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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사랑으로 재해석한 한국사(15)] 바람난 남편이 부른 여성 잔혹사, 어우동 스캔들 

왜곡된 성도덕에 희생된 조선판 자유부인 

첩에 빠진 남편에게 소박 맞고, 이혼도 재가도 못한 아내의 ‘반란’
법이 정한 형벌은 곤장·유배, 유교 통치체제 다지려 교수형 처해


▎1985년에 개봉됐던 영화 [어우동]에서 어우동 역을 맡은 배우 이보희.
"태강수 이동이 기생 연경비를 매우 사랑해 그 아내 박씨를 버렸습니다. 종친이 첩을 사랑한 나머지 아내의 허물을 들춰 제멋대로 쫓아낸 것입니다. 한 번 선례를 남기면 앞으로 이런 폐단을 막기 어렵습니다. 청컨대 박씨와 다시 결합하게 하고, 이동의 죄는 성상께서 옳고 그름을 가려서 결정하소서.”

1476년 9월 5일 종부시(宗簿寺)에서 성종 임금에게 아뢰어 효령대군의 손자 이동을 탄핵했다. 효령대군이 세종대왕의 작은형이니 이동은 성종의 7촌 재당숙이었다. 종부시는 왕실 족보를 관리하면서 종친의 허물을 살피는 관아였다. 탄핵 사유는 이동이 기생첩에게 푹 빠져 아내 박씨를 버렸다는 것이다. 부인을 쫓아내기 위해 그는 치사하게 허물을 들췄다. 박씨 부인의 허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지승문원사 박윤창의 딸로 집안이 부유하고 용모도 아리따워 장안의 일등 신붓감으로 꼽혔다. 효령대군 가문은 임금과 가까운 인척이고 명망이 높았다. 잘나가는 종친과의 결혼으로 박씨 부인은 정4품 혜인(惠人)에 봉작되며 귀하신 몸이 됐다. 하지만 부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남편 이동이 기생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동이 들춘 아내의 허물은 낯뜨거운 것이었다. 어느 날 박씨 부인이 젊고 훤칠한 장인(匠人)을 집으로 불러 은그릇을 만들게 했다. 남편이 출타하면 계집종의 옷으로 갈아입고 장인의 옆에 앉아 노닥거렸다. 그릇 만드는 솜씨를 칭찬하며 친근하게 굴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부인은 장인을 유혹해 내실로 끌어들이고 음탕한 짓을 벌였다(성현, [용재총화]).

결국 박씨 부인은 소박을 맞았다. 음탕한 짓은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였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기에 충분한 사유였다. 그러나 종부시에서는 박씨의 행실보다 이동의 비행에 무게를 두었다. 낯뜨거운 허물은 어쩌면 본처를 내쫓기 위한 모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종부시는 억울한 소박을 우려하며 부부의 재결합과 이동의 처벌을 임금에게 요청했다.

성종은 종부시의 탄핵을 받아들였다. 태강수 이동의 고신(告身), 곧 관직 임명장을 거두고 아내 박씨와 다시 합치라고 명했다. 하지만 청년 군주는 석 달 만에 빼앗은 관직을 돌려줬다. 그해 20세가 된 성종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에서 벗어나 이제 막 친정(親政)에 나섰다. 당면 과제는 임금 위에 군림하는 훈구대신들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종친들의 지원 사격이 절실했다. 성종이 숙부뻘인 이동을 관대하게 처분한 이유다.

종부시의 탄핵은 힘을 잃었다. 이동은 박씨와 재결합하라는 명 또한 유야무야 뭉개버렸다. 억울하게 소박맞은 여인만 불쌍하게 됐다. 소박은 이혼과 다르다. 사실상 남편과 헤어졌지만 법적으로는 여전히 아내였다. 새 인생을 살 수도, 부부 생활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차라리 이혼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남편이 3년 이상 행방불명되거나 친정 식구들을 해치지 않는 한 재가하기가 어려웠다.

