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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15) 서울 양천구 칼산에서 

 

인간의 어리석은 실체를 하염없이 바라 봤다

양천구와 구로구의 경계인 서부간선도로 옆, 마치 긴 칼처럼 생겨 이름 붙여진 ‘칼산’에 올랐다.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천천히 올라갔다. 곁에서 보기에는 작은 언덕쯤으로 보였는데 속은 꽤나 넓고, 아늑하고 평화로워 아름답기까지 했다. 높이도 76m나 됐다.


적당히 땀이 젖을 만큼의 오르막 능선과 아담한 바위, 소나무와 편백나무, 떡갈나무, 고풍스러운 향림사와 멋스러운 갈산정, 사방팔방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석 등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 시설과 운치 있는 벤치, 깔끔한 나무 데크 길이 세련되게 이어져 덩치 큰 산에 있는 모든 것들을 올망졸망 다 갖추고 있었다. 한마디로 인공미와 자연미가 조화롭게 짝을 지어 도심 속 휴식처, 오아시스를 이루고 있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진짜로 그 맛을 알려면 직접 그곳에 들어가 맛보고 경험하고 체험해봐야 안다.


그렇게 칼산을 한 바퀴 여유롭게 돌며 구석구석 감상하자 머리가 어느 정도 맑아졌다. 저 멀리 관악산과 안양천이 잘 보이는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밀려오는 세상 세파를 저 하얀 뭉게구름처럼 모든 것을 달관하며 떠나보내고 싶었다. 또다시, 마음 한구석에서 어젯밤의 깊은 후회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어제 새벽 5시, 내 마음속 수호천사이자 죽마고우 A의 어머님이 별세하셨다는 부고 문자가 내 휴대폰을 깨웠다. 지금으로부터 46년 전 초등학교 5학년 '실과' 시간이었다. 학교 정원에서 친구 B가 괭이로 나무 심을 구덩이를 파다가, 내가 흙을 고르기 위해 구덩이에 들어간 줄 모르고 그만 내 머리통을 찍고 말았다. 의도치 않은 실수였다. 연약한 머리에서 피가 쏟아지자 주위 친구들이 모두 놀랐다.

당황한 와중에 상처를 여러 겹 종이로 싸서 피가 나는 부위를 꼭 누르고 학교 근처에 살던 A의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마침 집에 있던 A의 어머님께서 ‘빨간약’으로 응급조치를 해주셨고, 기저귀 천으로 머리를 단단히 동여매고 읍내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덕분에 상처 난 머리를 꿰매 큰 후유증 없이 완치됐다. 그 이후 나는 A와 더욱 친해져 평생을 동고동락하는 단짝이 됐다. A의 어머님은 내게 다른 한 분의 어머니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비교적 일찍 사회에 진출한 A는 양말 공장을 운영했는데, 특유의 성실함과 피나는 노력으로 자수성가했다. 얼마 뒤에는 강남의 노른자위 땅에 큰 횟집을 차렸고, 그의 어머님 회갑 잔치 때에는 성대한 풍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 남부러울 것 하나 없는 멋진 친구였다. 그런데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한 해 2번의 세무조사를 받고 몇 차례 부침을 겪더니 횟집도 그만두게 됐다.

A는 어려움 속에서도 늦은 나이에 설비 기술을 배워 현장 리더로 살림살이를 꾸려가고 있다. A는 이 세상 둘째가라면 서러운 효자였다. 여러 해 전 어머님께서 몸져누우시고 아내마저 아팠지만, 힘든 현장 일을 하면서 지극정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진국 중의 진국, 진짜 수호천사다.

업무가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분당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조문을 갔다. 어릴 적 본 그대로 어머님의 모습이 영정 사진에 남아 있었다. “50여년의 세월이 엊그제 같은데…” 참 세월이 무상하고 허망했다. 시간의 빠름을 절감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정은 변치 않는 법이다. 장지까지는 못 가더라도 친구들과 마지막 가는 어머니 길에 함께 하기로 했다. 장례 차량까지만이라도 운구하기로 하고 여러 명의 친구가 장례식장에서 밤을 새우기로 했다. 오랜만에 함께 술을 마시고 회포를 풀었지만, 긴 밤은 아직도 까마득하게 남아 있었다.

우리는 이내 여럿이 어울릴 수 있는 화투 놀이 중 ‘섰다’ 게임을 시작했다. 한 친구의 권유로 판돈이 제법 큰판이 됐다. 신기하게 초반에는 나를 사랑하는 A 어머님의 보살핌인지 판돈이 다 내게로 몰렸다. 돈 따는 재미에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손에 잡힐 듯 안 잡힐 듯 욕심은 끝을 몰랐다. 결국 마지막에 있는 돈을 ‘올인’했다가 허무하게 K.O패 당하고 말았다. '참! 운이라는 것은 내 뜻대로 안 되나 보다.' 하지만 내가 화투놀이에 빠져있는 동안 내 휴대폰에는 ‘제발 일찍 들어오라’는 아내의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수없이 찍혀 있었다.

동이 터 왔고, 운구차에 어머님을 모시는 중에도 아쉬웠던 화투판의 섰다가 내 머릿속을 온통 점령해 버렸다. 남의 아픔은 내 발톱의 때보다도 못하다는 말이 있다는데, 친구 어머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내가 꼭 그 꼴이 아닌가!…. 내가 그런 탐욕의 노예, 몰상식한 단세포, 돈 잃은 것만 안타까워하는 속물로 변해 있었다니....정말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을 똑똑히 보고 말았다. 그렇게 운구차가 떠나고 한참 후까지 친구 어머님께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해서 한동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람이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인간을 얼마나 피폐하고 황량하게 만들 수 있는지 하룻밤 사이에 뼈저리게 다가왔다.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보니 저 멀리 한 무리의 먹구름이 관악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 인간의 마음이란 정말 연약한 갈대와 같구나~'. 이렇게 어리석은 나에게도 따뜻한 햇살이 다시 비칠 수 있을까! 그렇게 반성과 고뇌 속에 칼산을 내려왔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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