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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18) 서울 안산 둘레길에서 

 

어떤 삶이 잘 사는 것일까… 저물어가는 가을날, 철학에 빠졌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295.5m)은 등산길이 잘 정비된 야트막한 산이다. 산을 오른다는 느낌보다는 산책한다는 기분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서울 도심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말의 안장같이 생겨 이름 지어졌다는 안산 둘레길을 걸어보면 우리 인간 세상사처럼 동서남북이 정말 다름을 실감할 수 있다.

의정부 방향인 북쪽은 응달로 추워서 그런지 나무와 풀들이 작고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이는 데 반해, 남쪽과 서쪽은 양달이어서 그런지 날씬한 미녀들처럼 편백이 아름답게 하늘을 향해 솟아 있다. 동쪽은 권력의 무상(無常)과 위엄을 상징하듯 기암괴석 바위들이 인왕산 청와대를 향해 ‘여봐라’ 하며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100여 년 전에는 호랑이가 우글거려 사람 10명은 모여야 포졸들의 감시하에 산을 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저 작은 언덕쯤 여겨져 등산객들이 몰려 물결처럼 흐르고 있었다.


걸은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길목 옆에 안중근·유관순 등 대한민국 훈장을 받은 독립투사 여섯 분의 사진이 기록된 푯말이 눈에 들어 왔다.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가면서, 이완용같이 나라를 팔아 호의호식한 인간들과 단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을 대한독립을 위해 초개와 같이 바친 선열들을 대비해봤다. 왜 어떤 인간들은 인류를 위해 훌륭한 성인으로 살고, 어떤 인간들은 남을 힘들게 하는 독재자로 사는가? 왜 어떤 인간들은 권력, 명예, 재산, 사욕을 위해 살고, 어떤 인간들은 욕심을 누르고 이타심을 발휘해 빈 마음으로 살아가는가? 자연 향기 그윽한 산자락, 나무 냄새 가득한 솔길을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빠져들었다. 인간이란 과연 무엇이고, 잘 사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먼저, 인류가 스승으로 일컫는 사상가, 철학자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 춘추전국시대로 들어가 봤다. 춘추전국시대(B.C 1500년경)는 말 그대로 봄과 가을이 수시로 변하는 대격변기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힘 있는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해 약탈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하찮은 파리처럼 여겨 죽음으로 내몰고 노예로 삼으면서 오로지 권력자들의 배만 채웠던 시기에, 그것을 수습하고 타파하기 위해 지식인 사상가들이 필연적으로 탄생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백가쟁명, 그 수만가지 사상과 철학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삶을 좌우하는 대표 성인들과 사상들을 정리해 봤다.

공자와 맹자. 유가 사상의 창시자들로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나고(성선설) 자기의 이기심과 욕망을 줄여 인(사랑)·의(의리)·예(도덕)로 사람들을 대하고 다스려야 태평성대, 즉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입신양명을 최고의 삶의 가치이자 목적으로 생각했다. 또한 사회 유지를 위해 신분제도를 용인했고, 그러기에 차별적인 사랑을 주장해 부모에게는 효, 임금에게는 충을 도덕의 근본으로 삼았다. 플라톤의 철인 정치처럼 최고 지식인이자 도덕적인 사람, 즉 군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게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라고 봤다.


맹자는 이에 부합하지 않으면 역성혁명으로 왕을 갈아 치워도 된다는 급진적인 생각도 했다. 맹자는 공자보다 100년 늦게 태어났지만 그 인품과 능력으로 유가가 후세에 자리 잡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고, 중국의 최초 통일국가 진나라가 30년 만에 망한 후 한나라 때 국가의 기본이념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에 이르렀다. 이 사상은 장점도 많지만, 어쩌면 많은 모순과 비현실성에도 불구하고 임금에게 충성한다는 명제가 권력자들의 입맛과 일치했기 때문에 많은 통치자가 가장 선호하고 채택해 오늘날까지 우리의 생활과 사고를 좌우하고 있는지 모른다.

노자와 장자. 도가 사상의 창시자들은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무위자연으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스스로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잘 살기에 백성들에게 어설픈 통치를 하지 말라고 주장(노자 도덕경)했고, 어쩌면 무(無)에서 왔다 무로 사라지는 것이 인간사 세상만사라고 봤다. 그러므로 권력과 재산은 다 부질없는 것으로, 오로지 자기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고 즐겁게 살자(요즘 말로 욜로(You Only Live Once, 현재 자신의 행복을 가장 중시하고 소비하는 태도)는 비움의 철학으로, 도덕적으로 열심히 살다 가는 것이 최고의 삶(장자)이라고 역설했다. 이 우주는 하나로서, 죽음과 삶은 경계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장자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을 때 바가지를 두드리며 노래하고 춤을 췄다.