박씨 부인의 처지는 갑갑했다. 자유분방한 기질과 억울한 심정이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더니 뜨거운 갈망이 끓어올랐다. 속 깊은 곳에 웅크린 또 하나의 자아가 꿈틀꿈틀 기지개를 켰다. ‘조선판 자유부인’ 어우동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기생·첩·과부 행세한 왕실 종친의 아내


▎2015년 개봉된 영화 [어우동: 주인 없는 꽃]의 한 장면.
‘어우동(於于同)’은 그녀의 별명이었다. ‘어울려서 통한다’ 또는 ‘함께 어울린다’는 뜻이다. [성종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고 쓰기도 했다.

‘이혼녀 아닌 이혼녀’가 된 부인은 길가에 집을 얻고 몸종과 함께 행인들을 품평하며 소일했다. “저자는 힘이 좋으니 내가 취하고, 저자는 나이 젊으니 너에게 맡기리라.” 그러더니 여종을 꽃단장해 거리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충성스러운 종은 잘생긴 청년을 유혹해 집에 데려왔다. 박씨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꽃 피고 달 밝은 저녁이면 변장하고 몸종과 함께 도성 안을 돌아다녔다. 몰래 어울려서 통하고 새벽에 돌아왔다(성현, [용재총화]).

이윽고 화류계에 은밀한 소문이 퍼졌다. 장안의 호색한들이 앞다퉈 몰려들었다. 어우동은 거침없이 어울리고 끼를 발산했다. 정욕을 숨기지 않았다. 단, 정체는 숨겼다. 별명을 사용하고 기생, 내금위 무관의 첩, 과부로 행세했다. 간통죄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에는 기혼녀의 외도뿐 아니라 처녀의 혼전 성관계도 간통죄로 처벌받았다. 형벌은 [대명률(大明律)](중국 명나라 대법전)을 적용했는데 화간(서로 좋아서 간통함)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였다. 이 조항은 여자의 간통을 다룬 것이다. 남자의 간통은 가정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지배층 남성의 축첩(畜妾)이 성행한 이유다.

어우동은 마침내 꼬리를 밟히고 말았다. 방산수 이난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물의를 일으켰다. 이난은 젊고 호탕한 종친으로 박씨와 부부처럼 지냈다. 사모의 정을 담아 연시를 짓기도 했다. 하루는 그가 집에 와보니 어우동이 마침 봄놀이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방 안에 앉아 있는데 벽에 걸린 소매 붉은 적삼이 눈에 밟혔다.

물시계는 똑똑똑 밤 기운 청아한데(玉漏丁東夜氣淸)
흰 구름 활짝 걷히니 달빛 환해라(白雲高捲月分明)
고요한 빈 방에 향기가 남아 있어(間房寂謐餘香在)
오늘도 꿈에 그리운 정 그려 보오(可寫如今夢裏情) -성현, [용재총화]-

빈방에서 연인의 향기를 맡고 꿈속의 정을 그리는 연심이 얼마나 지극한가. 하지만 그 사랑은 지독한 불륜극이었다. 방산수 이난은 세종의 서손자였다. 태강수 이동과는 육촌 형제간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형수를 건드린 것이다. 다른 집안도 아닌 왕가에서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일이 벌어졌다. 이 불륜극이 옥사(獄事)의 방아쇠를 당겼다.

어우동 사건이 조정을 발칵 뒤집은 것은 1480년 6월 13일이었다. 성종은 “방산수 난이 태강수 동이 버린 아내 박씨와 간통했으니, 국문해 아뢰라”고 의금부에 명했다. 이틀 뒤에는 “도망친 박씨를 끝까지 추포하라”는 어명이 이어졌다. 왕실의 위엄이 땅에 떨어졌다. 엄한 조사와 처벌이 불가피했다.

어우동은 곧 감옥에 갇혔다. 그녀의 입에서 정을 통한 간부(姦夫)들의 이름이 술술 나왔다. 장안의 호색한들이 굴비 엮듯이 끌려왔다. 무려 수십 명이었다. 그녀는 지체 높은 종친의 아내였지만 남자의 신분을 가리지 않았다. 왕족·대신·유생·서리·양인·노비가 그녀의 치마 속에서는 모두 평등했다. ‘동등하게 어울린다’고 해서 ‘어우동’인가.

