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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의 평양리포트] 월북 미군 병사 킹, 그는 어떻게 됐을까? 

북한에도 골칫덩이… 순순히 돌려보낼 가능성 거의 없어 

숱한 문제 일으킨 ‘관심병사’… 美 송환 앞두고 안보관광객 가장해 기습 월북
지금까지 월북한 미군 5명 중 돌아온 건 한 명뿐… 북한 체제 선전 도구 불과


▎유엔사령부 소속 미군과 한국군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지키고 있다. 주한미군 트레비스 킹 이등병은 이곳에서 안보관광객으로 위장해 월북했다.
그는 왜 지난 7월 18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훌쩍 넘어갔을까? 저 너머에 무지개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 징계를 앞두고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어 월북한 23살의 미 육군 이등병 트레비스 킹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과연 그의 희망대로 징계를 받지 않고 미제 조국을 배반한 대가로 영웅 대접을 받으며 평양에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이제 그의 인생은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점이다. 공동경비구역 북측으로 넘어가는 것은 자유의지였지만, 사실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관할권이 미치는 한반도 북측에서 그는 더는 자유인이 아니다. 그는 이제 3대 세습의 공산주의 유일수령 체제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그가 현실도피처로 인식한 북한이 감옥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먹고, 자고, 움직이는 행동 중에서 그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숨 쉬는 것 이외에는 없다. 그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한 것인지 현실로 돌아와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후회하며 자신의 조국인 미국과 미군이 얼마나 천국이었던가를 절감할 것이다. 그는 미군 헌병들의 감독이 미치지 않는 특수지역으로 탈영해 미군의 관리에서는 벗어났으나 본인의 23년 평생 전혀 경험하지 않은 공산주의 독재체제라는 낭떠러지로 추락한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사랑의 불시착이 아니라 지옥의 불시착이 시작된 것이다.

킹 이병의 월북 다음 날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한국계 미국인 작가 한요셉(조지프 한·32)의 장편 소설 [핵가족](원제 Nuclear Family)에는 미국인의 월북 스토리가 나온다. 하와이 한인 이민 2세대 주인공 ‘제이컵 조’는 북한의 고향이 그리워 DMZ 관광 중 월북을 시도한다. 뿌리가 북한 출신인 한국계 미국인의 월북과 미국이 고향인 킹의 월북은 차원이 다르다.

“하하하 웃더니 달려나갔다”는 스웨던 견학객의 증언이 있었지만, 그는 이제 웃을 일이 없을 것이다. 금지선을 넘어가는 데에는 1초가 걸렸지만, 가족이 있는 미국 위스콘신으로 돌아올 확률은 과거 사례로 볼 때 1%도 안 된다. 당시 판문점에서 킹 이등병과 함께 안보 견학 중이던 외국인들의 목격담은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월북한 23세 미군 앞에 놓인 건 지상낙원이 아니다


▎7월 18일 판문점에서 월북한 트레비스 킹 이등병의 마지막 모습(붉은색 원). 이 사진이 찍힌 직후 군사분계선을 뛰어넘어 갔다.
뉴질랜드 매체 [1뉴스]에 따르면 뉴질랜드에서 관광 온 사라 레슬리는 군인들의 감시 속에 다른 관광객 무리에 섞여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중 킹 이등병이 나타나며 사건이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레슬리는 “갑자기 검은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북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사복 차림이었던 킹 이등병을 보고서는 군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고 단순히 ‘틱톡’ 영상을 촬영하는 줄 알았다”며 “처음 떠오른 생각은 완전히 바보 같은 놈이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상황을 파악한 군인들이 킹을 뒤쫓았지만, 그는 재빨리 모습을 감춰버렸다고 한다. 사건 직후 레슬리를 포함한 단체 관광객들은 인근 건물로 안내돼 들어갔다. 레슬리는 “다들 흥분한 상태였고, 건물에 들어가서는 ‘하느님 맙소사’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고 했다.

