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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66)] 일본제도 벤치마킹한 율정(栗亭) 박서생 

조선통신사 길에서 개혁을 찾아내다 

첫 통신사 이끌며 애민 시점으로 관찰 후 세종에게 15개 방안 건의
농정 혁신, 화폐 유통 등 백성 위한 실용 추구로 시대 앞서간 선각자


▎박서생의 후손들이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병산정’을 찾았다. 사진 왼쪽부터 박찬영, 박병훈, 박병천 씨. / 사진:송의호
코로나19로 1년 연기된 2020 도쿄올림픽이 우여곡절 끝에 성료됐다. 올림픽에 맞춰 추진된 한·일 정상회담은 끝내 무산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악화된 한·일 관계를 되돌릴 해법을 찾으려 했지만 회담 형식과 의제 등을 두고 견해차를 좁히지 못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 일본 공사의 ‘망언’도 불거졌다. 실타래처럼 꼬인 한·일 관계를 지켜보며 세종 시기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를 이끌었던 한 정사(正使)를 돌아본다. “일본 통신사(通信使) 대사성 박서생, 부사(副使) 대호군 이예, 서장관(書狀官) 전부교리 김극유가 길을 떠나는데, 신주(新主)의 사위(嗣位)를 하례하고 전주(前主)에게 치제(致祭)하기 위함이었다.”

[세종실록] 1428년(세종10) 12월 7일 기록이다. 사절은 일본의 새로운 쇼군(將軍)을 축하하고 사망한 전임에 조의를 표하기 위해 떠난다는 뜻이다.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막부는 그해 5월 7일 5대 쇼군 아시카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사망했음을 조선에 정식으로 알려왔다. 이어 7월 15일 막부는 다시 아시카와 요시노리(足利義敎)가 그 자리를 계승했다고 전하며 조선에 사절단 방문을 요청했다. [세종실록]은 이어 세종이 새 쇼군에게 보낸 국서(國書)를 공개하고 있다. “이제 큐슈(九州)에서 온 사절로 인해 비로소 큰 명(命)을 받아 즉위함을 알았는데, 기쁘고 경사로운 마음 이길 수 없습니다. 이에 사신 성균대사성 박서생과 대호군 이예를 보내 귀국에 하례를 드립니다. 변변치 못한 토산물은 작은 성의일 뿐이니 받아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각건대 귀국과 우리나라는 대대로 호의(好誼)를 닦아 조금도 변한 적이 없었으니 이제 선대의 뜻을 이어 신의(信義)를 더 돈독히 한다면 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어 예물이 소개된다. 흑세마포(黑細麻布)·백세저포(白細苧布) 등 삼베·모시와 인삼 200근, 호피(虎皮)·표피(豹皮) 등이다.

조선이 ‘통신사’란 이름을 붙여 일본으로 파견한 첫 외교사절의 출발이다. 사절단 대표는 기록대로 성균대사성인 율정(栗亭) 박서생(朴瑞生)이다. 그는 서울대 총장 격이니 조선의 문화를 전할 적임이다. 당시 한·일 관계는 어땠을까. 세종은 즉위 첫해 이종무를 보내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의 소굴 쓰시마를 정벌했다. 그러면서 조선과 일본은 긴장 관계가 조성된다. 일본은 승려를 보내 쓰시마를 공격한 진의를 파악하려 했다. 세종은 왜구를 압박하면서도 일본에는 신의에 바탕을 둔 대등한 교린을 강조한다. 실리 외교다. 그 선린우호의 사절단이 통신사였다.

“천하의 기이한 볼거리 통 모를 뻔했네”


7월 18일 박서생의 흔적을 찾아 그의 고향 경북 의성을 답사했다. 30도가 넘는 폭염 속이다. 후손인 율정기념사업회 박병훈 이사장이 앞장을 섰다. 박찬영 경북대 명예교수 등 후손 두 사람도 동행했다. 맨 먼저 들른 곳은 의성군 비안면 동부리 율정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한여름 무성해진 풀을 헤치고 들어서자 눈앞에 ‘조선초대통신사율정박선생기념비’라 새긴 높이 5m가 넘는 화강암 구조물이 나타났다. 그 돌 위로 다시 기념비만 한 넓적한 돌이 지붕처럼 얹혀 있다. 거석(巨石)이 주변을 압도했다. 2013년 건립된 기념비 뒤에 율정의 통신사 행적이 새겨져 있다.