어우동의 남자들은 의금부·형조·한성부로 나뉘어 심문을 당했다. 종친 수산수 이기는 단오날 그네뛰기 구경하는 박씨에게 접근해 남양(화성) 경저(서울사무소)에서 정을 통했다. 춘양군(효령대군 손자)의 사위 이승언은 길을 지나가는 어우동을 보고 집까지 따라가 기어코 동침했다. 옆집 살던 내금위 구전은 박씨가 정원에 나오자 담을 뛰어넘어 간통했다. 그들은 어우동을 탐내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어우동이 정을 준 사내들도 있었다. 성균관 학록 홍찬은 과거에 급제해 풍악을 울리며 거리를 돌 때 어우동의 눈에 들었다. 뒤에 길에서 만나자 그녀는 소매로 얼굴을 슬쩍 건드려 그의 마음을 빼앗았다. 전의감(의약 관장 부서) 생도 박강창도 종을 팔려고 집에 찾아갔다가 여주인의 낙점을 받았다. 어우동은 정을 준 사내들의 몸에 먹으로 제 이름 새기는 것을 즐겼다. 박강창과 이난은 팔뚝에, 서리 감의향은 등에 정표를 남겼다.

때로는 성범죄에 노출되기도 했다. 지거비는 밀성군의 종으로 이웃에 살았다. 어느 날 새벽에 외출하는 어우동의 앞을 그가 가로막았다. 밀성군은 세종의 서자였고, 그 종은 어우동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거비는 자기가 떠들면 부인의 행실이 널리 알려지고 큰 옥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했다. 박씨는 두려워서 노비를 안으로 불러들였다([성종실록] 1480년 10월 18일).

간통한 남자는 대부분 어우동이 기생·첩·과부인 줄 알았다며 관행의 범위 내에서 발뺌하기 바빴다. 그들은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곤장 맞고 유배 가는 등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사내들은 1~2년 안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복귀했다. 애초 간통을 입증할 수 없다며 죄를 면한 자들도 수두룩했다. 어우동을 겁박한 종 지거비만 노역형을 받았다가 죄가 더해져 변방으로 떠났다.

간통한 남자들은 1~2년 뒤 ‘원대 복귀’


▎배우 이보희 주연 [어우동]의 한 장면.
그럼 어우동의 죄는 어떻게 처결했을까? 1480년 9월 2일 의금부에서는 그녀에게 적용할 율(律)이 곤장 100대와 유배 2000리라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하지만 도승지 김계창 등 사림 관료들은 극형을 주장했다. 어우동이 종친의 아내로서 친척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음탕한 짓을 저질러 강상(綱常), 곧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어겼다는 것이다. 성종은 사림의 손을 들어줬다. 의금부는 왕의 뜻에 따라 최종안을 작성해 올렸다.

“태강수 이동의 아내였던 어을우동이 간통한 죄는 [대명률]의 ‘남편을 배반하고 도망해 바로 개가(改嫁)한 것’에 비길 수 있습니다. 이는 ‘교부대시(絞不待時, 대기 없이 바로 목매달아 죽임)’에 해당합니다.”

성종은 다시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영의정 정창손을 비롯한 훈구파가 반론을 폈다. “태형이나 장형의 죄는 비슷한 법 조항을 끌어와 적용할 수 있으나 사형은 불가합니다. 이것은 ‘율(律) 밖의 형벌’입니다. 어찌 후세에 법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어을우동이 비록 죽일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임금은 살리는 것으로 덕을 쌓아야 합니다.”

폐비 윤씨에게 사약 내린 성종, 풍속 교화에 엄격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인수대비 역을 맡은 배우 채시라.
사림이 유교 종법과 신분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일벌백계가 필요하다는 입장인 반면, 훈구파는 올바른 법률을 적용해야지 다른 법 조항에 비겨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논리였다. 비록 태종 때 승지 윤수의 처와 세종 때 관찰사 이귀산의 처를 예외적으로 극형에 처했지만 그 외에는 간통했다고 해서 죽인 판례가 없었다. ‘율 밖의 형벌’은 나랏일의 일관성을 해치기 때문이다. 자 이제 공은 임금에게 넘어갔다. 성종은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지금 풍속이 아름답지 못해 여자들이 음탕한 짓을 많이 저지른다. 형벌하는 까닭은 교화를 돕고자 함이다. 어을우동의 음행을 엄히 징계해 고려 말의 음란한 풍속이 되살아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극형에 처함이 옳다.” ([성종실록] 1480년 10월 18일)

어우동은 그날부로 군기감 앞에서 처형됐다. 음행의 본보기로 목 매달린 것이다. 앞서 그녀의 어머니 정씨 부인은 국문장에서 이렇게 부르짖었다. “사람이 누군들 정욕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리학은 정욕을 억누르고 절의를 추구했다. 성종은 [경국대전] 편찬을 마무리하고 유교 통치 체제를 완성하고자 했다. 절의를 숭상하는 유교 규범으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바로 잡으려면 정욕의 화신 어우동을 엄히 징계해야 했다.

