여주었고, 또 베두인 복장을 하고 일상적인 잡일을 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한 것들을 보여주었다.

사실 정치적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누드작품이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그 국경 관료는 그녀가 본 것에 관해 깊은 의심을 품은 것 같았다. 당장 이런 질문이 쏟아졌다: “당신이 왜 아랍 복장을 입는가? 하필 왜 아랍 복장을 입느냐 말이오!” 내 대답은 명료했다. 그냥 입고 싶으니 입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그것이 이해가 되질 않는 것이다.

나는 베두인 문화를 배우고 그들의 삶의 가치를 나 스스로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럴수록 그녀의 의구심을 더욱 깊어만 갔다. 연속된 그녀의 질문들은 단지 한 가지 포인트로 집중되고 있었다: “도대체 당신은 왜 아랍인들을 좋아하는 것이요?”

그녀는 나에게 아랍어를 할 줄 아는지까지 물었다. 나는 아랍어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그녀는 당연히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왜 아랍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거요?” 내가 단순히 월경(越境) 하나 때문에 왜 이런 질문에 답하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 말 배우는 것에 무슨 ‘왜’가 필요한가? 교양인에게 ‘왜 외국어를 배우시오’라는 질문이 의미가 있나? 나중에 그 여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히브리어를 배워야만 하오!” 뭐라고? 도대체 나는 내 귀를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왜 낯선 국경에서 이런 방식으로 취급당하고 있는 것일까?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는 이스라엘 문턱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리라! 그때 이런 약속을 했고, 지금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사람 일은 누구도 모른다. 재수가 나빴을 뿐!

베두인 남자와 결혼한 이스라엘 여자


▎이집트 누웨이바의 히피 캠프 ‘라스 샤이탄’에 도착해서 처음 먹은 음식. 신선한 씨푸드의 향연 덕에 모든 것이 꿀맛이었다.
나는 이렇게 이스라엘 국경에서 4시간을 억류당했어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에는 나의 여권을 돌려받았다. 내가 원했던 대로 이스라엘 입경 스탬프는 별도의 종이 위에 찍혔다. 그리고 이스라엘 에일라트의 다른 쪽, 이집트의 타바와 국경을 접한 곳으로 직행했다. 이스라엘 땅을 나와 이집트 국경 내로 진입할 때 후유 하고 한숨이 나왔다. 내가 최종적으로 택시를 타고 누웨이바에 있는 라스 샤이탄(Ras Shaitan) 히피 캠프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는 떨어진 후였다. 결국 와디 럼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5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페리로 오는 것이 더 빠르고 편했을 터였다. 내가 히피 캠프에 도착했을 때 나를 반겨 준 주인 여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집트의 베두인 남자와 결혼한 이스라엘 여자였다.

그녀는 나를 따뜻하게 맞이하며 휴식공간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젊은이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즐기고 음악을 연주하며 같이 노래 부르고 있었다.

주인 여자는 새까만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정말 에너지가 넘치고 건장하고 씩씩했다. 그리고 이 고립된 해변에 그녀 스스로 창조해낸 소박한 유토피안 코스모스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이 대단했다. 그 여자에게 이스라엘 국경에서 내가 겪어야만 했던 곤욕을 이야기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코믹하게 답변했다: “그놈들한테 내 이름을 안 줬기를 바래. 줬다면 골치 아플 것은 내가 아니라 너였을 테니깐.” 그러면서 호탕하게 웃어댔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전쟁광적인 이스라엘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고, 이스라엘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했다. 이 여인의 존재는 하나의 축복이었다. 이 상궤에서 벗어난 호탕한 이스라엘 여인이야말로 드라이하고 민족주의적인 국경출입국관리소의 여인들과 정 반대의 캐릭터였고, 우리가 이스라엘 여자에 관해 형성하기 쉬운 부정적인 편견을 분쇄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었다. 어느 문명이든지 이러한 돌출한 기형의 인간이 없으면 그 문명은 생명력을 잃는다. 일본 여인들도 아주 순종적인 듯이 보이지만 때로는 상궤를 일탈한 특이한 여성 또한 적지 않다.

