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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김영희 대기자의 ‘한반도 워치’]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의 한반도 

김정은·문재인 둘 다 바뀌어야 할 때 

金, 핵 완전 폐기라는 담대한 전략 갖고 트럼프 만나라
文, 미국 파워 엘리트 불신 해소하고 북·미간 접점 마련해야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이튿날인 2월 28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회담 도중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하노이 참사 이후 김정은이 앞으로 나갈 길을 찾아 방황하는 사이에 트럼프는 안보보좌관 존 볼턴의 일괄타결(빅딜) 안을 미국의 최종적인 대북(對北) 협상노선으로 결정했다. 트럼프가 강경파 볼턴에게 백기를 든 것이다. 단계적 해법을 고집하는 북한과의 입장 차는 더욱 벌어져 비핵화의 전망은 짙은 안개 속에 빠졌다. 자칫 2017년의 위기 국면으로 돌아갈 위험까지 암시된다. 김정은과 트럼프 두 사람 다 회담 재개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실에 실낱 같은 희망을 걸어본다.

트럼프는 작년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과 지난 2·28 하노이 2차 정상회담 기간 사이에 북한이 서해 미사일 발사 기지를 재건하고 영변 이외의 핵시설에서 6개 정도의 핵탄두를 만들었다는 보고를 정보수장들로부터 계속 받아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NYT, 3월 12일)

그러나 트럼프는 정보수장들에게 그런 정보를 비밀에 부치도록 지시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정통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했다. 북한이 폐쇄했다고 선전한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을 복구하는 위성사진이 속속 공개되고 있다. 김정은은 북한이 언제든지 핵·미사일 모라토리엄 실험을 해제하고 핵·미사일의 고도화를 위한 실험을 재개할 수 있다는 위협적인 메시지를 트럼프에게 보낸다.

대북제재 해제를 기대하고 갔던 하노이에서 빈손으로 귀국한 김정은은 인민들의 눈치를 살피는 처지가 됐다. 그가 경제를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그는 할아버지 김일성이 1962년, 아버지 김정일이 2010년 인민에게 한 약속인 쌀밥에 고깃국 주문(mantra)을 57년 만에 다시 들고 나와 인민들을 달래고 있다.

김정은 마주하던 트럼프, 마음은 워싱턴


▎트럼프 대통령이 2월 28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JW 메리어트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질문할 기자를 지목하고 있다. / 사진:AP/연합뉴스
그는 3월 6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전국 당 초급선전일꾼대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전체 인민이 흰쌀밥에 고깃국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하려는 것은 수령님과 장군님의 평생 염원”이라고 말했다. 그는 경제 발전과 인민생활 향상보다 더 절박한 혁명 임무는 없다“고 강조했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시설 복구·강화의 제스처와 인민생활 향상 절박성의 강조는 안으로는 인민을 다독이고 밖으로는 미국에 조속히 대화를 재개하자는 압박으로 해석된다.

트럼프의 사정도 나을 것이 없다. 그는 하노이에서 외교의 주도권을 사실상 자신의 안보보좌관 존 볼턴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하노이 이후 미국의 매체들은 트럼프 보다는 볼턴의 입을 더 주목한다. 볼턴은 악(evil)은 대화 상대가 아니라 파괴의 상대라는 신념을 가진 강경 네오콘이다. 하노이의 승리로 기세등등한 볼턴에 밀린 트럼프는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 회의론은 가짜라는 입장에서 한 발 물러섰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김정은과 트럼프가 집안 정리를 끝낼 때까지 북·미 대화 재개는 많은 시간과 진통이 예상된다.

먼저 하노이 회담의 실패를 돌아보자.

한반도 비핵·평화체제의 첫 사이클은 (1) 4·27 판문점 선언→(2)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3) 9·19 평양선언→(4) 2·28 하노이 선언→(5) 3~4월 중 김정은 서울 답방으로 그 첫 라운드가 완성될 것이었다. 이 긴 사이클 안에 남·북·미 종전선언, 남·북·미·중 평화협정,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 대북제재의 대폭완화 내지 전면해제가 들어갈 것이었기 때문에 한반도 평화의 고지를 향한 등산에서 8부 능선은 넘는 것이다.

