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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스타일] 과거라는 새로움, ‘개화기’에 주목하다 

100년 전으로 가는 ‘시간여행’ 티켓 

이유림 월간중앙 인턴기자
아날로그 선호 현상, 구한말까지 확장…SNS 통해 차별성 추구하는 20대 젊은 층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

▎11월 13일 서울 산격동사진관. 대학생 커플인 이준혁(24)씨와 장민영(22)씨가 카메라 앞에 앉았다.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세트장에 들어서자 수트와 드레스가 빛을 발한다.
"여자분, 소파 안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여 볼까요?”

“다리는 두 분이 같은 방향으로 꼬면 더 예쁘게 나올 것 같아요!”

“서로 바라보고 귓속말 하듯이 조금 더 다가가 보세요.” 11월 1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한 스튜디오. 추억을 남기러 온 이준혁(24)씨와 장민영(22)씨는 여느 커플과 다를 바 없다. 단 하나 색다른 점은 촬영 배경과 의상이다. 배경은 마치 골동품 가게 안의 한 벽면을 보는 듯하고 두 사람의 의상은 드라마에서나 봤음직한 고전적인 모습이다. 장씨는 화려한 프릴 장식이 달린 빨간색 드레스를 입고 같은 색의 메리제인 구두를 신었다. 이씨는 깔끔한 쓰리피스 수트에 붉은 계열의 넥타이를 맸다. 메리제인 구두는 아웃콜트(Outcault, R.)가 그린 연재만화의 인물인 메리 제인이 신은 신발에서 유래돼 20세기 초 북미와 유럽에서 유행한 바 있다. 쓰리피스 수트는 1860년대 영국 귀족들의 상징적인 복장이었다. 카메라 앵글 속 두 사람은 마치 100년 전으로 돌아간 듯했다.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콘셉트 사진들이 SNS를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최근 수년간 한복을 입고 경복궁이나 삼청동 일대를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이었다. 요즘은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의 필수 체험코스가 됐다.

이제는 조금 더 현대에 가까워진 ‘근대’가 주목을 받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이른바 개화기 시대의 의상이 젊은층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경험하지 않은 복고, 재해석하다


▎대전 명화사진관의 외관. 오래된 시계와 조명, TV가 한데 어우러져 구한말의 어느 상점을 연상시킨다. 창을 통해 보이는 가족사진이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 사진:명화사진관
이는 SNS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에 ‘#개화기’를 검색하면 해당 게시물은 8351개에 달하고 ‘#개화기 콘셉트’의 경우 2141개다. 구한말을 테마로 한 콘셉트 사진을 최초로 시작한 ‘산격동사진관’은 해시태그가 4200개에 육박한다.

일반적으로 사진 찍기는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이 더 선호한다. 하지만 ‘개화기 콘셉트’ 사진은 다르다. 권오권 명화사진관 대표는 “기존의 전통한복이나 80년대 교복 콘셉트는 주로 여성이나 커플들이 소비했지만 개화기를 주제로 한 사진은 남성 고객들도 많아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그는 “비율로 따지면 10팀 중에 3팀 정도가 남성고객”이라고 덧붙였다. 박장윤 이젠웃어이색사진관 대표는 “구한말을 콘셉트로 한 촬영에서는 남성들이 주로 정장을 입는다”며 “장신구도 회중시계나 행커치프처럼 남성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가 많다”고 설명했다.