또 다른 관광객인 스웨덴의 미카엘라 요한손은 “킹은 우리가 온종일 함께 다녔던 바로 그 단체에 있던 사람이었다”며 “우리 오른쪽에서 시끄럽게 ‘하하하’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남자가 두 건물 사이로 달려가서는 반대편으로 넘어가 버렸다”고 설명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이에 반응하고, 실제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깨닫기까지 1초 정도 걸렸다”며 “우리는 ‘자유의집’으로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고는 군용 버스를 향해 뒤돌아 뛰었다”고 설명했다. 검문소를 들어갈 때는 43명이었으나 나올 때는 42명이었다.

필자는 판문점 JSA를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다. 2000년 상영작인 이병헌, 이영애 주연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를 관람했던 학생들은 판문점을 남한의 안보관광지 정도로 여긴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방문 전에 긴장하라는 정신교육을 한다. 현실의 JSA는 단순 관광지가 아니며 영화 속 JSA와는 천양지차다. 2017년 11월 13일 판문점을 통해 귀순한 오청성 하사 사건은 비무장지대의 위험성을 상징했다. 그는 북한 쪽 북방한계선을 출발해 지프를 몰고 판문점까지 달려와 귀순하려 했으나 수로에 빠지는 바람에 뛰어서 MDL(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은 무려 100발 이상의 자동소총을 발사했고 그중 5발이 명중했으나 극적으로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양측 경비 병력은 실탄이 장전된 경화기로 무장하고 있어 언제든지 순식간에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다.

2007년 5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대북·통일 정책의 상징성 차원에서 공동경비구역 내 회담장을 방문했다. 관례와 달리 북한군 경비병들이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순간 필자는 등골이 오싹했던 경험이 있다. 양측이 시간을 달리해 북측 관람객이 내려와서 견학할 때는 남측 관람객이 견학하지 않는다. 서울과 평양에서 온 관람객이 섞이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다. 통상 판문점 견학에 맞춰 회담장 북측 출입구에 우리 군 경비병 1명이 북한군의 돌발행위에 대비한다. 또 1명은 회담장 한가운데 MDL이 지나는 테이블에 배치돼 경비를 선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북한군은 현장에 인력을 배치하지 않고 판문각에서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다. 북한은 망원경으로 남측 동태와 관람객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한다.

JSA에서 남북을 나누는 것은 쉽게 뛰어넘을 수 있는 경계석뿐이다. 경계석을 기준으로 북측과 남측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유엔군사령부는 평소 일주일에 4회(화·수·금·토), 한 번에 40명씩 한국인과 미국인 등을 대상으로 JSA 견학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지만 사건 직후 이 프로그램을 취소했다.

본국 송환 후 징계 전역 두려워 월북했을 가능성 높아


▎2007년 5월 11일 한나라당 대선 예비후보이던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판문점 JSA를 방문했을 당시 모습. 이 전 시장 뒤로 북한군 장교가 창문을 통해 동향을 관찰하고 있다.
킹 이병은 문제가 많은 관심병사였다. 그는 미국 송환 이후 불명예 제대가 예상되는 후속 조치에 두려움을 느끼고 대형사고를 쳤을 것이다. 그의 계급은 군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미 군사 전문매체 [밀리터리닷컴]은 2년 동안 복무한 킹의 계급이 이병인 것은 징계 등으로 진급이 보류됐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미 육군에서 12개월 복무한 이병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자동으로 일병으로 진급한다고 매체는 전했다.

