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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삼의 한자 키워드로 읽는 동양문화(11)] 제사 공동체, 사(社)를 넘어서 

‘끼리끼리’ 내부거래는 미래사회 진입 막는 장애물 

하영삼 경성대 교수
사에 대한 존중만큼이나 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횡포 경계해야…중(中)처럼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관계 맺음의 윤리 지키는 게 중요

▎2001년 5월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선정된 종묘대제는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열린다.
1. 개인의 희생

꾀꼴꾀꼴’ 꾀꼬리가 노래해요,
가시나무에 앉아서.
누가 ‘목공’을 따라 무덤으로 들어갔나요?
‘자거’ 집안의 ‘엄식’이가 따라갔지요.
그때 ‘엄식’이가,
우리 모두를 대신해 선택됐죠.
그는 무덤 입구로 다가가면서,
팔다리는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요.
저리도 창창한 하늘이,
우리의 모든 착한 양민들의 생명까지 앗아갑니다.
우리가 그의 몸값이라도 지불하고 살려낼 수만 있다면,
생명을 걸고서라도 그를 구할 사람이 100명은 될 것이오.


영국 시인 웨일리(Arthur Waley, 1889~1966)가 번역한 [시경]의 ‘진풍(秦風)’에 실린 ‘꾀꼬리(黃鳥)’라는 시의 일부다. 기원전 621년 춘추시대 진(秦)나라 군주인 목공(穆公)이 죽자 자거 집안의 아들들이 순장된 것을 슬퍼하는 시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때 함께 순장된 사람은 무려 177명에 이른다. 순장제도는 노예제 사회에서 이뤄졌던 극히 비인간적이고 비극적인 풍습이다. 이 시는 생전에 신하로서 바쳤던 충성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임금이 죽자 살아 있는 백성을 함께 생매장하는 관습에 대한 슬픔과 애도로 가득 차 있다.

순장제도 아래서 누군가는 임금을 위해 죽어야 한다. 임금은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자리가 아니라, 온 백성의 우두머리였으니, 자신보다 높고 고귀한 자를 위해서는 아랫사람의 희생은 당연하고도 필연적이었다. 그러므로 진나라의 군주가 죽었을 때, ‘엄식’이가 아니었다 해도, 누군가는 순장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산채로 묻히고자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시는 “그는 무덤 입구로 다가가면서, 팔다리는 두려움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지요”라고 노래했다.

또한 우리의 착한 양민들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저 창창한 하늘(군주)은 무심함을 넘어서 반인륜적인 존재이며 원망의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몸값이라도 지불하고 살려낼 수만 있다면, 생명을 걸고서라도 그를 구할 사람이 100명은 될 것이오”라고 하면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양이 된 ‘엄식’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나 군주제 아래서, 군주에 항의하고 지배세력의 횡포를 횡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개인이나, 개인들의 모임 혹은 연합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래서일까? 동양의 역대 번역가는 ‘이 엄식이여, 백부 중에 뛰어난 자로다. (…) 만일 바꿀 수만 있다면, 사람마다 그 몸을 백 번이라도 바치리라’라고 웨일리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로 번역하고 있다. ‘뛰어난 자’로 해석된 원문은 특(特)인데, 특(特)은 원래 희생으로 선택된 특별한 소를 뜻한 글자다.

그런데도 이를 뛰어난 자로 해석해 혹시라도 희생으로 바쳐진 자가 선택되고, 그것이 훌륭한 행위로 해석될 여지를 남겼다. 이어지는 문구에서도 그럴 힘만 있다면 힘을 모아 그를 구해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대신해 누구라도 몸을 바칠 준비가 된 것처럼 포장했다. 이러한 번역 관행 속에는 왕권중심의 수직적인 위계사회에서, 군주를 위한 희생을 당연하고 고귀한 행위로 간주하고자 하는 전략이 숨어 있다.

