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북한.국제

Home>월간중앙>정치.사회.북한.국제

[특별기고] 정치권의 ‘반지성주의’ 어떻게 막나? 

팬덤의 집단행동 부추기는 정치인들부터 자성해야 

문재인 전 대통령 ‘양념발언’ 두고두고 아쉬워… 문자폭탄 더 기승
尹, 리더의 발언이 갖는 영향력으로 자제 호소해 폐습 종식시켜야


▎금태섭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이 언급한 ‘반지성주의’가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이 팬덤정치라고 지적했다.
정치하면서 문자폭탄 꽤나 받아봤다. 한번에 2만 통이 넘는 문자가 쏟아진 적도 있다. 18원 후원금도 누구 못지않게 받았다. 야밤에 전화도 많이 걸려왔다. ‘팬덤정치’의 위력을 온몸으로 겪은 피해자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문자폭탄에 대처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읽지 않고 차단해버린다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가급적 다 읽었다. 유권자들이 보낸 메시지인데 읽기라도 하는 것이 정치인으로서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커뮤니티 같은 곳에서 공유된 내용을 베껴서 보내는지 천편일률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매우 창의적인 작품들도 있었다. ‘계속 공수처를 반대하거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비판하면 신체 특정 부위의 크기가 줄어들 것’이라는 저주를 보고서는 웃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심심할 때면 답장을 하기도 했다. 정중하게 예의를 갖춰서 ‘말씀하신 내용은 알겠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문자를 보낸다. 한때는 단체로 전화를 걸어대는 일이 유행한 적도 있는데, 그럴 때도 가끔 한 통씩 받아서 통화를 해봤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답을 하면 10명 중 8~9명은 예의를 차려서 응대한다는 점이다. 욕설로 가득한 문자를 보낸 사람들의 태도도 180도 바뀌어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때로는 답변을 해줘서 고맙다고도 한다. 그러면 나도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서로 인사하며 문자나 통화를 끝내게 된다.

아마도 인터넷상에서 의기투합해 집단적으로 문자폭탄을 보낼 때는 상대방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개혁에 저항하는 기득권, 일신의 영달을 위해 동료를 저버리는 배신자·친일파·토착왜구 등 추상적인 악으로 여기기 때문에 폭력에 가까운 행동을 서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답 문자를 받거나 통화를 하게 되면 상대방도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게 된다. 직장에 출근하고 가족도 있고, 비슷한 문제로 고민도 하고. 그걸 깨닫게 되면 자연스럽게 예의를 갖추게 된다. 문자폭탄을 보냈다가 나와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태도를 바꾼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물론 끝까지 거친 언사를 포기하지 않는 분들이 계시지만 그럴 때는 나도 최소한의 품위를 잃지 않는 선에서 목소리를 높여서 대거리하곤 했다. 견해가 다른 사람들끼리는 입씨름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고함을 치며 한바탕 주고받고 나면 스트레스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 통화한 분들도 같은 기분을 느꼈기를 바랄 뿐이다.

‘18원 후원금 보내기’ 독려한 정치인들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지지자들은 문 후보에게 돌아가는 손익을 따져 집단 위력을 행사했다. 문 후보는 이러한 지지자들의 행위를 두고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팬덤정치’에 참여하는 분들에게 악감정이 있지는 않다. 정치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먹고 자라는 것이고 그런 애정이 과하다 보면 흥분할 수도 있다. 정작 섭섭함을 넘어서 분노가 느껴지는 것은 그런 과격한 행태를 부추기고 이용하는 동료 정치인들의 모습이다. 소위 ‘18원 후원금 보내기’를 독려한 것도 정치인들이었다. 탄핵 시기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의원들에게 18원을 보내자’는 트윗을 올렸다. 욕설의 의미를 담은 후원금 18원을 송금한 다음 영수증 발급을 요구하면 의원실에서는 영수증을 출력해서 우편으로 발송해야 한다. 그 비용으로 1930원이 들기 때문에 집단적으로 반복하면 금전적 손해도 입힐 수 있고 업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후원금 반환을 요구하면 송금 수수료가 들기 때문에 이중으로 타격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을 올린 사람도 있었다.

이런 일은 원래 민주당의 상대편인 새누리당 의원들을 겨냥해서 시작됐지만 곧 전선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탄핵 표결일에 대해 민주당과 의견을 달리했던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실에 18원 후원금이 쏟아졌고, 심지어는 개헌 관련 연구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같은 민주당 의원실에도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이 위험수위에 이르렀을 때, 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글을 올려서 위에 적힌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렸다. 정치자금법에 따르면 1만원 이하 후원금에 대해서는 영수증 발급 의무가 없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소액 후원자에게도 감사한 마음으로 영수증을 교부하겠지만, 단지 괴롭히기 위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면 응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법이 아닌 이상 후원금 반환 의무도 없다. 정치인들이 트윗에 올린 정보는 사실과 전혀 달랐다.

