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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3)] ‘조의제문(弔義帝文)’ 지은 점필재 김종직 

문장으로 도학 다시 일으킨 사림의 종장 

길재 학문 이어받아 김굉필·정여창 등 불세출 제자 양성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부관참시, 중종반정 뒤 명예회복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18대 종손인 김진규 씨가 경북 고령군 개실마을 종택 사랑채에서 선조를 회고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정축(丁丑) 10월. 내가 밀양에서 출발해 성주를 지나는 길에 답계역(踏溪驛)에서 묵었다. 꿈에 한 신인(神人)이 칠장복(七章服)을 입고 훤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인데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項羽)에게 살해되어 침(郴) 땅의 강에 잠겨 있다’ 말하곤 홀연히 사라졌다. 내가 꿈에서 깨어 놀라고 의아하여 (…) 역사를 상고해도 강물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혹시 항우가 사람을 보내 그를 비밀리에 시해하고 시신을 강물에 던진 것인가. 이것은 알 수가 없구나. 마침내 글을 지어 그를 조위(弔慰)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필화(筆禍) 사건’이 된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이렇게 시작된다. 항우에게 시해 당한 중국 초나라 의제(義帝)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다. 이 글은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그대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이 지었다. 여기서 정축은 1457년(세조 3) 그의 나이 27세 시기다. 점필재는 그해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초나라 의제에 비유하며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판했다.

4월 18일 김종직 선생의 흔적을 찾아 경북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개실마을 종택을 찾았다. 개실마을은 선산 김씨 60여 호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마을 앞 접무봉은 개실의 뜻 ‘개화실(開花谷)’ 그대로 봄꽃이 만발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에 ‘문충세가(文忠世家)’ 편액이 걸려 있다. 주인 김진규 씨가 두루마기 차림으로 나왔다. 점필재의 18대 종손이다. 그는 서울에서 의류사업을 하느라 바쁜 일정이지만 내려왔다.

사랑방 벽면에 해서체 조의제문 전문이 걸려 있다. 종손이 간략히 소개했다. ‘정축 시월~’로 시작하는 서문 3행에 이어 본문 부(賦)가 나온다. “하늘이 만물의 법칙을 마련하여 주셨으니/ 누가 사대(四大, 天地君親) 오상(五常, 仁義禮智信)을 높일 줄 모르리/ 중화에 풍부하고 이족(夷族)에겐 인색한 바 아니거늘/ 어찌 옛적에만 있고 지금은 없을 손가/ 그러기에 나는 동이 사람으로 천년 뒤에 태어나/ 삼가 초나라 회왕(의제)을 애도하노라….”

조의제문이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했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알려졌다. 점필재의 제자 김일손·권오복 등은 그 전문을 연산군 시기 사초(史草)에 올리고 “충분(忠憤)의 마음을 담았다”고 쓴 것이다. 이것이 류자광에 의해 구절마다 해석이 붙여지며 점필재의 제자들은 능지처참 등을 당했다. 무오사화다. 점필재는 사후 6년 만에 부관참시를 당한다. 가산은 몰수되고 아들 김숭년은 13세로 어려 겨우 화를 면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시기 신진사류(新進士類)로부터 부도덕으로 지탄받던 훈구 대신들이 점필재의 명망을 시샘하고 폭군의 폭정에 영합한 사건이었다.

제자들에게 '소학'을 먼저 가르치다


조의제문을 살핀 뒤 점필재란 아호가 궁금했다. 종손은 [예기(禮記)] ‘학기(學記)’편의 ‘신기점필(呻其佔畢)’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점(佔)’은 엿본다는 뜻이다. 책을 읽기만 하고 깊은 뜻에 통달하지 못하는 자세를 경계한 것이다. 종손과 함께 먼저 대가야박물관에 들렀다. 종택에서 북쪽으로 8㎞쯤 떨어진 곳이다. 그곳에 맡겨 둔 점필재의 유물을 보기 위해서다. 종택은 그동안 두 차례에 걸쳐 전해 내려온 관직 임명장인 교지(敎旨)와 벼루 등 유품, 분재기 등 고문서, 서책 등 1100여 점을 기탁했다. 그 중 임진왜란 이전 교지 등 79점은 보물(1725호)로 지정됐다. 손정미 학예연구사의 안내로 박물관 지하 수장고로 들어갔다. 유물 중 선생이 쓴 ‘당후일기(堂后日記)’와 편지글, 영의정 증직 교지 등을 볼 수 있었다. 옥 벼루 등 유품은 선생의 손길이 느껴졌고, 가로 114㎝ 큼지막한 증직 교지는 글씨 등이 유려하고 보관 상태도 좋았다.

