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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 (14)] 한류스타 원조 격인 조선 중기 화가 김명국 

거침없고 호방한 필치에 일본 열도가 열광 

‘달마도’의 주인공… 침체한 조선 화단 수준 높여
산수화·인물화·화조화·사군자 등 모든 그림에 능통


▎김명국의 달마도. 일본에 통신사를 수행해 갔을 때 그려준 그림이다. 당시 김명국은 일본에서 오늘날 한류스타급 인기를 누렸다. 일본 측의 요청으로 조선통신사 역사상 유일하게 일본 사행을 두 번이나 했을 정도였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중기 어느날 스님 하나가 도화서 화원 김명국을 찾아왔다. 김명국은 오늘날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도 조선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이 있었다. 스님은 가져온 옷감을 김명국에게 내밀며 청했다. 자신이 주지로 있는 절의 명부전에 걸 [지옥도]를 그려달라는 얘기였다.

명부(冥府)란 불교에서 사람이 죽어서 가는 세계를 말하며, 명부전은 사찰에서 그러한 사후세계를 구현해 놓은 전각을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명부의 심판관인 열 명의 시왕(十王)과 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그래서 시왕전 또는 지장전이라고도 불린다.

조선 중기 대표 화가로 재평가


▎김명국의 [노엽달마도]. 갈대 잎을 타고 강을 건너는 달마를 그리고 있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불교에서는 중생이 죽으면 육신을 벗어나 전생의 업보를 심판받는다고 믿는다. 죽은 날부터 49일까지 7일을 단위로 열 명의 왕 중 진광왕, 초강왕, 송제왕, 오관왕, 염라왕, 변성왕, 태산왕의 심판을 차례차례 받는다.

이 49일의 기간을 중음(中陰)이라고 하는데, 죽은 후 다음 생을 받기까지의 기간이다. 보통 중음 동안 다음 생의 연이 정해지므로 죽은 사람이 좋게 환생할 수 있도록 7일마다 불경을 읽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재(齋)를 지낸다. 그것이 바로 사십구재다.

업보가 많아 사십구재를 지내도 죄가 남아 있는 중생들은 다시 죽은 지 100일째와 1년째(소상), 3년째(대상)에 평등왕, 도시왕, 전륜왕 등 나머지 3대 왕에게 차례로 선악의 업을 심판받는다.

지옥도는 이처럼 죽은 자들이 각각의 시왕이 다스리는 지옥에 가 심판받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각 지옥마다 심판의 내용과 처벌이 다름은 물론이다. 망자들은 사후 7일 만에 첫째, 도산지옥(刀山地獄)에 도착하고, 진광왕은 거짓말을 많이 한 죄인들에게 칼로 된 산을 맨발로 걷게 하는 형벌을 내린다.

둘째, 화탕지옥(火湯地獄)에서는 도둑질하거나 빚을 갚지 않은 죄인들이 초강왕으로부터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는 벌을 받는다.

셋째, 송제왕이 관장하는 한빙지옥(寒氷地獄)에서는 불효한 죄인들을 꽁꽁 언 얼음 계곡에 가두는 벌이, 넷째, 오관왕의 검수지옥(劍樹地獄)에서는 위험에 처한 이웃을 돕지 않은 죄인들에게 칼날 숲을 헤매는 벌이 내려진다.

다섯째, 발설지옥(拔舌地獄)에서는 다른 사람을 헐뜯은 죄를 지은 중생들의 혀를 뽑고 그 위에서 소가 밭을 갈게 하는 형벌을 내린다. 이 지옥을 관장하는 이가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이다.

여섯째, 독사지옥(毒蛇地獄)에서는 변성왕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강력범죄자들을 독사 구덩이에 던지고, 일곱째, 거해지옥(鋸骸地獄)에서는 태산왕이 사기꾼들에게 몸을 톱으로 자르는 형벌을 내린다.

여기까지 오면 죄인들이 어디로 갈지 정해지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죄가 보다 중하거나 검증이 더 필요한 사람들은 다시 세 지옥을 더 거치게 된다.

사후 100일째에 가는 철상지옥(鐵床地獄)에서 평등왕의 심판을 통과하지 못한 죄인들은 못이 빽빽하게 박힌 침상에 누운 채 못에 관통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부정하게 재물을 모은 망자들이다.

사후 1주기에 심판받는 풍도지옥(風途地獄)에서는 성범죄자들의 살을 찢고 칼바람을 맞게 하는 벌을 내리며, 도시왕의 심판을 통과한 망자들은 이곳에서 1년간 체류하며 선한 일을 하도록 한다.