할로윈데이를 맞이해 개화기 의상을 대여했던 박소연(25)는 의상대여소에서 “남자 네 명이 의상실에 같이 와서 옷을 골라주는 데 그걸 보면서 이전의 유행과는 굉장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덩달아 개화기 콘셉트의 스튜디오 대표들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부산에 위치한 한 사진관 대표는 “보통 1시부터 8시까지가 정규 스케줄인데 예약이 다 찬 후에도 계속 요청이 들어오는 상황”이라며 “오전 10시로 영업시간을 당겼는데도 수요에 따라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이처럼 살아본 적도 없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층이 개화기에 주목하는 데는 아날로그에 대한 선호, 개화기를 다룬 드라마의 인기, 가격경쟁력 등을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는 최근 선보인 [트렌드 코리아 2019]에서 2019년 트렌드 중 하나로 ‘뉴트로(Newtro)’를 꼽았다. 지난날의 향수에 호소하는 복고(Retro)가 아니라 옛것에서 찾은 신선함을 제공하는 새로운 복고(New+Retro)를 의미한다. 외가댁에 있을 법한 옛날 유리컵을 수집하고, 허름한 노포를 찾는 것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김 교수는 ‘뉴트로’ 현상에 대해 “현재가 힘들수록 과거로 회귀하려는 사람들의 성향은 복고 트렌드로 구현된다. 경기침체의 돌파구가 될 만한 수단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청년들은 과거에 주목하고 그로부터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된다”고 분석했다.

아날로그 감성에 대한 전반적인 선호가 구한말 시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대림 ‘이젠웃어이색사진관’ 공동대표는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순천 드라마세트장과 근대 역사유적이 많은 광주 양림동 거리에 청년층이 모이고 있다”며 “이는 아날로그에 대한 분명한 수요를 증명하며 그쪽을 방문하고 우리 사진관을 찾는 손님들도 많다”고 말했다.

디지털화에 대한 반감으로 등장한 아날로그적 감성은 다시 디지털을 통해 날개 돋친 듯 전파되는 듯하다. 한 스튜디오 관계자는 “사진편집을 하고 보내줄 때도 손님들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기 좋은 사이즈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고 말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고객 가운데 SNS 채널을 통해서 찾아왔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LG경제연구원은 ‘온라인 사교’를 한국 소비자 사이에 나타나는 7가지 라이프스타일 중 하나로 꼽았다.

개화기 콘셉트 소품 찾으러 해외출장도 예삿일


▎명화사진관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화려한 머리장식과 나비넥타이, 행커치프가 벽에 걸린 골동품과 함께 근대적 느낌을 준다.
최근 종영된 tvN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성공은 개화기 콘셉트 사진 열풍에 기폭제가 됐다. 드라마 종영 후 설립된 충남 논산시의 ‘션샤인랜드’에는 주말에만 3000여 명의 관광객이 몰리고 있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로 활동 중인 송은용(23) 씨는 해당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로 개화기를 주제로 한 촬영 요청이 급증했다고 말했다. 송씨는 “드라마 종영 이후 션샤인랜드가 생기면서 관련된 게시물이나 요구가 많아졌다”며 “스튜디오 촬영도 좋지만 실제로 배우들이 촬영했던 현장에 가서 찍어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밝혔다.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 위치한 의상 대여소 앞에서 만난 이지연(24)씨도 드라마의 영향을 받은 사람 중 하나다. [미스터션샤인] 속 김태리(고애신 역)를 많이 좋아했다는 이씨는 “드레스가 아닌 드라마 속 고애신이 즐겨 입은 여성용 정장을 선택해 사진을 찍기로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김우필 문화평론가는 “최근의 복고 유행은 상업적인 대중문화에 한국적 판타지가 가미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해당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한국의 고유성에 대해 더는 촌스럽지 않다는 생각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그는 문화 콘텐트를 통해 선구자들의 지적인 이미지와 모던보이·모던걸의 세련된 이미지가 강화된 결과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사진을 찍는 데 드는 비용도 비교적 저렴해 구한말 콘셉트가 인기를 끄는 데 한몫한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산격동사진관’에서 만난 예비 신혼부부 박지애·최광석씨는 결혼식 준비를 하던 중 블로그를 통해 콘셉트 사진관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이들은 보편적인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대신 개화기 콘셉트 사진을 선택해 결혼식 비용 부담을 줄였다고 한다.


▎명화사진관의 실내. 방금 촬영을 마친 고객과 포토그래퍼가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사진:명화사진관
박씨는 “솔직히 스드메를 하면 보통 100만원은 기본으로 드는데 너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며 “독특한 콘셉트로 촬영하는데도 가격이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아 훨씬 만족감이 높았다”고 말했다.