그러나 왕권이 폐지되고 대의민주주의가 수입된 이후에도 동양에서는 국가나 사회를 위한 개인의 희생이 덕목처럼 여겨졌다. 개인 위에 공동체가 존재하고 그 위에 국가가 존재하는 것 같은 수직적 위계질서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2. 사회(社會)란 무엇인가


▎중국 근대 시기 최고의 번역가 엄복. 헉슬리의 [천연론] 등 서양의 다양한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해 중국의 계몽에 기여했으며, 번역의 전범을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엄복(嚴復, 1854~1921). 중국 근대 시기 최고의 번역가였다. 헉슬리의 [천연론(天演論, Evolution and Ethics)] 등 서양의 다양한 서적을 중국어로 번역해 중국의 계몽에 기여했으며, 번역의 전범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한다. 공동체와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인간이다. 물론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되면서 공동체에는 인간만이 아니라 인터넷과 기계인간의 가치가 더해 가겠지만, 그것도 넓은 의미의 사회니, 사회적 동물이란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社會)라는 말은 근대 시기 일본을 통해 들어온 단어로 알려져 있다. 서구의 ‘society’의 번역어다. ‘society’가 동료·협회·동맹·노동조합·지역사회 공동체 등을 뜻하는 것을 보면 어떤 이익이나 공통된 목표를 위해 뭉쳐진 단체나 집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립된 개인’을 기초단위로 가지는 ‘사회’라는 의미가 생겨난 것은 서구에서도 근대 시기 이후라고 봐야겠지만, 근대 이전에도 서구의 ‘society’ 개념 속에 종교적 색채는 별로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서구의 ‘society’라는 단어가 중국으로 들어왔을 때 중국인들은 종교적 색채가 든 사(社)로 번역하지 않고 이를 군(群: 집단)으로 옮겼다. 이 번역은 근대시기 뛰어난 번역가였던 엄복의 것이지만, 그전 중국에 파견된 선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메드허스트(W.H. Medhurst)의 [영화자전(英華字典)](1847)에서는 ‘회(會)’나 ‘결사(結社)’로, 조금 뒤의 로브샤이트(W. Lobscheid)의 동명 [영화자전(英華字典)](1866~1869)에서는 ‘일회(一會)’ 등으로 번역했다.

중국에서 ‘society’를 일본과 달리 군(群)이나 ‘회(會)’나 ‘결사(結社)’ 등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라는 단어가 일찍부터 중국에 존재해 왔고, 의미도 전혀 달라 ‘종교 활동을 위한 회합’을 뜻했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라는 단어는 이미 당나라 때부터 출현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社)는 토지 신으로 상징되는 사당을, 회(會)는 회합을 뜻해 종교나 민속적 축제일이 되면 사당을 중심으로 모여서 함께 즐기는 회합을 말했다. 라틴어에서 ‘동료’를 뜻하는 ‘socius’에서 출발한 영어의 ‘훌륭한’과 프랑스어 ‘societe’와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중국의 처지에서 보면 서구의 ‘society’가 사회로 번역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원의(原意)에 가까운 집단·무리라는 뜻의 ‘군(群)’으로 번역됐다. 하지만 양무운동 등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근대화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일본의 번역어가 더 환영을 받아 지금에 이르렀다.

물론 일본도 사회라는 단어가 정착하기까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일본에서는 ‘society’가 메이지시대(1868~1912) 때 들어왔다. 초기였던 1880년대에는 회사(會社)·교제(交際), 심지어는 세태(世態) 등으로 번역하는 등 무려 40여 가지의 번역어가 존재했다고 한다.

그것은 ‘society’가 갖는 근대적 개념의 ‘사회’를 일본 전통사회의 개념으로는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비슷해 [삼국유사] 등 전통적인 문헌에서의 사회(社會)는 중국처럼 ‘종교적 행사나 모임’을 뜻했다. 사회(社會)가 ‘society’의 번역어로 쓰인 것은 유길준의 [서유견문](1895)이 처음이라 하며, 그전 게일(J. S. Gale)의 [한영자전(English-Korean Dictionary)](1897)에서는 ‘제사’로 풀이하고 있다(최정옥, 2017).

3. 사(社)의 어원: 토지에 대한 숭배


사(社)는 土(흙 토)와 示(보일 시)로 구성돼 토지(土)에 대한 숭배(示) 대상이라는 의미를 담아 ‘토지신’을 뜻했다. 이로부터 토지신을 모시는 제단이라는 뜻도 나왔다. 이후 토지신을 모시는 축제일에 함께 모여 즐기는 ‘행사’를 뜻했다. 또 25가(家)를 지칭하는 지역 단위로 쓰였으며, 이후 어떤 단체나 사회까지 지칭하게 됐다.