그러나 그런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으면서도 마음이 무겁고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정치후원금은 불법적이고 음성적인 정치자금 수수를 없애고 깨끗하고 투명한 시스템을 정착시키려고 만든 제도다. 몇몇 사람이 악용하는 일이 있더라도 정치인이라면 말려야 하는 것 아닐까. 아무리 생각이 다르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행동을 부추기고 독려할 수가 있나. 더군다나 개헌 연구모임에 소속된 같은 당 의원들에게 18원 후원금 폭탄을 보내라고 한 것은 견해 차이에 기인한 것도 아니고, 단지 당시 대권 주자였던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불리할지 모른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정책이나 제도의 적정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에게 이득이 되는지 손해가 나는지를 따져서 집단적으로 위력을 행사하는 것, 바로 팬덤정치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우리 사회의 리더나 정치인이 팬덤정치를 만들어내고 부추기는 현상에 대해서 얘기할 때 빼놓을 수없는 에피소드가 있다. 바로 문 전 대통령의 ‘양념 발언’이다. 19대 대통령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17년 4월 3일 저녁. 이제 막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상대 후보 측에 18원 후원금과 함께 문자폭탄을 보내고 비방 댓글을 조직적으로 올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답한다. 당연히 파문이 일어났다. 경선 과정에서 다른 후보를 지지했던 박영선 의원 등이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문 후보 측은 “갑자기 현장에서 연달아 인터뷰하면서 답했던 상황”이라며 “문자폭탄 등을 가볍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었다”라고 해명했다.

특정 정치인이 손익 따져 집단적으로 위력 행사


▎폭력에 가까운 행동을 수반하기도 하는 ‘팬덤정치’가 보수 정당으로 확산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거주하는 평산마을에는 보수단체의 확성기를 동원한 욕설 집회시위가 지속되고 있다.
다음 날 국회에서 민주당 의원총회가 열렸다. 많은 사람이 문 후보의 발언을 기다렸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를 한 만큼 전날 답변에 대한 해명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더 나아가 문자폭탄을 보내거나 인신공격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에게 자제를 당부하는 얘기를 바라기도 했다. 이미 경선에서 이겼고 사실상 대선 승리도 유력한 상황에서 포용의 제스처를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 후보는 그 자리에서 “제 지지자 가운데 저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문자폭탄을 보내 의원님들이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았든 몰랐든, 제 책임이든 아니든, 이 자리를 빌려 깊은 유감을 표하고 위로를 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이 발언을 들으면서 느꼈던 절망감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표면적으로는 유감 표명이었다. 위로의 말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극렬지지자들이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메시지가 숨어 있다. 문 후보는 문자폭탄을 보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자제 호소를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알았는지, 스스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밝히지 않음으로써 사실상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제 극렬 지지자들은 자신들이 문자폭탄을 보내도 문재인이라는 정치인의 책임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여기게 됐다. 그때부터 손혜원 전 의원을 비롯한 민주당 정치인들은 문자폭탄을 ‘문자행동’이라고 부르면서 ‘용기 있는 실행’, ‘참여민주주의의 새 지평’이라고 찬양하고 부추기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오던 자제력의 끈이 끊어졌고 둑이 터진 것처럼 시시때때로 문자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팬덤정치 현상은 이 발언 이전부터 있었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행태의 책임을 전적으로 당시 문 후보에게 묻는 것은 부당하다. 그러나 나는 이때가 정말 아쉬운 ‘놓쳐버린 기회’라고 생각한다. 리더의 발언이 갖는 영향력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저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악성 댓글을 달고 문자폭탄을 보내는 일은 결국 다 제 책임이 됩니다. 멈춰주실 것을 강력히 호소합니다”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문자폭탄·18원 후원금을 넘어서 개딸·양아들까지 이르는 팬덤정치의 폐해를 이 지점에서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한다고 했던가. 민주당에서 시작된 팬덤정치는 보수 정당으로 번지고 있다. 영부인 김건희씨나 한동훈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팬질’도 심상치 않지만, 정작 경각심을 울리는 것은 문 전 대통령 사저 앞 시위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다. 심한 욕설이 난무하는 시위에 대해 윤 대통령은 “대통령 집무실도 시위가 허가되는 판이니까 다 법에 따라서 하면 되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물론 윤 대통령이 그런 시위를 하라고 부추긴 것은 아니다. 헌법상 보장되는 집회·시위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할 수 없다는 말도 법률적으로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리더의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얘기가 다르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팬덤정치를 막을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서 시작된 팬덤정치, 보수 정당으로 번져

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있다고 했다. 반지성주의가 현실에서 나타난 현상이 바로 팬덤정치다. 취임사에서 한 약속을 지키려면 최선을 다해 막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법으로 금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폭력에 가까운 시위를 하는 사람들에게 자제를 호소하고, 대통령 자신은 그런 시위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 동력이 떨어질 것이다. 리더가 앞장서서 한 걸음 한 걸음 팬덤정치의 구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문 전 대통령은 팬덤정치를 방지할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부채질했다. 이제 국민은 새로 취임한 윤 대통령을 바라보고 있다. 만일 편을 갈라서 극한으로 싸우는 폐습을 종식시킨다면 재임 기간 가장 큰 성취로 꼽힐 수도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새 정부는 지금 갈림길에 있다.

- 금태섭 변호사·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kts@lawkh.com

202207호 (2022.06.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