학맥으로 박서생은 야은 길재의 제자였다. 율정은 스승의 충효를 배운 뒤 벼슬로 나아가 일찍부터 백성을 잘살게 하는 실용에 전념했다. 통신사로 나가서는 조선 백성에 도움이 될 게 무엇인지 떠올리며 일본 문물을 대했다. 1429년 6월 조선통신사는 한양을 출발한 지 6개월 만에 무로마치 막부가 있는 교토에 도착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서생 일행의 일본 경로와 활동은 기록으로 남은 게 거의 없다. 조선통신사를 연구한 부산대 한태문 교수는 다만 일본 측 6월 19일자 한 일기에 “(새 쇼군) 아시카와 요시노리가 교토의 인화사(仁和寺)에서 고려국 사신과 대면했다”는 짧은 기록이 전할 뿐이라고 정리한다.

박서생 통신사의 일본 내 활동은 [동문선]에 남은 그의 시 3편과 임무를 마치고 임금에게 복명(復命)하는 [세종실록]의 내용으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일본 측은 당시 통신사를 성대하게 맞이했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칠언율시 ‘봉사일본유감(奉使日本有感)’에 정황이 묘사돼 있다. “식사 때마다 드리는 축사 한 마디/ 임금의 은혜는 멀리 노닐 때 더 무거워라/ 반찬은 날마다 많고 맛도 좋은 데다/ 술도 때마다 큰 술잔에 가득하구나/ 기이한 풀 그윽한 꽃 곳곳에 있고/ 두른 산 굽은 물은 가는 곳마다 기이하니/ 사신으로 동쪽 나라 안 왔으면/ 천하의 기이한 볼거리 통 모를 뻔했네” 이런 시로 미루어 박서생 통신사는 일본 여러 지역을 지나며 이후 전통이 된 현지 문사들과 시나 글을 주고받는 필담창화(筆談唱和)도 했을 것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지성인(知性人) 대사성 율정을 일본 학자들이 그냥 보냈겠는가.

조선통신사는 가장 중요한 임무인 세종의 국서를 전하고 아시카와 요시노리의 답서를 받은 뒤 왜구에게 잡혀간 노비 6명과 함께 마침내 귀로에 오른다. 그리고 한양을 떠난 지 1년이 가까운 1429년 12월 3일 세종에게 복명하고 쇼군의 공손한 답서를 바친다. 그러나 박서생은 주어진 임무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사행(使行) 기간 일본을 벤치마킹한 제도를 조선의 개혁 방안으로 건의한다. [세종실록]은 율정의 ‘시행할 만한 일(可行事件)’ 15개 항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천 리를 가도 돈꿰미만 찬다”


▎고향 의성에 세워진 높이 5m가 넘는 ‘조선초대통신사율정박선생기념비’. / 사진:송의호
율정의 보고서는 탐지한 일본 정세에 대한 진단으로 시작된다. 일본의 침략 의도와 왜구의 움직임이 핵심이다. 율정은 일본이 군사 수만에 배는 1000척이 넘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이들이 일시에 일어나면 감당할 수 없으니 쓰시마나 막부와의 협력이 효과적이라고 제안한다. 또 일본이 불교국가인 만큼 그들에게 불경을 증여하자고 주장한다. 실리 전략이다. 일본은 막부나 호족 등이 조선에 80여 차례 대장경을 구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한다. 율정의 이런 외교정책은 이후 의정부 등과 협의를 거쳐 ‘시험해 봄 직하다’는 평가를 받아 채택된다.

율정은 이어 일본 들판 곳곳에 설치된 사람의 힘을 쓰지 않고도 돌아가는 수차를 각 고을에 설치해 관개(灌漑)의 편리를 도모하자고 제안한다. 그는 동행한 김신에게 수차 제조법을 연구하고 실정에 맞게 모형을 만들도록 했다. 율정은 농민의 고생을 덜고 싶은 간절함이 있어 그런 수차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대학]은 ‘마음이 없으면 눈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心不在焉 視而不見)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또 날로 먹으면 기갈을 해소하고 삶으면 사탕이 되는 일본이 재배하는 사탕수수와 마를 보급하자고 건의한다. 농정의 혁신이다.

율정은 화폐 유통을 강조했다. 그가 일본에서 지켜본 모습이 [세종실록]에 남아 있다. “일본은 도읍부터 해안에 이르기까지 돈을 베나 쌀보다 훨씬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여행하는 사람들은 비록 천 리를 가더라도 돈꿰미만 차고 식량을 휴대하지 않습니다.” 일본이 여관에서 숙식을 제공할 때 현물 대신 돈을 받으니 관련 산업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선세(船稅) 등 각종 세금도 모두 돈으로 바치게 하자는 전납세제(錢納稅制)를 제안한다. 그리고 200여 년 뒤 조선에 상평통보가 등장한다. 박서생의 통찰은 이렇게 앞서 있었다.