▎이미지 1
농업사회를 살았던 중국에서 토지의 중요성 때문에 곡식 신을 뜻하는 稷(기장 직)과 결합해 ‘국가’를 상징하기도 했다. 한나라 때는 수(水)가 더해진 사(이미지1 참조)로 쓰기도 하는데, 토지신(土) 외에 물의 신(水)에게 제사를 드림을 강조해 농경에서 흙과 물이 갖는 중요성을 더욱 형상적으로 그렸다.

사실 중국에서 사(社)는 매우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전통적으로 좌묘우사(左廟右社)나 좌조우사(左祖右社)라는 말이 있다. 이는 주(周)나라 때의 전장제도를 규정한 [주례(周禮)] ‘고공기(考工記)’에 나오는 말이다.

“수도를 세울 때는 가로세로 9리 크기로 하고, 곁에는 문을 3개 만든다. 수도 안을 가로세로 9영역씩, 총 81개의 영역으로 만들고, 도로는 세로축을 9차선으로 만든다.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은 왼쪽에 토지 신을 모시는 신전은 오른쪽에 만들며, 조정은 앞쪽에 시장을 뒤쪽에 건설한다.”

수도 건설의 설계도인데 이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건축물 중의 하나가 조상신을 모신 묘(廟)와 토지 신을 모신 사(社)였던 것이다. 조상신은 인간을 영속하게 해주는 존재이며, 토지신은 인간을 먹고살게 해주는 신이다. 정착 농경사회에 일찍부터 진입했던 고대 중국에서 토지신이 조상신만큼이나 중요했던 이유다. [주례]의 ‘고공기’는 보수적으로 봐도 전국시대 때는 만들어졌다고 보어야 하니, 약 2500년 전의 기록인 셈이다.

그 전의 사(社)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1959년부터 1965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발굴된 강소성 서주(徐州) 북쪽의 동산현(銅山縣) 구만(丘灣) 상나라 때의 유적지에서 사(社)의 유적이 발굴됐다. 4개의 돌로 만들어진 ‘제단’이 발굴됐고, 큰 돌을 중심으로 당시 제사에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20구의 인골과 12마리의 개 유골이 둘러싸여 분포했다. 고고학자들은 이를 상나라 때의 사사(社祀) 즉 토지 신에 대한 제사 흔적과 그 제단으로 추정했다. 현존하는 최초의 사(社)의 유적이고,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쯤의 유적이다.

[논어]를 읽은 독자라면 ‘팔일(八佾)’편에서 노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의 제자 재아(宰我)에게 토지 신을 모시는 사당에 대해 물은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나라 때는 신주를 소나무(松)로, 상나라 때는 측백나무(柏)로, 주나라 때는 밤나무(栗)로 만들었다”고 했다. 사(社)의 역사가 상나라는 물론 그전의 하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인데, 적어도 상나라 때의 유적이 실물로 발견된 것이다. 다만, 신주는 나무가 아니라 돌로 했던 것이 더욱 원형에 가까워 보인다.

토지 신을 모시는 사당의 신주가 돌이었다는 고대 기록도 자주 보인다. 예컨대 한나라 때의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은나라 때의 예제에 의하면 돌로 사(의 신주)를 만들었다”라고 했다. 또 [주례]의 ‘춘관(春官)’에도 “유사들을 이끌고 군대에 사(社)를 세웠다”는 말이 보이는데, 한나라 때의 정현은 “사(社)에 놓는 신주(主)는 주로 돌로 만들었다”라고 했다.

허신(許慎)의 [설문해자]에서도 ‘오늘날 산양(山陽)에는 사당에 돌로 위패를 만드는 풍속이 있다’고 하기도 했다. 한나라 때 들면 돌로 위패를 만들던 관습은 이미 없었다. 하지만 일부 지역에서 그 습속이 남아 있어 특별히 기록했던 것으로 보인다. 돌로 만든 위패를 뜻하는 석(祏)자는 이러한 전통을 반영한다.