하지만 역사는 꼭 거창한 명분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다. 때로는 사사로운 감정이 개입해 역사의 물길을 바꾸기도 한다. 어우동에 대한 처형(1480년)은 성종이 부부 싸움 끝에 폐비 윤씨를 쫓아내고(1479년) 사약을 내려 죽이는(1482년) 와중에 벌어졌다. 20대 한창 나이의 임금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한 2살 연상의 왕비! 이 불행한 부부 관계가 어우동의 운명과 조선 여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1469년 11월 28일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왕위를 물려받은 인물은 놀랍게도 13살의 조카 이혈이었다. 조선 9대 임금 성종이다. 자을산군 이혈은 세조의 요절한 맏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었다. 예종의 원자도 있고, 친형 월산군도 있어서 원래는 보위에 오를 순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원자가 어리고(4세), 월산군은 병약하다며 자을산군을 후계자로 지목했다. 물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혈이 훈구파 거목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이다.

어린 임금은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생모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치마폭에 싸여 국왕 수업을 받았다. 나랏일은 훈구 대신들이 승정원에 출근하며 사사건건 간섭했는데, 할머니 정희왕후의 노련한 수렴청정 덕에 무난하게 굴러갔다. 왕은 아침·점심·저녁 하루 세 차례 경연도 모자라 한밤중에 자문관을 불러 야대(夜對)까지 행하며 경전과 역사를 파고들고 국정에 관해 토론했다. 이혈은 모범생 임금으로 성장했다.

1476년 20세가 돼 친정에 나선 성종은 선비의 언로를 열며 유교 통치를 꽃피웠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유학자 임금의 포부를 펼쳤다. 문제는 왕의 여자였다. 공혜왕후 한씨는 2년 전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죽었다. 성종은 대비들의 뜻을 받들어 공석이 된 왕비 자리를 임신 중인 후궁에게 내줬다. 이 여인이 바로 폐비 윤씨요, 태어난 아이가 폭군 연산이다.

부부관계 불행했던 왕, 정절 법제화로 여성 옭아매


▎JTBC 사극 [인수대비]에서 폐비 윤씨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전혜빈.
성종과 새 왕비는 부부 싸움이 잦았다. 여기에는 이혈의 여성 편력이 한몫했다. 젊은 왕은 출근하면 유교 통치 체제를 정비하느라 바빴고, 퇴근 후에는 자식 생산에 열과 성을 다했다. 재위 중 3명의 왕비와 9명의 후궁에게서 아들 16명과 딸 12명을 봤을 정도다. 왕비 윤씨는 성종을 들볶았다.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기도 했다. 유학자 임금은 아내가 투기에 눈이 멀어 방자하게 군다며 격분했다.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1477년 결국 사달이 나고 말았다. 왕비의 방에서 주머니에 든 비상과 저주를 거는 서책이 나온 것이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임금은 위험한 윤씨를 당장 쫓아내려고 했다. 신하들은 어린 원자(연산군)를 생각해 국모를 용서해달라고 간청했다. 이 사건은 여종에게 책임을 묻는 선에서 매듭지어졌다. 그러나 2년 후 성종은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번에는 단단히 작심한 듯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왕비를 폐해 사가로 쫓아냈다.

“일전에 내가 후궁의 방에 있는데 중전이 불쑥 난입했다. 지난날의 행실을 고치기는커녕 나를 능멸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성종실록] 1479년 6월 2일)

폐비 윤씨가 사가에 머물자 민심이 술렁거렸다. 백성들은 남편에게 쫓겨난 아내를 동정하기 마련이다. 연산군의 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자 신하들도 생모 윤씨를 싸고돌았다. 심지어 사가에 출입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이 윤씨의 수명을 단축하게 했다. 1482년 8월 16일 왕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폐비에게 사약을 내렸다. 원자의 생모를 왜 죽여야만 했을까?