100년 전의 과거를 구현하기 위한 소품이나 의상들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젊은층에게 어필하는 지점이다. 사진관을 운영하는 대표들은 해당 소품들을 구하기 위해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밝혔다. 미국의 빈티지숍을 위주로 발품을 팔거나 중고제품을 거래하는 사이트에서 ‘보물찾기’ 하듯 소품을 뒤지는 일은 부지기수다.

박승진 덕구사진관 대표는 “콘셉트회의를 할 때 외국 영화를 자주 보면서 영감을 얻는다”며 “의상은 주로 미국이나 영국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아냈다”고 밝혔다. 한 의상 대여 업체 관계자는 홍콩을 수십 차례 방문했다고 말했다. 홍콩은 동양적 요소와 서양적 요소가 접목돼 있기 때문에 서양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했던 개화기 조선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대중적으로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국내에서는 전문 제작산업이 형성되지 않았고, 제품 수급에 어려움이 따른다.

국내에서 제품을 구할 수 있다고 해도 비용 문제가 뒤따른다. 광주에서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이대림 대표는 “비슷한 제품도 국내에서 사면 3~4배 정도 비싼 값을 치러야 한다”며 “오히려 항공비가 들더라도 해외에 나가 사오는 것이 더 낫다”고 말했다. 근대의 분위기를 자아내기 위해 필요한 영사기나 램프와 같은 소품들은 국내에서 단종되거나 손실 정도가 심해 해외로 찾아나서야 했다고 덧붙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억하게 하는 것이 중요”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의 한 장면. 서양식 의복을 갖춰 입은 남녀 주인공이 배경과 어우러져 구한말의 미감을 보여준다.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은 방영 초반 배우 유연석이 연기한 ‘구동매’가 실제 일본 극우 조직인 겐요샤와 흑룡회의 지부장으로 소개돼 친일 논란을 빚기도 했다. 의도가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적으로 봤을 때 친일을 미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한말을 배경으로 한 콘셉트 사진을 둘러싸고도 유사한 의견이 나왔다.

한국사를 전공하고 근대 역사 관련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학생 김모(25) 씨는 사진을 앞에 두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김씨는 “일제강점기에 저렇게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집에 살았을 사람 중에는 친일 행적을 한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라며 “비판적인 사고 없이 단순히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소비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되묻고 싶다”고 말했다. 김우필 문화평론가는 2015년 발표한 논문 ‘빈티지 속물주의에 빠진 대중매체 복고현상’에서 “눈앞에 있는 복고 트렌드가 과연 그 시대를 제대로 대표하고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져볼 것”을 강조했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권오건 명화사진관 감독은 “과거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그 시대를 몸으로 겪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진을 보는 것이 고통일 수 있겠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는 후세들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처음에는 촬영을 진행하면서 시각적으로 가볍게 비칠까 걱정을 했다”면서 “그래서 고객들에게 촬영 중에도 소품에 얽힌 이야기나 역사에 얽힌 얘기들을 공유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물론 젊은 층들이 일본풍 의상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이사라 산격동사진관 실장은 “커플 촬영 중 여성은 흰색 한복을 입고, 남성은 김구 선생을 연상시키는 동그란 뿔테 안경을 끼고 정장을 입고 왔다”며 “한 고객은 따로 태극기를 준비해와 사진을 찍기도 했다”고 밝혔다.

개화기 콘셉트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이들 콘셉트 스튜디오 간의 경쟁도 점점 뜨거워진다. 일반 사진관들도 인테리어나 소품들을 모방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사진관의 포토그래퍼는 “SNS를 통해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진을 공유하면서 이런 콘셉트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최근에 비슷한 성격의 사진관이 늘면서 우리만의 영역을 잃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밝혔다. 이에 노창현 건국대 언론홍보 대학원 교수는 “기억을 위시한 산업에서 콘텐트 생산의 가능성은 호기심의 여정이며, 상상력을 동원해 예측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구한말 역사를 다루는 사진관들은 기억산업의 한 사례며, 이들이 호기심을 발휘해 독창성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 글 이유림 월간중앙 인턴기자 lyl4198@naver.com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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