이렇게 볼 때 토지신을 모시던 사(社)의 실물 유적이 상나라 유적에서 발견됐고, [논어]의 언급처럼 그 연원은 중국에서 국가의 출현이라 일컬어지는 하나라까지 거슬러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신주로 나무보다는 돌이 먼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여러 문명에서 발견되는 선사시대의 선돌(立石) 유적에서처럼, 처음에는 자연석을 원시 숭배 대상으로 삼던 데서 출발했다. 이후 석실이나 석주로 시조나 토지신의 영혼이 머무는 곳으로 인식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4. 농경사회의 가치관


▎농경은 농사를 사회의 주된 생산수단으로 하고, 정착농경은 이동이 아닌 한 곳에 정주해 농사짓는 것을 의미한다. 이집트 벽화에 등장한 농경 모습.
사(社)는 이처럼 일찍부터 숭배 대상이 됐고, 국가의 중요한 대표 건축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토지’ 즉 ‘땅’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다. 누차 언급했지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일찍 정착농경에 진입한 문명의 하나다.

농경은 농사를 사회의 주된 생산수단으로 하고, 정착농경은 이동이 아닌 한 곳에 정주해 농사짓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에게 생명이었던 농사의 근원, ‘땅’에 대한 숭배, 그리고 농작물에 대한 숭배는 당연했다. 그리고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축적된 경험이 그 사회를 지배하는 지식의 원천이었음도 쉽게 상상될 것이다. 이러한 흔적은 한자의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땅에 대한 숭배는 사(社)에서 오랜 근원을 찾을 수 있었고, 곡식에 대한 숭배는 제(帝)나 화(華)나 영(英) 등에서 찾을 수 있고, 경험을 존중하는 가치는 장(長)이나 규(規)나 노(老) 등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중화(中華)’라는 말에서 보듯, 화(華)는 중국을 지칭하며, 중국인들이 자신을 높여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華(꽃 화)는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그렸고, 이로부터 ‘꽃’을 뜻했다. 이후 화(華)가 ‘중국’을 뜻하게 되자 보통의 ‘꽃’은 花(꽃 화)를 만들어 분화했다. ‘꽃’을 뜻하는 화(華)가 ‘중국’을 대표하게 된 것은 농경사회의 식물 숭배, 즉 식물의 번식을 상징하는 ‘꽃’이나 ‘꽃씨’를 토템으로 삼고 숭배했던 전통 때문이다.


▎‘장군애 암각화(將軍崖岩畫)’. 신석기시대 유적지로 강소성 연운항(連雲港)시의 금병산(錦屏山)에 있다. ‘사람이 식물에서 탄생’했다는, 그래서 꽃을 토템으로 삼았던 원형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최고의 신’을 뜻했던 帝(임금 제)도 마찬가지다. 제(帝)는 크게 부푼 씨방을 가진 꽃의 모습을 형상했으며, 蒂(꼭지 체)의 본래 글자로 알려져 있다. 즉 갑골문에서 역삼각형으로 부풀어 있는 윗부분이 씨방이고, 중간 부분은 꽃받침, 아랫부분은 꽃대를 형상했다. ‘꽃꼭지’는 곡물 번식의 상징이다. 화(華)와 제(帝)에 담긴 ‘식물 숭배’ 사상은 영(英)에도 담겨 있다. 英(꽃부리 영)은 ‘풀’을 뜻하는 초(艸)가 의미부이고, ‘중앙’을 뜻하는 앙(央)이 소리부로 ‘식물의 핵심 요소’인 ‘꽃부리’를 말한다. [회남자]의 표현처럼 영웅을 뜻하는 여러 한자, 즉 걸(傑)·호(豪)·준(俊)·영(英) 중에서도 최고의 글자다.

이 때문에 영(英)은 영웅(英雄)이나 영재(英才)에서처럼 지금도 즐겨 사용하는 글자이며,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이름자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애용되는 글자의 하나다.