상가의 혁신도 언급한다. “일본 상가(商街)는 널빤지로 층루를 만들고 물건을 그 위에 두니, 먼지가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쉽게 보고 살 수 있었습니다 (…) 바라건대 운종가(雲從街) 좌우 행랑부터 동쪽 누문(樓門)에 이르기까지 물건을 진열할 층루를 만들어 어느 간(間)에 무슨 물건을 둔 곳이라 간판을 달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소서.” 율정은 우리나라 시장이 어육 등 식품까지 맨땅에 두고 앉기도 하고 밟기도 한다면서 시장의 변신을 실용적 관점으로 제시한다.

일본의 목욕 문화도 눈여겨보았다. 율정이 보고한다. “일본은 노소 없이 목욕하고 몸을 깨끗이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상류층은 개별 욕실을 설치하고, 마을에는 곳곳에 욕탕이 설치돼 일반인은 돈을 내고 목욕합니다.” 그는 제생원·혜민국 등 사람이 많은 곳에 모두 욕실을 설치한 뒤 돈을 내고 이용하도록 하자고 건의한다. 화폐경제를 시행하는 편리함과 그로 인한 경제 효과를 꿰뚫어 본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리 이마무라 도모가 재발견


▎올해 김유진 작가가 후손들 얼굴을 합성해 제작한 박서생의 초상화. / 사진:송의호
거석의 기념비 옆으로 율정의 시비 5개가 둥그렇게 서 있었다. 박병훈 이사장은 그 중 ‘무본후생(務本厚生)’이라 새긴 율정의 좌우명을 몇 차례나 되뇌었다. 그는 정무(政務)의 근본을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데 두었다는 것이다. 박 이사장은 그 대목에서 이마무라 도모(今村鞆)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이마무라는 역사 속에 묻혀 있던 박서생을 처음으로 세상에 드러낸 은인이라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리였던 이마무라는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을 독파하고 거기서 40여 차례 언급되는 박서생이란 인물을 발견한다. 1928년 이마무라는 [역사민속조선만담]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그 안에 ‘활안(活眼)의 신사(信使) 박서생’이라는 제목으로 율정을 소개한다. 이마무라는 여기서 율정이 통신사 임무를 마치면서 세종에게 제안한 15개 항목을 들어 그를 사리를 밝게 판단한 외교관으로 평가하고 있다.

기념비 뒤로 율정을 기리는 병산정(屛山亭)이 있었다. 후손들이 일제강점기에 위천이 지나는 벼랑 위에 지은 정자다. 병산정과 기념비 사이엔 관향조(貫鄕祖)인 박우의 단(壇)도 마련돼 있었다. 병산을 나와 비안면 소재지로 들어갔다. 비안 박씨 율정의 관향이다. 율정은 청원을 통해 비안을 자치현(縣)으로 만들었다. 1425년 세종은 이례적으로 6품인 비안현감 권후를 불러 당부한다. “굶주리는 백성을 구제할 방법을 항상 생각하라. 예전에는 백성에게 예의와 염치를 가르쳤으나 지금은 의식(衣食)이 부족하니 어느 겨를에 예의를 가르치겠느냐. 의식이 넉넉하면 백성이 예의를 알게 되고 형벌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에 힘쓰라.”

비안은 이렇게 세종의 애민(愛民)이 배인 땅이다. 면소재지 입구에 이조참판 율정의 사적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건립 시기로 ‘대한 광무 2년’(1898)이란 자주적인 연호를 썼다. 율정의 사적(事跡)을 살폈다. 박서생은 여태 생몰연대가 확인되지 않는다. 1371~1436년이란 주장만 있었을 뿐이다. 문집도 없다. 그 이유를 두고 그가 조선 초기 정통 유학대신 실용 학문만 추구해 본류에서 벗어났다거나, 손자 박효원이 임사홍 패당으로 몰려 집안이 몰락했기 때문이라는 설등이 있다. 그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을 제외하고 박세채의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일부가 전한다.