히피 캠프 ‘라스 샤이탄(악마의 머리)’은 현대판의 ‘키르케 섬(Circe's Island)’이라 말해야 할 것 같다. 키르케 섬은 [오딧세이]에 나오는 마녀의 섬으로, 그곳의 마녀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힘이 있어 섬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나는 이곳에서 바닷가를 산책하고 먹고 마신 것 이외로는 별로 한 것이 없는데도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다. 음식도 신선한 생선이 얼마나 맛있는지, 씨푸드의 천국이다. 맥주도 있다. 모든 식사와 맥주와 방 값을 포함해서 하루에 15달러밖에 받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의 독방을 배정받았는데, 그것은 돌과 나무와 종려나무 잎으로 만들어진 독채다. 모기장과 폼 매트리스도 있다. 전기는 없고 밤에는 초를 켠다. 필요하다면 몇 분만 걸어가면 라운지에서 나의 전기용품들을 충전시킬 수 있었다. 변소와 샤워는 공동 화장실에서 해결할 수 있는데, 그곳에는 밤새 전기가 들어온다. 변소까지는 밤길 걷는 데 곧 익숙해졌고 샤워는 참았다가 아침에 하는 데도 줄이 길었다.

현대판 ‘키르케 섬’에서 침전해 가다


▎바다를 마주보는 자리에 마련한 책상과 의자. 휴대용 태양광발전기 덕분에 어디에서든 문명을 향유할 수 있었다.
내가 라스 샤이탄에 온 것은 12일 저녁이었다. 그런데 14일에는 이미 고참처럼 간략한 임시방편의 책상과 방석이 있는 의자를 해변에 장만해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의 랩톱 컴퓨터에 네트워크 단말기인 ‘동글’을 장치해서 로컬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 땡볕이 너무 심하게 내리쬐면, 나는 팜트리 아래의 그늘로 책상을 옮겼다. 내 눈이 컴퓨터를 쳐다보다가 피곤해지면 나는 곧 컴퓨터 너머로 광활하게 펼쳐진 파아란 바다의 물결을 쳐다볼 수 있었다.

책상에 바르게 앉아 있는 것이 피곤하다 싶으면, 방석을 가지고 긴 접이의자에 기대어 전자책 리더기인 ‘킨들(Kindle)’로 제임스 솔터(James Salter, 1925~2015)의 단편 소설을 읽는다. 나는 그렇게 물가에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었고, 한 촌의 지루함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인생이 아름다웠고 단순했다. 지적 욕망을 포함한 모든 욕망이 이곳에서 충족됐다. 저녁에는 불가에서 맥주와 차를 마시면서 자유로운 영혼의 여행가들과 담론하면서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 부르곤 하였다. 나는 왜 많은 사람이 이 작은 파라다이스에 함몰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죽치고 살게 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나 역시 그곳에서 수개월을 별 생각 없이 지냈을지도 모른다.

4일째 되던 날, 젊은 국제학생들로 구성된 여행단이 이곳에 도착했다. 카이로의 인턴십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온 것인데, 대체로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학생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에너지가 넘치고 새로운 체험에 목말라 있었다. 그들이 잡담을 하고 있을 때, 나는 그들 곁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그들은 곧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서 오셨어요?” “여기선 무엇을 하세요?” 등등. 나는 사진작가이며, 지금은 사막과 낙타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해줬다. 그때였다. 그 많은 학생 중 한 어린 여학생이, 중국인이었다, 내 얼굴을 꿰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놀란 표정을 지으며 크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미루 킴이세요?”

내가 그렇다고 말하자, 그 여학생뿐 아니라 학생 모두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그 중국 여학생은 황홀경에 빠진 듯, 위대한 스타를 만난 듯, 그녀의 친구들에게 그녀가 김미루의 테드(TED) 강연을 청취했으며 그 뒤로 나의 작품을 계속 추적해 왔다고 진지하게 설명했다. 갑자기 해변의 모든 주목이 나에게 쏠렸다. 그들 가운데 인도 뭄바이에서 온 소년은 내가 인도를 최근에 방문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도 기뻐했다. 친하게 된 후에, 그는 내가 다시 그곳을 방문하게 되면 자기 홈타운을 안내하겠다고 자청했다. 그 해 늦게 뭄바이에 들렀을 때 나는 그 소년의 도움을 받았다.

※ 김미루 -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 서양화를 공부했다(2006년 졸업, 미술학 석사 MFA). 이스트 리버 미디아에서 2년 동안 그래픽 디자이너,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뉴욕타임스]와 [에스콰이어] 매거진에서 ‘베스트 앤 브라이티스트(Best and Brightest)’ 예술인으로 뽑혔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과 리움, 서울시립미술관, 한미포토뮤지엄에 소장돼 있다.

201809호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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