점필재는 조의제문을 지은 비판적 지식인으로 후세에 각인돼 있지만, 이는 한 단면에 가깝다. 그의 진면목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도학(道學)을 계승해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조위 등 불세출의 제자를 양성하고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일컬어진 점에 있다. 또 빼어난 문장가였다. 김종직은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물려받는다. 김숙자의 스승은 길재다. 길재는 향리 자제에게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는 일상 범절 등 사람의 도리를 깨우치는 [소학]을 먼저 가르쳤다. 김숙자 역시 그렇게 가르쳤다. 점필재도 같은 방식으로 후학을 길렀다. 그렇게 시작된 조선의 도학은 점차 사대부의 주류 사상으로 자리 잡아갔다.

점필재는 1431년(세종 13) 밀양에서 태어났다. 그 윗대는 선산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김숙자가 문과에 급제하며 비로소 사대부 가문이 됐다. 아버지는 처가가 있던 밀양으로 이주하면서 점필재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는 여섯 살에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소학] [효경]과 사서오경을 거쳐 역사와 백가를 섭렵했다. 생전에 교류가 많았던 홍귀달은 신도비에서 점필재가 어린 시절부터 시를 잘한다는 명성을 얻었다고 썼다. 그는 매일 수만 마디 시문을 지었고 약관이 되기 전에 벌써 문명(文名)을 떨쳤다고 한다. 2015년 부산대 점필재연구소가 펴낸 5권짜리 [역주 점필재집]을 봐도 그 중 4권이 시집(詩集)이다.

조선5현 김굉필은 스승과 갈라섰나


▎종택 사랑방에 걸린 ‘조의제문’ 전문(全文)을 쓴 액자. / 사진:송의호
점필재는 16세에 과거에 응시해 ‘백룡부(白龍賦)’를 짓는다. 대제학 김수온이 답안지를 나눠주다가 점필재의 글을 읽고 “이는 뒷날 문형(文衡)을 잡을 솜씨인데 낙방한 게 애석하다”며 세종에게 아뢰었다. 세종이 이를 보고 기특히 여겨 영산훈도로 임명했다고 한다. 점필재는 26세엔 부친상으로 3년 묘소를 지킨 뒤 1459년(세조 5) 29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조의제문을 쓴 2년 뒤다. 이후 그는 대과에 급제한 뒤 사헌부 감찰이 됐는데 1464년 파직된다. 임금 앞에서 문신들에게 잡학을 배우게 한 조치를 비판한 때문이다. 그러나 8개월 뒤 복직돼 경상도병마평사를 거쳐 홍문관 교리가 됐고, 세조와 예종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면서 경연을 여는 등 인정받는다.

그러면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어떻게 후학을 양성할 수 있었을까. 그 무렵 점필재는 일흔이 넘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관을 자청한다. 그래서 함양군수 5년 선산부사 4년을 이어 지낸다. 그는 고을을 다스리며 학문을 일으키고 인재를 기르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데 힘썼다. 사방에서 학도들이 모여들었다. 김종직이 [소학]을 중시하는 가르침은 새로운 기풍이 된다. 제자 정여창·김굉필은 도학으로 영남 사림의 기틀을 마련한다. 훗날 두 사람은 명예의 전당인 ‘조선 5현’의 자리에 오른다. 김굉필은 특히 스승으로부터 [소학]공부가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고는 “글을 배우면서 천기를 몰랐으나 [소학]을 통해 지난날 잘못을 깨달았다”며 평생 ‘소학동자’를 자처했다.

김종직, 김굉필과 관련해 회자되는 이야기 하나. 김굉필은 후일 스승과 소원해졌다고 한다. 이른바 ‘결별’ 사건이다. 점필재의 제자인 남효온의 [사우록(師友錄)]에 기록이 나온다. “점필재가 이조참판이 되었으나 조정에 건의하는 일이 없자 김굉필이 시를 지어 올렸다. ‘도(道)란 겨울에 갖옷을 입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는 것입니다 (…)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말 것이니, 소는 밭을 갈고 말은 사람이 타는 것이라 한들 누가 믿겠습니까?’ 선생이 화답했다. ‘분수 밖에 벼슬이 높은 지위에 이르렀건만, 임금을 바르게 하고 세속을 구제하는 일이야 내가 어떻게 해낼 수 있으랴. 후배들이 못났다고 조롱하는 것 받아들일 수 있으나 권세에 편승하고 싶지는 않다네’ 했으니 이것은 점필재가 김굉필을 덜 좋게 생각한 것이다. 이로부터 점필재와 갈라졌다.”