이 목표에 이르는 방법에서 북한과 미국은 제재 해제 먼저 vs 핵·미사일 폐기 먼저, 단계적 동시적 타결 vs 일괄 타결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북·미 고위·실무급 협상은 이 입장 차를 좁혀 하노이에서 8개월 만에 두 번째 만나는 두 정상에게 제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한 사전 조율에 실패했다. 최종결단을 정상들에게 넘겼다.

70년의 적대국 수뇌들이 작년 6월에 싱가포르에서 만난 이후 불과 8개월 만에 2차 정상회담을 갖는 것은 그것 자체로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북·미 대화의 역사적인 진전이었다. 하노이 회담을 앞둔 분위기도 좋았다. 트럼프는 연일 김정은은 좋은 친구, 훌륭한 지도자, 북한은 경제 강국이 될 엄청남 잠재력을 가진 나라, 북한을 경제 강국으로 만드는데 미국은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김정은과 만날 날이 기다려진다는 말로 김정은 띄우기를 쉬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그게 다 역대급 딜 메이커의 흥정술있던 것 같지만 30대의 김정은의 가슴을 흥분(euphoria)으로 채우고, 그 흥분은 고위·실무급 의제 조율을 맡은 김영철·김혁철·최선희들에게 전염됐다. 그들은 방심했다. 김정은은 트럼프의 ‘선의’에 큰 기대를 갖고 장장 66시간 중국 대륙을 종단하는 열차를 달려 하노이로 갔다.

김정은이 중국 대륙을 관통하는 사이에 미국에서는 하노이 회담을 탈선(torpedo)시킬 조직적인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었다. 그러나 파괴력이 그 정도나 될 줄은 트럼프도, 문재인도 몰랐던 하원의 반(anti)트럼프 사육제를 김정은이 알 리가 없었다. 미국 측 협상 팀의 준비도 상식 이하로 허술했다. 비핵화와 제재 완화의 범위와 시간표는 고사하고 비핵화에 무엇이 들어갈 것인지도 분명히 합의하지 않았다. 외교사 일반, 특히 하노이 회담 같은 동북아시아 역사를 새로 쓰는 큰 외교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협상이었다. 이렇게 회담의 실패가 완벽하게 갖추어진 가운데 두 정상이 마주 앉았다.

북한의 이해할 수 없는 낙관론


▎존 볼턴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오른쪽)이 트럼프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 사진 : AP/연합뉴스
미국 의회의 트럼프 죽이기 정치 쇼가 하노이 회담을 덮쳤다. 언론과 여론의 안중에 하노이는 없었다. 당연히 김정은과 마주 앉은 트럼프의 마음은 워싱턴에 가 있었고, 그 틈을 비집고 노란 봉투를 들고 확대회의에 나타난 훼방꾼(spoiler)이 대북 강경론자, 정부 내 네오콘(neocon) 전사(warrior) 존 볼턴, 그 사람이었다. 단독회담까지 잘 나간다 싶던 김정은·트럼프 회담이 예상대로 볼턴이 배석한 확대회의에서 궤도를 이탈했다. 회담을 방해하고 트럼프에게 정치적인 상처를 입히는 데 민주당과 네오콘이 동맹을 맺은 것은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古史)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회담 결렬 원인은 이미 고갈적(exhaustively)으로, 광범위하게, 충분히 논의됐다. 여기서는 남·북·미에게 남은 선택을 검토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로 압축해 실패의 원인을 돌아보기로 한다.

첫째, 비핵화의 긴 여정에는 정거장(station)들이 많다. 종전선언이라는 정거장, 북한 핵·미사일 시설의 미국 전문가들 사찰·검증 하의 폐기·폐쇄라는 정거장, 대북 경제제재의 완화·해제라는 정거장, 북·미 연락사무소 개설이라는 정거장을 거쳐야 비로소 남·북·미·중 4개국에 의한 평화협정 체결과 북·미 관계 정상화라는 종착역에 도착할 수가 있다.