“폐비가 흉하고 간사한 성질로 국권을 잡으면, 원자가 아무리 현명해도 소용없다. 한나라 여후와 당나라 무후의 화를 입을까 봐 섬뜩하다. 한무제는 후사를 위해 죄 없는 구익부인을 죽였는데 폐비는 용서 못 할 죄까지 있다.”(이긍익, [연려실기술] ‘성종조고사본말’)

이 전지(왕명서)를 살펴보면 성종의 근심이 무엇이었는지 읽힌다. 그는 폐비 윤씨가 어린 아들을 끼고 국권을 잡을까 봐 우려했다. 이미 왕비 시절에 “발자취까지 없애버리겠다(欲幷其足跡而去之也)”며 임금을 협박한 여인이다. 발자취, 곧 족적은 왕의 업적을 뜻한다. 내 아들이 즉위하면 남편, 너의 업적을 지워버리겠다는 뜻이다. 성종이 심혈을 기울여온 유교 통치 체제가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무제는 말년에 얻은 황자 불릉을 후계자로 삼고자 생모 구익부인에게 자결을 명했다. 조선 성종은 이 고사를 인용하며 폐비의 목숨을 거뒀다. 단지 쫓아내서 죽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나라이든 집안이든 윤씨와 같은 여성이 출현하는 것을 경계했다. 정절을 법제화해 여성의 삶을 삼종지도에 끌어맨 것도 그래서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여성의 으뜸 가치는 ‘정절(貞節)’이었다. ‘정(貞)’은 육체와 정신의 순결을 뜻한다. 몸은 물론 마음마저 떳떳해야 한다. ‘절(節)’은 남편과 가문에 신의를 지키는 것이다. 그것은 여성의 성(性)을 넘어 일생을 통제한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받들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따르며, 늙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하는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삶이다.

삶과 사랑 주도하려 했던 여인, 열녀문에 목 매단 조선


▎충남 예산에 있는 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열녀문(홍문). 절부는 죽어서 열녀문을 남겼다.
성종은 유교 통치 체제의 일환으로 정절을 법제화하려고 했다. 왕이 표적으로 삼은 풍속은 ‘재가(再嫁)’였다. 성종은 한 번 결혼한 여성이 다른 남자와 재혼하면 정절을 잃는 것이라고 봤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남편을 바꾸지 않는 법이다(사마천, [사기] ‘전단열전’).

1477년 7월 17일 왕은 부녀자의 재가를 금하는 방안을 토론에 부쳤다. 대소신료들의 의견이 모이자 예조에 명을 내렸다. 재가해 정절을 잃은 여자의 자손은 관직에 등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재가녀자손금고법’이 공표된 것은 [경국대전]이 완성되던 1485년의 일이었다. 풍속에 관한 일이었기에 민심을 살피고 널리 알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때 어우동 간통 사건이 큰 역할을 했다. 성종이 어우동을 처형함으로써 정절이 화두로 떠올랐고 ‘재가녀자손금고법’도 회자됐다. 이후 주자학·향약 등의 확산으로 부녀자의 수절(守節)은 사회적 의무로 자리 잡았다. 세상을 떠난 남편을 따라 자결하는 절부(節婦)들도 쏟아져 나왔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겼고, 절부는 죽어서 열녀문을 남겼다.

어우동은 바로 그 열녀문에 목 매달린 정절의 희생양이었다. 사실 그녀는 바람난 남편에게 소박맞고 각성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삶과 사랑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했을 뿐이다. 오히려 성에 대한 이중잣대야말로 위선이자 모순이 아닌가. 성현의 [용재총화]에 재미있는 일화가 실려 있다.

수원의 한 기생이 손님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다. 기생이 사람들에게 하소연했다. “어우동은 음탕한 짓을 좋아했다고 벌을 받았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고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리도 다르단 말이오?” 듣는 사람들이 모두 합당한 말이라고 여겼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사람을 읽고 생각하고 쓰면서 역사의 행간을 채워나간다. 팟캐스트·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2015) 등을 썼다.

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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