정착농경을 살았던 생태 환경적 배경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치판단에도 직접 반영됐다. 예컨대 規(법 규)는 夫(지아비 부)와 見(볼 견)으로 구성돼 법규(法規)나 규칙(規則)을 말하는데, 글자 그대로 성인 (지식층) 남성(夫)이 보는(見) 것이 바로 당시 사회의 잣대이자 ‘법규’였음을 말해 준다.

정착 농경사회에서 경험이 중시됐던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 남성의 지혜를 최고의 판단 준거로 인식해, 성인 남성(夫)이 보고(見) 판단하는 것, 그것을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따라야 할 사회의 법도(法度)이자 규범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경험에 대한 이러한 존중은 장(長)과 노(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長(길 장)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을 그렸고, 이로부터 ‘길다’는 뜻이 나왔다. 나이가 들어 자신의 머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산발한 긴 머리칼은 나이가 많음의 상징이고, 이로부터 ‘연장자’를 지칭했다. 그 누구보다 오랜 세월 동안 겪었던 풍부한 경험은 매우 귀중한 지식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이러한 경험의 소유자가 그 사회의 ‘우두머리’가 됐고 지도자가 됐으며, 존중을 받았던 것은 당연했다. 지금도 각종 집단의 우두머리를 장(長)이라 하고, 멋진 사람을 ‘짱’이라 부른다.

마찬가지로 老(늙은이 로)는 장(長)에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더해진 글자이다. 나이가 든 사람이 원래 뜻이고, 이로부터 늙다, 노련(老鍊)하다, ‘경험이 많다’의 뜻이 나왔다. 나이 드는 것이 노련함과 완숙함의 상징이 됐다. 중국에서 스승을 뜻하는 라오스(老師 laoshī)도 이런 뜻의 반영이다.

이처럼 현대의 후기 산업사회와는 달리 정착 농경사회를 살았던 고대 중국에서 노인은 지혜의 원천이었고 그 사회의 지도자였으며 대소사를 판단하는 준거를 제공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노인은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노인을 모시는 ‘효(孝)’는 국가를 지탱하는 중심 이념으로 설정되기도 했다.

5. 사(社)의 제도화


제사를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뜻하는 사(社)는 주나라에 들면 본격적으로 제도화하기에 이른다. 알다시피 주나라는 본격적으로 농업사회에 진입한 국가다. 주(周)라는 나라이름도,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后稷)도 그 이름에 그들이 농경사회를 근본으로 했음을 보여준다.

주(周)는 稠(빽빽할 조)나 凋(시들 주) 등과의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이는 농경지(田)에다 곡식을 빼곡히 심어 놓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또 곡식을 밭에 빼곡히 심다, 조밀(稠密)하다가 원래 뜻으로 추정된다. 이런 주(周)가 왕조의 이름으로 쓰인 것은 주나라가 본격적으로 농경사회에 진입했음을 반영한다. 그러자 원래 뜻은 禾(벼 화)를 더한 조(稠)로 분화함으로써 곡식(禾)을 빽빽하게 심어놓은 것임을 더욱 구체화했다. 곡식을 심는 곳은 도성이 아니라 주변이었으므로 ‘주위’라는 뜻도 갖게 됐다.

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의 후(后)는 제왕을, 직(稷)은 곡식을 뜻한다. 그래서 ‘곡식의 신’이라는 뜻이다. 다만 ‘제왕+곡식’처럼 피수식어가 앞에 놓여, 구조가 지금과는 다르다. 지금이라면 ‘곡식+제왕’이 되어 ‘직후(稷后)’가 옳다. 이는 고대로 갈수록 ‘피수식어+수식어’ 구조, 즉 뒤에서 수식하는 구조를 많이 가졌던 중국어의 특징 때문이다. ‘농사의 신’을 뜻하는 신농(神農)도 ‘신+농사’의 구조로, 지금의 어순으로 하자면 농신(農神)이 맞다.

신에 의지하던 노예제 사회의 상나라를 이은 주나라는 본격적으로 농업 기반 사회에 진입해 토지개혁과 농업혁명에 기반을 둔 봉건(封建)사회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사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혈연관계, 농경사회의 질서체계를 강조한 장자 계승제, 이를 기반으로 철저한 종법의 위계질서 확립 등으로 구현됐다. 이들은 사(社)를 중심으로 한 종족 공동체 중심의 소목제(昭穆制), 장자(長)를 적통으로 하는 종법제(宗法制), 통치체계 간의 위계적 질서를 강조한 봉건제(封建制)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다.