이 과정에는 두 가지가 필수적이다. 하나는 긴 여정 전체를 커버하는 로드맵이고, 둘은 비핵화의 범위와 내용에 관한 분명한 정의(definition)에 관한 합의다. 그러나 폼페이오와 김영철, 스티브 비건과 김혁철은 이 필수적인 두 가지의 한 가지에도 합의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그 내용도 애매한 포괄적인 비핵화 카드를 내밀고, 김정은은 미국이 전면해제 요구라고 오해한 제재의 부분 해제를 요구했다.

처음부터 제재해제와 비핵화의 단계적 동시적 이행을 요구한 김정은은 한 번도 포괄적 이행에 동의한 적이 없다. 트럼프도 북한이 비핵화하기 전에는 현 수준의 제재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굽힌 적이 없다. 회담이 결렬된 후 트럼프와 폼페이오는 기자회견에서 김정은이 제재의 전면적인 해제를 요구하여 들어줄 수 없어 회의장을 나왔다(walked out)고 주장했다.

북한이 즉각 반격했다. 외무상 리용호가 자정이 넘은 시간에 기자들을 불러 북한이 요구한 것은 유엔 결의에 의한 제재 11개 전부가 아니라 2016~17년에 채택된 5개 제재의 해제였다고 주장했다.

내용상으로는 쌍방의 주장이 맞다. 북한이 해제를 요구한 제재결의는 2270(2016. 3.), 2321(2016. 11.), 2371(2017. 8.), 2375(2017. 9.), 2397(2017. 12.)다. 2270은 4차 핵실험, 2321은 5차 핵실험, 2371은 탄도미사일 발사, 2375는 6차 핵실험, 2397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에 대한 국제사회의 응징적 조치였다. 이 다섯 개의 제재결의로 북한은 석탄·철·철광석·금·희토류·납·해산물을 수출할 수가 없다. 2017년 9월 6차 핵실험에 대한 제재 2375는 대북 원유 공급을 30%나 감축했다. 미국의 동부지역을 사정권에 둔 화성계열 ICBM을 발사해 미국 본토를 위협한 2017년 12월 채택된 제재결의 2397은 대북 원유 400만 배럴, 정제유 50만 배럴의 상한을 설정하고, 해외 파견 북한 노동자를 24개월 이내에 송환할 것을 명시했다.(차세현·정효식, [중앙일보] 3월 2일)

인체에 비유하면 이들 5개 제재 대상은 심장이요 뇌요 간이나 마찬가지다. 이 다섯 개의 제재를 해제하면 11개 제재 전체의 실질적인 효과가 사라진다. 북한이 유엔 제재를 동공(洞空)으로 만들 5개 제재 해제의 요구를 민수용의 부분 제재의 요구라는 이름으로 주장한 것은 이 다섯 개의 제재가 북한 경제, 인민들의 삶에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가장 잘 설명한다. 북한은 하노이에서 이런 주장을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얻는 것 없이 약점만 노출한 악수가 되었다. 미국이 그들 5개 제재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한 북한의 낙관론의 근거를 이해할 수가 없다.

‘모래성’ 회담, ‘영변 이외 핵시설’에 무너져


▎북한은 지난 3월 1일 새벽(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멜리아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북·미 2차 정상회담이 결렬된 데 대한 입장을 밝혔다. / 사진:연합뉴스
하노이에서 비핵화의 로드맵이 아예 없거나 어느 단계까지 합의할 것인가에 관한 고위ㆍ실무급의 사전조율이 없었기 때문에 존 볼턴이 노란 봉투 기습으로 회담의 막판 뒤집기를 할 수 있었다. 볼턴의 노란 봉투에 든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총체적인 대량살상무기(WMD) 폐기와 영변 이외 핵시설의 구체적인 적시에 김정은은 속수무책으로 기습을 당한 셈이다.