미군은 모병제지만 부적응 관심병사는 강제 전역시키고 군 복무 이후 연금, 의료 등 각종 혜택을 박탈한다. 예를 들어 ▷대형 사고를 일으킨 병사의 경우 강등에 이은 강제 전역(OTH) ▷범죄사실로 기소돼 실형을 받은 인원에 대해 제대군인 혜택을 일부 박탈하는 징계 전역 ▷기밀 고의 누설, 중범죄 등으로 중형을 선고받은 경우 제적, 군 경력 말소, 이등병 강등, 제대군인 혜택 완전몰수는 물론 총기 소지 등 시민의 권리 일부를 박탈하는 불명예 전역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킹 이병은 한국에서 공용물건 손상 등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만큼 징계 전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킹은 지난해 10월 8일 마포구의 한 클럽에서 한국인과 시비가 붙었고, 이후 출동한 경찰차를 파손한 혐의로 벌금 500만원을 선고받았지만, 벌금을 내지 못해 국내 수용시설에서 노역했다. 그는 지구대 호송과정에서 ‘망할 한국인, 망할 한국군’이라고 난동을 부렸다.

킹은 2021년 1월 정찰병으로 미군에 입대했다. 그는 과거에도 주둔지를 무단이탈한 적이 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4일에도 복무지를 이탈했고, 소재 파악이 된 후에도 기지로 돌아가거나 본국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다고 미국 ABC 방송이 보도했다. 당시 캠프 보니파스에서 수색병으로 복무했던 킹 이병은 캠프에서 40㎞ 떨어진 경기 의정부에서 발견됐다. 캠프 보니파스는 비무장지대(DMZ)에서 남쪽으로 400m, 군사분계선에서는 2.4㎞ 떨어진 경기 파주시 문산읍에 위치한 기지로 한국 육군과 주한미군이 함께 근무한다. 캠프 보니파스에는 판문점 지역 경비를 맡는 한·미 공동경비 중대도 포함됐다.

킹 이병은 월북 전날인 7월 17일 인천공항에서 텍사스주 댈러스행 비행기를 타고 귀국해 주한미군 행정협정(SOFA)에 따라 한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행위에 대한 행정처분을 받을 예정이었다. 호송인력이 인천공항 입국장까지는 킹을 가이드했지만, 출입국 검색대를 통과한 후 킹은 미군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킹이 정상적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탔더라도 텍사스에 도착한 뒤에야 미군 장교들을 만날 예정이었다. 킹이 비행기에 탑승했는지 확인하는 순간까지 호송인력이 동행했다면, 그가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을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자발적 월북 미군 5명 중 돌아온 건 한 명뿐


▎북한에 건너간 미군들. 이들은 북한에서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됐다. 자진 월북한 5명 중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찰스 젠킨스(가운데 노인)가 유일했다.
킹이 인천공항 입국 수속을 받아 입국장에 도착한 후에 어떻게 다시 검색대를 통과해 밖으로 나왔는지는 의문이다. 여권을 분실했다고 출입국 직원에게 이야기해 다시 나왔다는데 이해하기 어렵다. 킹은 7월 10일 47일간의 한국 내 수형시설 구금에서 풀려난 뒤 JSA 견학을 신청했다. JSA 견학은 일주일 전에 신청을 받는다. 미군이 주도하는 유엔군사령부가 킹의 견학을 허가했는데도 미군이 이를 알지 못한 점은 의문이다. 견학 행사를 민간업체가 진행하더라도 명단은 사전에 미군에 통보되기 때문이다.

킹의 가족들은 오토 웜비어와 같은 피해가 발생할까 우려스럽다며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청했다. 킹의 외삼촌인 마이론 게이츠는 미 NBC뉴스 인터뷰에서 “그가 미국을 위해 싸우기 위해 군에 갔을 때 미국은 그를 위해, 그가 집으로 올 수 있게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 킹의 가족들은 웜비어 가족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도움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게이츠는 “최악의 두려움은 내 어린 조카가 그렇게 돌아오는 것”이라며 “킹이 갔을 때처럼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버지니아대 경영학부 소속 대학생이었던 웜비어는 2016년 북한 여행 중 억류돼 2017년 6월 혼수상태로 석방됐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일각에서는 웜비어가 북한 억류 중 고문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과거 미군 병사들의 자발적인 월북 사례는 총 5건이다. 이외에 1건이 더 있으나 미국은 납치라고 주장했고 북한은 자발적인 월북이라고 반박해 논란의 소지가 있다. 1962년 5월 월북한 래리 앱셔 일병이 원조다. 같은 해 8월 월북한 제임스 드레스녹 일병은 앱셔가 “한국에서 대마초 관련 문제가 있었고, 군법회의에 회부돼 군에서 쫓겨날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드레스녹 자신도 상관의 서명을 흉내 내 외출증을 위조했다가 처벌받게 되자 월북을 선택했다. 3년 뒤에는 제리 패리시 상병과 찰스 젠킨스 병장이 월북했다. 패리시는 개인적 이유로, 젠킨스는 베트남 전쟁에 차출될 것이 두려워 월북했다고 한다.