점필재를 이해하는 논리는 이렇다. 김굉필은 도학 한 길로 나아갈 수 있었지만 점필재는 사림파의 힘을 키워야 하는 위치에서 훈구파 한명회의 압구정에 붙인 찬시도 지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다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종택으로 돌아왔다. 종손은 이 대목에서 사랑에 걸린 액자 하나를 가리켰다. 김굉필과 끝내 결별하지 않았다는 정황이 담긴 점필재의 편지글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489년 강론에 함께 하지 못한 제자 박형달에게 쓴 내용이다. “근자 백욱(정여창)·대유(김굉필)와 더불어 서사(書史)를 강론하며 서로 향상되는 유익함이 있었으니….” 점필재는 1485년(성종 16) 이조참판에 올랐다. 종손은 지금도 김굉필 후손들과 혼맥이 이어지는 등 관계가 좋다고 덧붙였다. 점필재는 선산부사를 거쳐 그 뒤 형조판서에까지 오른다.

사당에 들렀다. 1787년 개실마을에 종택을 지으면서 가장 먼저 세운 건물이라고 한다. 신주는 불천위(不遷位) 점필재 선생이 가운데 모셔지고 좌우로 4대(代)가 배치돼 있다. 불천위의 청색 덮개를 벗기자 관직이 깨알처럼 작게 한 줄로 쓰인 72자 신주(神主)가 모습을 드러냈다. 점필재는 그만큼 많은 벼슬을 거쳤다. 불천위 제사는 요즘 밤 9시에 올리는데 제관 40여 명이 모인다고 한다. 사당을 나오는데 왼쪽 바닥에 긴 나무판 두 개가 보였다. 어사화 판이다. 사당에 들를 때 종손의 아들(김현익)이 돗자리를 까는 등 적극적이었다. “이런데 관심이 많아 아예 역사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올해 경북대 사학과에 들어갔다고 한다.

훈구파 일색 조정에 신진사류 대거 진출


▎개실마을에 들어선 유림이 지은 재실 도연재. 유림이 모여 공부하고 점필재 선생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 사진:송의호
역사의 사필귀정(事必歸正)일까. 김종직은 중종반정 뒤 명예를 되찾았고, 그가 씨앗을 뿌린 도학은 사림의 주류로 자리 잡는다. 이후 선생은 밀양 예림서원과 선산 금오서원 등에 배향된다. 그러나 종택이 있는 고령에는 서원이 없었다. 대신 개실마을 입구에 유림이 지은 재실 도연재(道淵齋)가 있었다. 이 건물은 종택에 사당이 지어지고 100년이 지나 세워졌다. 인근 유생이 공부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지금도 음력 2월 유림이 간소하게 나물 등을 마련해 석채례(釋菜禮)를 지낸다고 한다.

마을을 돌아본 뒤 다시 종택 사랑으로 들어갔다. 벽면에는 조의제문과 선생의 편지글에 이어 또 하나 글이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이 선생을 언급한 내용이다. “점필재는 문장으로 쇠퇴한 세상을 흥기시켜 도를 구하는 제자들이 문하에 가득했다.” 점필재가 문장으로 도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문인록에는 김맹성을 시작으로 정여창·김굉필 등 제자 51명의 이름이 나온다. 점필재는 이렇게 관학 중심인 조선 초기에 사학을 이끌며 성리학자를 양성하고, 훈구세력 일색인 조정에 신진사류를 대거 진출시켰다.

김종직은 조선5현(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중 2현을 배출했고 김굉필은 조광조를 가르치지 않았나. 점필재는 또 조선에 도학의 씨를 뿌리고 사림의 기틀을 세우지 않았나. 그런데도 왜 그는 성균관 문묘에 조선5현은 물론 18현으로도 배향되지 못했을까. 고 이원주 계명대 교수는 “점필재를 도학자로 볼 것이냐를 두고 평가는 양극단으로 갈렸다”며 선인의 여러 평가를 소개한 적이 있다. 생전에 교유가 깊었던 홍귀달은 그를 덕행으로도 극찬했다. 19세기 홍한주는 이렇게 감탄했다. “김굉필·정여창은 도학을 배우고, 김시습·남효온은 절의를 따르고, 조위·김일손은 문장을 배워갔다.”

반면 많은 사람은 의문을 품었다. 점필재가 문장가이지 도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윤증이나 정철은 점필재가 상중(喪中)에 출타하고 시를 쓴 것 자체를 비판했다. 물론 영조시기 홍문관 수찬을 지낸 이헌경은 점필재 연보에서 조의제문과 관련 “정축년 답계역에 묵었다고 했는데 이 말은 잘못인 듯하다”고 문제를 제기한다. 부친상을 당하고 겨우 1년 지나 거상(居喪) 중인데 출입을 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에선 정축이란 시점이 조작됐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장유는 특히 점필재가 세조 시기 관직에 나아가고도 세조를 비방하는 것은 춘추대의에 어긋남을 강조한다. 조의제문은 정확히는 관직에 나아가기 전에 썼다. 또 허균은 문집 [성소부부고(惺所覆瓿稿)]에서 “사기리절기명(私其利竊其名, 이익과 관록을 취하고 명망을 훔친다)”이라며 한술 더 뜬다. 혹평이다.