외무부상 최선희가 기자들에게 김정은 위원장이 협상에 의욕을 잃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실토한 것은 미국에 대한 압박을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다. 트럼프는 미국이 영변 이외 핵시설을 자세히 알고 있는데 북한이 놀라더라고도 말했다. 트럼프의 말이 사실이면 김정은은 핵·미사일 시설을 감추면 감추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북한 김영철과 김혁철은 미국 정보당국이 북한 전역에 산재한 북한 핵시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를 파악해 대책과 함께 김정은에게 미리 보고했어야 했다. 그들은 미국의 보수계 싱크탱크들이 잇달아 영변 이외 핵시설을 공개하고 선전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70년의 타성에 사고 회로가 녹슨 결과, 미국이 하는 일에 대한 불치의 고정관념 탓이었던 같다. 쌍방 플레이어들의 이런 엉성하고 성의 없는 회담 준비는 미국 내 반트럼프 세력들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트럼프와 김정은 모두 판을 깰 생각이 없는 것이다. 트럼프는 자신이 회담장을 퇴장(walk out)한 것이 아니고 회담을 외교적으로 끝냈다고 말했다. 다시 만날 문호를 열어둔다는 말이다. 폼페이오도 조만간 평양에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북한 측에서도 [노동신문]이 회담 결렬 다음날 하노이 회담이 대화 계속을 위한 생산적인 회담이었다고 논평을 했다. 미국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여실하다.

김정은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큰 도전이기도 하다. 북한에서 ‘최고 존엄’은 오류를 범하지 않는(infallible) 무오류(無誤謬)의 존재다. 그래서 북한 매체들은 하노이 참사 이후에도 회담 결렬이라는 말을 피하고 회담이 생산적이었다, 베트남 최고지도자와 유익한 회담을 했다는 보도만 되풀이 했다. 북ㆍ미 회담 직후 [노동신문]은 화려한 정상회담 화보로 지면을 도배질했다. 북·미 정상회담이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다는 기사가 [노동신문] 한 귀퉁이에 수줍게 등장한 것은 실패한 하노이 회담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김정은은 인민들에게 하노이 참사를 얼마나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의 대미(對美) 대화·협상 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

하노이 회담이 결렬되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빈약하지만 전파력이 강한 북한판 사회소통망(SNS)을 타고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아마도 북한의 선전 일꾼들은 미국의 눈치를 살피면서 비핵화와 제재해제에 대한 북한의 합리적인 요구를 거절하여 영명한 지도자 김정은 동지가 합의문에 서명하지 않았다고 물타기 궁량을 할 것이다. 김정은 자신은 경제 현장 지도의 횟수를 늘려 인민들의 눈을 경제로 돌릴 것이다.

김정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

그러나 김정은에게는 요술 방망이 같은 카드가 하나 있다. 영변·강선·분강 우라늄 농축시설의 자재를 이리 저리 옮기고, 건물을 변형시키고 정체불명의 자재를 실은 트럭을 출입 시키면서 미국에 시위를 하는 것이다. 김정은은 2019년 신년사에서 비핵화 협상이 잘 안되면 북한은 제3의 길을 가는 것을 고려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해 뒀다. 문제는 미국 내 네오콘들의 선동적인 주장과는 달리 김정은이 북·미 관계를 2017년의 상황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북한 스스로 네오콘의 함정에 빠지는 악수다.

김정은은 희망사항이 아니라 냉혹한 현실주의로 미국에 접근해야 한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부터 알고 회담전략을 다시 짜야 한다. 지금 같은 비상상황이 아니라면 김영철과 김혁철은 해임이나 숙청 대상이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하노이 회담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고, 그들을 대체할 경험이 풍부한 회담 일꾼도 없다. 김정은이 진지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고려해야 하는 것은 폐기할 핵무기, 핵물질의 범위와 목표지점까지 가는 촘촘한 로드맵이다. 로드맵이 만들어지면 트럼프도 굳이 일괄타결(big deal)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김정은 설득도 이 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김정은은 인민들에게 트럼프로부터 대가 없이 한·미 연합군사연습의 중단을 받아낸 것을 성과로 선전할 수가 있다.