북한 간 미군 고된 사상교육 뒤 체제선전 도구로 쓰여


▎2020년 유엔사령부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개한 ‘핑크폰’. 유엔군사령부는 판문점 내 유엔사 연락장교 사무실에 있는 이 전화기로 북측과 하루 두 번씩 연락한다고 한다.
북한은 미군 병사들이 서방의 자본주의적 삶을 버리고 사회주의 낙원을 택했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북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1966년 주북한 소련 대사관을 통해 망명을 시도했다가 거부당했고, 결코 북한을 떠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들은 이후 북한 선전영화에서 악역 배우를 맡아 활동했고, 북한 내 외국어 교육기관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들은 첫 몇 년의 상당 부분을 자아비판으로 보냈으며, 하루 10시간 넘게 김일성의 가르침인 주체사상을 강제로 배워야 했다.

월북한 미군 병사 중 유일하게 2004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젠킨스는 일본의 납치자 송환 정책의 혜택을 받았다. 2002년 9월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는 수개월간의 물밑 접촉 끝에 평양을 전격 방문했다. 당시 아베 신조 관방부장관이 고이즈미를 수행했고, 고이즈미는 총리가 된 뒤 납치문제에 올인했다. 고이즈미와 김정일 위원장은 북·일 평양선언에 서명했다. 고이즈미는 식민지 시절 한반도 주민들에게 입힌 ‘엄청난 피해와 고통’에 대해 ‘깊은 유감과 마음으로부터의 사과’를 표명했다. 김정일은 일본인 13명을 납치하고 일본 영해에 간첩선을 침범시킨 데 대해 사과했다. 1977년부터 1982년 사이 일본의 외딴 해변에서 여학생, 요리사 및 데이트 중이던 3쌍의 커플에 대한 납치 사실을 인정했다.

1965년 비무장지대를 도보로 월북한 당시 25세였던 미군 찰스 로버트 젠킨스는 북한 공작원들에게 납치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살다가 2004년에 일본으로 귀환했다. 그는 약 40년간 북한에 체류하며 정권 선전 전단 및 영화에 출연해 체제 선전 도구로 활용됐다. 젠킨스의 부인인 소가 히토미는 1978년 일본에서 납치됐다. 젠킨스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은 히토미는 2002년 다른 납북 일본인 4명과 함께 귀국했고, 젠킨스도 2년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생전에 젠킨스는 “나는 너무나도 무지했다”면서 “임시 피난처로 찾았던 나라(북한)가 말 그대로 거대하고 정신 나간 감옥이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누군가 그곳에 가면 거의, 절대로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일본인 부인 덕택에 지옥을 탈출할 수 있었다.

앱셔와 패리시는 1983년과 1998년 각각 병사했고, 드레스녹도 북한에서 201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에 정착한 젠킨스는 2017년 노환으로 숨을 거뒀다. 1982년에는 조지프 화이트 일병이 월북했으나 젠킨스 등과는 접촉한 적이 없고 3년 뒤 익사했다. 북한 측은 1979년 재미교포 출신인 로이 정 일병도 월북했다고 주장하지만, 가족들은 납치라고 반박했고 2004년 전후 사망한 것으로 보도됐다.