왕국유(王國維, 1877~1927)의 말처럼 소목(昭穆), 종법(宗法), 봉건(封建)제도는 주(周)나라 사람들의 발명이었고, 상나라와는 전혀 다른 제도들이었다. 그것은 농업혁명에 의한 농경사회의 본격 진입이라는 사회적 변화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장광직(張光直, 1931~2001)의 말처럼 폐쇄적인 내혼제 등에 의한 왕위 계승의 윤번제로 대표되는 소목제(昭穆制)는 ‘이원적 지도체제’(dualistic leadership)이며, 적자계승에 의한 대종과 소종의 철저한 분리를 말하는 종법제(宗法制)는 ‘분리된 종족제도’(segmentary lineage system)이며, 종법제에 의해 분리된 소종이 자신의 혈통의 구성원과 재화를 가지고서 영토를 분배받아 통치하는 봉건제(封建制)는 ‘분파 종족의 새로운 소국들을 통합시키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6. 농경사회의 가치를 넘어야


▎영화 [4등]에서 코치 광수는 “때리는 선생이 진짜 스승”이라며 준호에게 지속적인 폭력을 가한다.
제사공동체, 즉 사(社)를 중심으로 구축된 동양사회의 여러 전통은 뿌리가 깊다. 특히 사(社)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할 혈연·지연·학연 등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 장(長)과 노(老)로 상징되는 경험을 존중하는 문화, 규(規) 등으로 상징되는 경험적 주관적 가치관 등은 동양의 특징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전통에서 우리가 그 장점을 되살려낼 때, 단점보다는 장점이 더 많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학연·지연·혈연이 단순히 사회에서 주변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에토스(ethos)를 넘어서 타인을 배제하는 끼리끼리 문화로 발전하고, 장(長)과 노(老)로 상징되는 경험을 존중하는 문화가 수직적 위계질서를 강화하고, 윗사람에게 아랫사람이 무조건 복종하는 상명하복의 문화로, 규(規)가 성인(지식층) 남성(夫)이 보는(見) 것이 바로 사회의 잣대이자 ‘법규’라는 지배층 중심의, 남성중심의 문화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곤란하다.

끼리끼리 문화, 내부거래, 획일화, 나아가 체면과 관계로 얽힌 사회 등은 미래사회로 가는 데 큰 장애가 될 것이다. 특히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데는 치명적 약점이 될 수 있다. 이제 농경사회를 기반으로 형성된 여러 가치관과 사회적 습속들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가야 할 때다. 그래야 선진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체면과 관계, 타자의 판단을 통한 자신의 평가 등이 항상 부정적으로 기능했던 것만은 아니다. 남들과의 관계를 위해 양보하며 겸양하며 일방적 지배와 폭력을 제어해 온 것은 동양의 훌륭한 미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용(中庸)의 중(中)처럼 모자라지도 과하지도 않은 적정한 선을 지켜내는 것,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관계 맺음의 윤리를 지켜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다.

사(社)에서 비롯된 전통에 대한 존중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사(社)의 이름으로 우리 공동체 바깥의 타자에 대한 폭력이나 횡포를 정당화하고 있지 않은지, 제사 공동체로 형성된 에토스(ethos)가 윤리가 아니라 폭력으로 이어지지 않는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저지르는 인식의 폭력(epistemic violence)으로 이어지지는 않는지, 끊임없이 경계하고 자기반성을 게을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중용(中庸)의 중(中)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하영삼 - 경성대 중국학과 교수, 한국한자연구소 소장, ㈔세계한자학회 상임이사. 부산대를 졸업하고, 대만 정치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자 어원과 이에 반영된 문화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에 [한자어원사전] [한자와 에크리튀르] [한자야 미안해](부수편, 어휘편) [연상 한자] [한자의 세계] 등이 있고, 역서에 [중국 청동기시대] [허신과 설문해자] [갑골학 일백 년] [한어문자학사] 등이 있고, [한국역대한자자전총서](16책) 등을 주편(主編)했다.

201811호 (2018.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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