김정은은 미국의 국내 정치가 싱가포르 때는 물론이고 하노이 직전에 비해서도 트럼프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반트럼프 세력의 감시 아래서 핵ㆍ미사일 협상에서 살라미 전술은 통하지 않게 됐다. 김정은은 경제 강국 북한을 시야에 두고 핵무기, 핵물질, 생화학무기, 단·중·장거리 미사일을 완전히 폐기할 시간표를 가지고 트럼프를 다시 만날 담대한 전략을 새로 짜야 한다. 하노이 참사가 김정은에게 요구하는 것은 경직된 북한식 틀을 벗어나 ‘상자 밖 사고’(outside the box thinking)를 하는 것이다. 지금의 김정은이야 말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think the unthinkable)하는 용기를 내야 한다.

욕심 많은 트럼프는 북한 비핵화와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ICBM을 폐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전임자들, 그 중에서도 버락 오바마가 북핵 해결에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그의 야망은 한반도를 비핵지대로 만든 위대한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노벨 평화상도 타고 싶다. 일본 총리 아베 신조에게 노벨 평화상 추천도 부탁하는 셀프 추천도 망설이지 않는다. 트럼프가 하노이 회담을 결렬로 성격 짓지 않고 대화 계속의 강한 의지를 거듭 밝히는 것은 고무적이다.

트럼프도 북한의 경제적인 번영을 약속하면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김정은 입장에서는 체제가 안전해야 경제적 번영도 누린다. 트럼프의 경제 번영 약속은 우리에게는 기시감(deja vu)가 있다. 이명박은 비핵·개방·3000이라는 공약으로 북한을 비핵과 개방으로 유도하려고 했다. 핵을 버리고 개방만 하라, 10년 안에 북한 개인소득을 3000달러로 만들어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상대의 자존심을 고려하지 않은 오만하고 무례한 제안이었으니 이명박 정부 시절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후퇴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타이밍도 나빴다. 그때는 김정일의 선군(先軍)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다.

트럼프에게 다행인 것은 김정은은 2017년 11월 화성-15의 성공적인 시험발사로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것이다. 김정은은 핵·경제 병진정책에서 핵을 내리고 2018년부터는 경제 재건에 집중하기로 노선을 전환한 것이다. 트럼프는 싱가포르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한 것을 자신의 중요한 업적으로 생각한다. 8개월 사이에 김정은을 두 번이나 만난 것은 북·미 관계에서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임에 틀림없다.

국내 정치의 족쇄로 운신의 폭이 좁은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의 개인 변호사였던 마이클 코언(왼쪽)이 2월 27일(현지시간) 미 하원 감독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했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북·미 상호불신이 여전히 완강한 환경에서 트럼프가 기대한 북한의 전면적인 비핵화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었다. 트럼프는 서둘지 않는다, 천천히 간다고 말하면서도 단칼에 고르디우스의 매듭 끊듯 일괄타결로 북핵문제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했다. 그 정도의 업적을 쌓아야 2020년 대선에서 재선을 장담하고 2019년의 노벨평화상을 탈 수가 있다고 계산했다. 그러나 김정은은 단계적 동시적 타결이라는 종래의 입장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트럼프는 국내 반대세력의 조직적인 방해 움직임이라는 복병을 만날 줄은 몰랐다. 그는 하노이에서 조금이라도 김정은에게 양보하는 것으로 비칠 합의를 할 수 없었다. 그의 안보보좌관 존 볼턴이 국내 반대세력을 대표해 감시의 눈을 부릅뜨고 회담을 좌초시킬 순간만 노리고 있었다. 반대세력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첫째 트럼프의 반(反)전통적인 널뛰기 외교 방식에 위기를 느끼는 정부와 재야 관료들, 둘째 북한의 비핵화는 대화를 통해서가 아니라 대북 선제공격 같은 물리적인 방법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네오콘들, 셋째 2020년 트럼프의 재선에 도움이 될 트럼프의 외교적 큰 성과를 막아야 하는 민주당, 넷째 북한 비핵화와 북·미 관계 정상화로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면 알짜배기 무기시장을 잃는 것을 경계하는 방산업체를 포함한 군·산·정복합체와 그들이 주는 연구 용역에 생존을 의존하는 싱크탱크들이다. 마지막의 군·산·정 복합체(Military-industrialpolitical Complex)는 1961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2기 8년의 임기를 마치고 물러나면서 한 유명한 고별연설에서 남긴 경고다. 그는 군·산까지만 말했는데 뒤에 정치가 추가됐다. “군산복합체가 미국 정치를 좌우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와 외교는 아이젠하워의 경고와는 반대방향으로 흘러간다.