크리스틴 워무스 미국 육군 장관은 7월 20일 킹 이등병이 “북한 당국의 손에 있다는 것이 매우 우려스럽다”며,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가 북한에 구금됐을 때를 거론하며 월북 미군 병사의 안위에 중대한 우려를 표했다.

미군 월북은 사실상 ‘자진투항’, 돌려보낼 가능성 낮아

미국 정부는 월북한 킹의 정보를 파악하려고 북한에 연락하고 있지만 평양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 백악관도 미군 월북 사건을 주시하고 있으며 바이든 대통령도 사건을 보고 받았다고 밝혔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부 장관은 7월 21일 킹의 월북과 관련해 “우리는 그의 행방을 알고 싶고 그 정보를 얻기 위해 북한에 연락했다. 불행하게도 더는 공유할 정보가 없다”고 말했다.

7월 24일 앤드루 해리슨 유엔군 부사령관이 외신 상대 기자회견에서 “휴전 협정 하에 확립된 장치를 통해 북한군과 대화가 개시됐다”고 밝혔다. 해리슨 부사령관은 이날 킹 이병 월북 경위 등을 두고 조사가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했다. 또 “최우선 과제는 킹의 안위”라고 했다. 다만 협상 세부 내용에 관해서는 민감성을 이유로 말을 아꼈다.

그가 말한 휴전 협정 하에 확립된 장치란 이른바 ‘핑크폰’이라고 불리는 JSA 판문점 남측 유엔사 일직 장교 사무실의 전화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해당 전화기는 양측 연락 담당자를 직통 연결한다. 밝은 분홍색에 숫자 버튼이 달린 옛날 전화기 모양으로, 유엔사가 지난 2020년 사진으로 공개한 적이 있다. 유엔사는 매일 하루 두 차례씩 해당 전화기를 사용한다. 통상 핑크폰 외에 그간 킹 이병 관련 논의가 이뤄질 수 있는 대북 채널로는 뉴욕 주재 북한대표부 및 스웨덴 대사관 등이 거론된다.

지금까지 월북 미군 장병들의 사례를 보면 월북 미군 장병의 존재는 북한에도 장기적으로 가성비가 낮아 관리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월북 미군이 오면 그 한 사람을 위해 전문 경호 및 감시팀이 꾸려지고 통역관을 배치해야 하며 전용 차량과 기사, 그가 머물 숙소 등을 챙겨야 한다. 킹의 경우 일부 군사정보는 얻을 수 있겠지만, 직급이 낮아 큰 정보는 없을 것이다. 만일 평양이 그를 송환하지 않고 북한에 남겨 두기로 결정한다면 그를 북한체제에 적응시키기 위한 세뇌 교육이 필요해서 전문 교사팀과 교육 커리큘럼도 짜야 한다.

북한이 북·중 국경을 통해 밀입북한 미국인들을 돌려보낸 사례가 있으나, 자진 월북 미군은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에서 적군에 자진 투항한 사건이어서 돌려보내기가 쉽지 않다. 최근 북한이 한·미의 대북정책에 강력히 반발하고 있어 월북한 미군을 당장 돌려보낼 가능성은 작다. 그는 평양에서 무기징역에 가까운 삶을 살 것이다. 미국은 평양에 있는 외국 대사관을 통해 그에 대한 영사 접근도 시도하겠지만,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세계 최강의 미군도 할 수 있는 것은 매우 제한적이며 그를 전쟁포로로 관리할 명분도 없다. 한국군이나 미군 모두 관심병사는 늘 골칫덩어리다.

※ 남성욱 -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고려대 북한학연구소장을 지냈다. 201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뒤 후학 양성과 북한 문제 연구에 전념해오고 있다. [김정은의 핵과 경제](2022, 박영사), [북한 여성과 코스메틱](2017, 한울아카데미), [한반도 상생프로젝트](2009, 나남) 등 북한 문제에 관한 다수의 책을 펴냈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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