점필재 연구, 위상에 비해 미흡


▎점필재가 제자 박형달에게 보낸 편지글 액자. 점필재가 제자 김굉필과 결별하지 않고 함께 공부하고 있다는 정황이 담겨 있다. / 사진:송의호
종손은 말을 아꼈다. 다만 “위상에 비해 연구가 덜 돼 자손으로서 안타깝다”고 했다. 크게 보면 처절한 사화를 겪으면서 선생의 저술이 많이 사라져 그의 온전한 모습을 만나기 어려운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점필재집]에는 사화 무렵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선생의 문집 초본 20여 권이 모두 불에 타고 남은 원고가 들보 위에 있었다. 가인(家人)이 불길한 물건이라며 이를 또 불 속에 던졌는데, 옆에 있던 사람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한두 편을 긁어내 모두 타는 것을 겨우 면했다. 그리하여 지금 보존된 것은 10분의 2,3도 안 되는데 선생의 생질 강중진이 상자 속에 보관했다. 무오년 22년 뒤인 경진년(중종 15)에 판각됐다.”

점필재 연구는 지금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밀양에서 활발하다. 부산대가 밀양대를 통합하면서 밀양에 점필재연구소를 만든 덕분이다. 점필재에 대한 후세의 연구와 평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박스기사] 점필재, 애민(愛民)을 바탕에 둔 실천유학자 - 선정에 감동한 백성들 ‘생사당(生祠堂)’ 짓고 참배


점필재 김종직은 1471년(성종 2) 41세에 함양군수로 나가 선정(善政)을 펼친다.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 다원(茶園) 조성이다. 당시 함양군민은 해마다 진상품으로 나라에 차(茶)를 바치고 있었다. 그러나 함양은 차가 전혀 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해마다 전라도에서 쌀 한 말과 차 한 홉을 바꿔 바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김종직은 부임 첫해 폐단을 알고 백성들에게 차를 부과하지 않고 관(官)이 구해다가 나라에 바쳤다.

이후 김종직은 [삼국사]를 읽다가 “신라 때 차 종자를 당나라에서 얻어다가 나라에서 지리산에 심도록 명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함양이 바로 지리산 아래인데 어찌 신라 때 심은 종자가 남아 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때부터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를 묻다가 드디어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숲에서 차나무 두어 그루를 찾아냈다. 점필재는 기뻐하며 그 땅을 다원으로 만들도록 했다. 근처가 모두 민전(民田)이어서 이를 사들이고 관전(官田)으로 보상했다. 몇 년이 지나 차가 두루 퍼지니 4,5년 뒤에는 나라에 바치는 물량을 충당할 만했다. 이 일로 ‘차밭’이란 시를 지었다. “대숲 밖 거친 동산 100여 평의 언덕/자영차 조취차 언제쯤 자랑할 수 있을까/ 다만 백성들의 근본 고통 덜게 함이지/ 무이차 같은 명다를 만들려는 것은 아니라네.”

김종직은 또 직무를 보는 여가에 젊은이와 어린이를 선발해 가르쳤다. 정여창과 김굉필이 배움을 청한 것도 이 무렵이다. 부임 이듬해는 양로연을 베풀고, 문인들과 4박5일 지리산을 일주한 뒤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란 명문을 남긴다. 부임 5년차에는 함양성의 나각(羅閣, 성 안의 주요 건물) 수리 방식을 바꾼다. 나각은 모두 243칸이었다. 그동안 칸마다 세 집이 함께 풀로 덮어 지붕을 이었다. 이게 비바람에 무너지면 비록 농사철이어도 우마차에 볏짚과 재목을 싣고 와 수리를 하곤 했다. 백성들은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매우 고달팠다. 김종직은 지역 원로와 상의해 나각 한 칸에 열 집을 배정해 썩은 재목을 바꾸고 기와를 이도록 했다. 그렇게 하니 한 집에서 기와 10장만 내놓으면 충분했고 5일도 되지 않아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 백성들이 처음에는 새로운 방식에 의아해했으나 일이 끝난 뒤 모두 좋아했다.

김종직은 승문원사로 발탁돼 떠난다. 함양 사람들은 이후 그의 덕과 선정을 사모해 살아 있는 사람의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초하루와 보름에 참배했다고 한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6호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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