폼페이오가 말한 대로 북한과 미국은 대화 재개를 시도할 것이다. 폼페이오는 특사를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간이 걸릴 것이다. 김정은이 하노이 후유증을 극복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미국의 특사 파견 이전에 한국의 중재가 활발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나 북·미 특사들이 다시 만난다고 해도 하노이에서 확인된 서로의 입장 차를 가지고는 생산적인 대화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를 예외로 인정하는 것까지 반대하는 경직된 태도를 유연하게 바꾸지 않고 대화 재개를 제안해도 북한에게는 끌리는 유인책이 되지 못한다. 트럼프는 줄 것과 받을 것, 주는 순서와 받는 순서를 명확히 하되 지금보다 훨씬 유연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영변 이외’도 반대 진영의 싱크탱크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하나씩 공개하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파악한 핵·미사일 시설과 기지들을 북한에 제시해 북한이 그것들을 전제로 한 회담전략을 짜도록 도와야 한다. 2002년 2차 핵 위기를 촉발한 농축우라늄 폭로 때처럼 깜짝쇼(surprise)는 회담의 촉매제가 아니라 파괴자가 될 뿐이다.

4월쯤에는 러시아의 미국 대선 개입 의혹에 관한 뮐러 조사보고서가 나온다. 내용은 트럼프에게 치명타가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의회는 반트럼프 청문회를 계속 열어 트럼프의 손발을 묶으려고 할 것이다. 트럼프의 외교활동의 공간은 확연히 좁아들 것이다. 민주당은 트럼프의 각종 비리를 폭로하는 청문회를 계속 열 것이다. 일련의 청문회와 뮐러 조사보고서를 묶어 탄핵정국을 만들어내려고 할 것이다.

문재인이 하노이 참사의 최대 피해자


▎문재인 대통령이 3월 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탄핵은 안 된다. 탄핵 재판을 하는 상원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핵 논란만 해도 트럼프에게는 부담스러운 감표 요인이 된다는 것이 민주당의 계산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위해서는 트럼프가 이런 정치공세에 몰리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트럼프는 반대 진영의 공세에서 입을 정치적 상처를 최소화하면서 탈선한 북·미 대화를 복원해야 하는 참으로 어려운 도전을 맞았다. 결과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북·미 협상이 언제, 어떻게 재개돼 어떤 성과를 낳을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북·미 2차 정상회담 결렬의 가장 큰 유탄은 서울의 청와대에 떨어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 회담이 북한 비핵화와 대북제재의 일부 완화에 성공하면 김정은을 서울에서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북 경제협력을 기본 축으로 신한반도체제의 비전을 만들었다. 이 비전에 따라 한국인은 한반도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꿈은 햇볕을 받은 아침 물안개처럼 사라졌다.

문 대통령은 태연을 가장했지만 하노이 회담의 결렬은 청천의 벽력이었다. 당장 남북경협에 제동이 걸린다. 더욱 강화될 대북제재로 경협에 필수적인 북으로의 최소한의 물자 이동도 일일이 미국의 예외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미국은 문재인 정부가 남북관계를 북·미 간의 비핵화 진전보다 너무 앞서간다고 불만이다. 미국의 가혹한 관료와 전문가들은 문 대통령이 국제사회에서 북한 입장을 과도하게 편든다고 평한다.

그러나 하노이발 위기는 문 대통령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귀국하는 전용기에서 문 대통령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어 대화 재개를 위해 중재에 나서달라고 요청했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불감청 고소원(不敢請 固所願)이다. 반드시 필요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다. 서둘러서도 안 되지만 시간이 많지도 않다. 내년은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해다. 반트럼프 세력의 조직적인 반대는 트럼프가 상상한 것 이상의 파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노이 회담 기간에 하원에서 열린 트럼프 청문회가 그 증거다.