박서생은 약관에 진사가 되고, 1401년(태종 1)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1407년 중시에 발탁돼 정언 지제교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친시에선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율정은 이후 조선통신사를 거쳐 이조(吏曹)에서 일하다가 사헌부 대사헌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직간(直諫)이 자신과 맞지 않아 사임하자 조정은 그를 다시 판안동대도호부사로 보냈다. 그의 도량은 생전에 박서생을 지켜본 점필재 김종직의 [이존록(彛尊錄)]에 전한다. 점필재는 “선비 박서생이 심히 고상하다”고 표현했다. 율정은 남들이 자기가 지은 시문을 표절해 자기 작품이라고 우겨도 믿어주고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제자 중 선생의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 말을 중지시키면서 “사람의 의견이란 도모하지 않아도 같을 수 있다. 뭐 그리 괴이할 것이 있나”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집도 없고 생몰연대도 확인 안돼


▎낙동강 낙단보 의성쪽 선착장에 조성된 ‘박서생 통신사공원’의 수차 모형. / 사진:
다시 박서생의 생가터를 찾았다. 비안향교 명륜당으로 들어갔다. “여기에 본래 생가가 있었어요. 터를 둘러본 지관(地官)이 향교 자리로 좋겠다고 하자 선조는 그날로 집을 비우고 값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집터를 향리의 후학을 기를 공간으로 기부한 것이다. 율정은 읍내에 집을 새로 마련하고 만년에는 스승 야은이 머문 선산 율리로 옮겨갔다.

일행은 다시 낙동강 낙단보 선착장에 들렀다. 의성군이 지난해부터 박서생의 조선통신사 배를 운항하고 있어서다. 상류에서 관광객을 태운 조선통신사 ‘율정호’가 들어왔다. 선장은 운항 중 승객들에게 조선통신사와 율정을 소개한다고 했다. 그 뒤로 통신사공원에 조성된 율정의 수차 모형이 보였다.

통신사(通信使)란 ‘서로 신뢰가 통하는 사절단’이란 뜻이다. 세종이 처음 만들었고 율정이 처음 사행을 이끌었다. 한·일 두 나라가 멀리 있는 사촌보다 가까운 이웃이 되고 싶어서였다. 유네스코는 그 정신을 높이 평가해 한·일 양국이 준비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을 2017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박서생은 교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조선의 앞선 문화는 전하고, 일본의 앞선 경제 제도는 받아들이도록 건의했다. 백성의 더 나은 삶을 위해서다. 박서생은 명분이 아닌 실용으로 세종의 태평성대를 열어간 선각자였다.

[박스기사] 야은과 율정의 사제 관계엔 의리와 헌신 가득 - 스승 길재, 평생 따르며 보필한 제자 위해 땅 나눠줘

율정 박서생은 야은 길재의 제자였다. 두 사람의 사제(師弟) 관계는 박세채의 〈동유사우록〉에 전한다. 박서생은 약관에 진사가 된 뒤 야은이 벼슬에서 물러나 선산에 머문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그 길로 책 상자를 메고 가 제자가 됐다. 그때부터 야은은 박서생에게 경전과 성리학을 가르쳤다.

율정은 스승의 뜻을 잇고 싶어 벼슬길을 접었으나 야은의 권유로 1401년 문과에 급제한다. 이후 승승장구했으나 벼슬에서 물러나고 싶었다. 그가 야은에게 고한다. “제자는 녹봉을 받아도 봉양할 부모가 안 계시니 벼슬살이 생각이 없습니다. 청컨대 선생 문하에서 배우며 늙고 싶습니다.” 야은이 만류한다. “이미 나라에 몸을 바친 사람은 자기 위주는 안 된다. 자기가 편하자고 스승 위해 임금을 저버려야 되겠는가? 내가 고려를 향하는 마음을 지킨 것 같이 이 나라에 몸을 던진 내 자손은 그의 임금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율정은 그 말에 벼슬로 돌아갔다.

이후 야은이 모친상을 당했다. 율정은 호상(護喪)을 맡아 야은의 뜻을 따라 주자가례로 상을 치렀다. 이어 야은이 다시 맏아들 상을 당하자 율정은 이번에도 호상을 맡았다. 그 뒤 스승이 율정에게 말한다. “지금은 우리 두 사람이 여기 함께 있지만 나는 죽을 날이 머지않다. 다만 바라는 게 있다면 훗날 양가 자손이 우리 둘의 정의(情誼)를 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야은은 말을 마치고 자신의 임야 절반을 떼 주었다. 그 뒤로 산 동쪽은 박씨의 가족 산이 되어 대대로 장지(葬地)로 삼았다. 야은이 세상을 떠나자 율정은 마음으로 예를 다하는 심상(心喪) 3년을 보냈다. 곡은 목이 쉬도록 했다. 야은의 아들 길사순이 울면서 간청한다. “선친은 제자가 많아도 그대만큼 마음으로 소중히 여긴 사람은 없습니다. 선친의 행장(行狀)은 그대가 아니면 지을 수 없습니다.” 율정은 사양하다가 야은의 행장을 지었다. 은퇴 뒤 율정은 스승의 고향 율리 뒤쪽 강 언덕에 집을 짓고 밤나무를 심어 ‘율정(栗亭)’이라 이름 붙였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109호 (2021.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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