순자(荀子)와 한비자 등 법가 사상가들은 인간은 본래부터 자기의 이익을 좇고 탐욕을 본능(성악설)으로 가지고 태어나기에, 인간은 근본으로 예를 갖추면서 악한 마음 악한 행동을 품지 않고 행동하지 못하게 법체계를 갖추어 미리 대비해야 국가와 사회를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고 통치자는 무섭고 위엄이 있어 감히 백성들이 범접할 수 없도록 교활하고 무자비한(한비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독재를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법가주의는 당시 통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사상이 됐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에 큰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도 가장 살아있는 사상이자 제도이다.


묵자(墨子)와 그 무리. 묵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는 공맹 유가사상이 현실성이 떨어지고 차별적 사랑임을 지적하면서 황제 또한 날 때부터 황제가 아니었음을 명분으로 모든 인간은 다 똑같고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예수의 사상과 일부 일치)고 주장했다. 이들은 현실적으로 연약한 백성들을 위해 전쟁을 막고 종식하는데 앞장섰지만, 훌륭한 제자가 배출되지 않아 묵자 사후 200년쯤에 그 사상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 국가가 되면서 사상적으로 일치한 면이 있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고자(告子), 이 사상가는 인간의 본성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한 자리를 빙빙 도는 물과 같아 그 물길을 동쪽으로 트면 동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른다며, 운과 후천적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아마도 우리 인간 대부분이 이 범주에 머물며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양주(楊朱). 이 사상가는 위아주의(爲我主義)로 자기의 몸을 보존하며 조금이나마 위험이나 희생을 하지 않는 것, 즉 권력·명예·지위·재산에 얽매여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면서 마음껏 행복하게 사는 것이 최고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글깨나 읽고 철학을 논한다는 많은 백가쟁명 지식인들은 자기가 처한 입장, 삶의 양식, 환경에 따라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법을 다 다르게 처방했다. 한마디로 백인백색이며, 하늘에 떠 있는 뜬구름을 좇는 것처럼 스스로 알아서 운명을 개척하라는 소리로 들린다.

세계로 시야를 넓혀 생각해 봤다. 석가모니. 불교의 사상은 모든 것이 ‘공(空)’이요 ‘인연’이며 삶과 죽음이 따로 없는 하나의 세상으로 모든 것은 윤회하니 욕심 없이 청빈하게 살라 한다. 예수. 크리스트교는 인간과 세상의 만물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니 원수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죽어서 자기가 사는 천국에서 행복하게 같이 살자고 한다. 소크라테스. “인간아! 너 자신을 알아 사람답게 살아라!” 갈대처럼 바람처럼 돼지처럼 살지 말고, 자기 자신이 삶의 중심이 돼, 사람답게 살라고 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에 깊이 빠졌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복잡한 머릿 속과 달리 눈 앞에 작고 편안한 산, 안산의 진면목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고 은은한 것이 마치 완숙한 여인네의 향기처럼 참 그윽하고 매력적이었다. 서울 도심 옆에 이런 산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그래도 결론을 내야지.... 다시 걸음을 재촉하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는 처음부터 그 모든 유혹과 난관을 극복하고 오로지 국가와 국민만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초개와 같이 내던졌을까? 참으로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인생이지만 그분들도 나름 여러 고민과 갈등이 있었고, 세속적인 행복에 대한 열망도 있지 않았을까? 만약 예수, 석가모니, 소크라테스가 지금의 메타버스 세상, 가상세계가 있는 혼돈의 세상, 인간과 기계가 따로 구분 없는 세상을 살아간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분들의 신념과 주장에는 변화가 없을까?

우주는 광활하고, 이 세상은 언제나 미완성이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을 보면,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것들은 그저 시간의 소꿉장난 같다. 장자의 말처럼 어느 꿈속에서 잠깐 나비처럼 허우적대다가 깨어보니 벌써 저승의 문턱에 와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에 수십만 번씩 마음의 변화가 휘몰아치는 그런 찻잔 속 날갯짓에도, 기왕 사는 것, 자기 나름대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후회 없이 멋지고 우아하게 잘 살다 가는 것이 인생의 가장 모범 답안이 아닐까? 그렇다. 나도 어쩌면 그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지 않은가?

비오는 가을날,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가 어느새 안산을 다 내려왔다. 수줍게 핀 작고 가냘픈 꽃들이 오늘따라 참 예쁘다. 오늘 나도 멋지게 잘 살아야겠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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