러시아의 2016년 미국 대선 개입 의혹을 조사하는 뮐러 특검의 임박한 발표가 트럼프의 정치기반을 뒤흔들지도 모른다. 만의 하나 트럼프가 대선에 실패해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 2001년 조지 W. 부시 공화당 정부가 클린턴 정부의 모든 정책을 백지화한 민주당판 ABC(All But Clinton)가 재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ABC가 2차 핵위기를 촉발했다. 그렇게 되면 핵협상을 포함한 북·미 관계가 미국의 최대 압박 vs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재개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남북관계도 답보상태에 빠진 채 문 대통령의 임기가 끝날 것이다.

북·미 양쪽이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는 법


▎지난해 5월 26일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을 마친 뒤 헤어지며 손을 맞잡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중재에 올인할 결의를 밝혔다. 문자 그대로 혼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기회는 날아간다. 중재의 첫걸음은 문재인 정부, 더 구체적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미국 파워 엘리트들의 불신을 해소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 북한의 입장만 두둔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미국은 설득 당하지 않는다. 동시에 문 대통령은 활발한 남북한의 고위급 접촉을 통해서 판문점에서라도 김정은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김정은은 올 신년사에서 북·미 협상이 잘 안되면 북한은 제3의 길을 가야할지도 모른다고 위협했다. 그것은 하노이 회담을 앞둔 협상 레버리지 강화용으로 해석됐다. 그러나 존 볼턴들이 주도하는 미국의 대북 강경파들이 경고하고 기대하는 대로 북한이 실제로 영변 이외 시설에서 플루토늄 재처리와 고농축 우라늄 생산을 재개하면 사태는 내리막길을 구를 것이다. 2017년 하반기에 절정에 달했던 ‘코피작전’을 포함한 대북 선제공격의 옵션이 다시 테이블 위에 오를 것이다. 북한의 핵 활동을 “눈도 안 깜박이고 지켜보겠다”는 볼턴의 말을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아쉬운 것은 볼턴의 카운터파트인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의 볼턴 접촉이 사태의 중대성에 비춰 너무 저조한 것이다. 이쯤 되면 정의용과 볼턴은 전화에 매달려 있어야 하는데 정의용의 활동에 ‘특례’가 안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 화학적 친분(chemistry)이 없기 때문이다. 정의용은 거칠고 전투적인 볼턴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외교적이고 교과서적이다. 강경화-폼페이오 라인의 경우는 두 사람이 가진 정보의 불균형이 문제다. 폼페이오의 북한 카운터파트는 당 부위원장 겸 통전부장 김영철이다. 강경화 장관은 국정원과 청와대가 제공하는 한정된 정보를 가지고 폼페이오를 상대하기가 버겁다. 거기다 폼페이오 자신이 하노이 이후 볼턴에게 밀리는 처지다.

그래서 결국 귀결되는 것이 문재인과 김정은 회담이다. 두 사람은 세 번의 만남을 통해서 개인적인 친분도 쌓을 만큼 쌓았다. 그러나 거듭 강조한다. 미국과의 충분한 사전협의가 필수적이다. 그래야 김정은도 문 대통령을 통해서 트럼프의 생각을 읽으려고 할 것이고 트럼프도 김정은의 의도를 문 대통령을 통해서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북·미 양쪽에서 동시에 필요로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중재의 성공의 요체다. 김정은과 트럼프 두 사람 다 판을 깰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미국 국내 사정이 트럼프의 손발을 묶기 전에 북·미 협상을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 하노이 회담의 실패로 문 대통령이 떠안은 도전은 이렇게 무겁다. 문 대통령은 미국의 일괄타결안과 북한의 단계적 비핵화안의 접점을 찾는데 인간적으로 상상 가능한 지혜를 짜내야하는 무거운 짐을 졌다. 그러나 역사상 만인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해 낸 위인들은 많다. 문 대통령은 역사 속에서 길을 찾아보기를 권한다.

※ 김영희 중앙일보 명예 대기자 - 1958년 22세 나이로 언론계에 첫발을 디딘 필자는 82세가 된 지금까지 현장을 누비는 영원한 기자의 길을 걷고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 임원 등을 거치고 최근까지도 중앙일보 대기자 및 칼럼리스트로 활동했다. 외교·안보·국제 뉴스의 한 우물을 판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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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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