사후 3년째 가는 마지막 흑암지옥(黑闇地獄)에서는 오도전륜대왕의 재판에서 패소한 죄인들이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느낄 수도 없는 암흑 속으로 던져진다. 생전에 남녀 구별을 못하고 자식을 낳지 않은 죄, 부모나 스승의 물건을 훔친 죄인들이다.

이어 최종 판결을 내려 육도윤회를 끝내게 된다. 6도 중 천상도를 제외한 인간도·아수라도·축생도·아귀도·지옥도 중 어디로 환생할지 결정되는 것이다.

명성에 비해 남긴 작품 많지 않아


▎김명국의 [수노인도]. 도교에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남극성을 고결한 신선의 모습으로 의인화한 그림이다. 생일이나 회갑 때 장수를 기원하며 선물했다. / 사진:울산박물관
이 같은 시왕 사상은 불교의 정통 교리라기보다는 도교 등의 영향을 받은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결과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 같은 이는 시왕 사상이 기복 성향을 유발해 불교를 퇴보시키는 원인이라며 철폐론을 강력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민족의 내세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독특한 불교신앙으로 자리잡아왔다. 국내 대부분 사찰에 존재하는 명부전에 지장보살이 봉안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지장보살은 석가여래가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천상에서 지옥까지의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는 이미 여래의 경지를 얻었지만 성불을 포기했다. 모든 중생, 특히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까지 모두가 성불하기 전에는 자신도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모든 중생이 성불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니 성불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중생들을 가차 없이 심판하는 시왕들이 있는 곳에 그처럼 대자대비한 지장보살을 함께 모심으로써 궁극적인 구원을 바란 것이다.

명부전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은 김명국의 그림이 어땠을지 상상하기 위함이다. 오늘날에는 전하지 않아 볼 수 없는 까닭이다. 지옥도는 앞서 말한 열 개의 지옥에서 죄 지은 망자가 형벌을 받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끔찍한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죄를 짓지 않도록 선도함과 동시에, 대자대비한 지장보살의 구제를 얻기 위해 사찰에 더욱 많은 보시를 하게 만드는 목적이 있음은 물론이다.

김명국은 지옥도를 그려주기로 약속하고 받은 옷감을 술로 바꿔와 술독에 빠져 살았다. 스님이 몇 번이나 찾아와 독촉했지만 그때마다 김명국은 그림을 그리려면 술이 더 필요하다고 말해 스님으로 하여금 술을 받아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반쯤 취한 상태의 김명국이 붓을 잡았다. 마침내 그림이 완성되자 마치 처참한 지옥의 참상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했고, 형벌을 받는 망자들의 고통스런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스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옥도 속에서 고통 받는 죄인들이 모두 머리를 삭발한 승려들 아닌가. 스님이 항의하자 김명국은 태연히 대답했다.

“너희 중 무리가 불도로 백성들을 미혹했으니 지옥에 떨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크게 실망한 스님은 계약 파기를 선언하고 자신이 준 옷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김명국은 껄껄 웃으며 술을 더 가져오면 고쳐 그려주겠노라고 말했다. 스님이 마지막으로 속는 셈 치고 술을 받아 다주자 김명국은 연거푸 세 잔을 들이켠 뒤 스님들 머리에 머리카락을 그려놓고 승복에 색을 칠했다.

그러자 그림은 이내 뭇중생들의 아비규환 지옥도로 바뀌었다. 스님이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그림을 들고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이 일화처럼 김명국은 무척이나 술을 좋아해 취해 있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다.

조선 후기 여항문학(조선 중·후기 한성부에서 중인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문학 운동)을 주도한 정내교는 자신의 문집인 [완암집(浣巖集)]에서 김명국을 “성격이 호방하고 해학에 능했으며 술을 좋아해 몹시 취해야만 그림을 그리는 버릇이 있었다. 따라서 그가 남긴 대부분의 그림들이 취한 뒤에 그려진 것”이라고 평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취옹(醉翁)이라 불렀으며, 김명국 자신도 이 호칭이 마음에 들었는지 평소 사용하던 연담(蓮潭) 외에 취옹도 호로 사용했다.

'지옥도' 등은 기록으로만 남아


▎김명국의 [수노인도] 상단의 제찬. 17세기 교토의 큰절 도후쿠사의 주지를 지낸 다이카 레이센이 쓴 것이다. 그는 1663~1665년 대마도에서 조선·일본 외교 관련 사무를 맡은 윤번승으로 활약했다. / 사진:울산박물관
술을 좋아하고 취해야만 붓을 잡는 김명국의 기질은 당연히 그의 작품들을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필치로 이끌었다. 지옥도를 청탁한 스님의 경우처럼 사람들의 입을 벌어지게 한 사례가 또 있다.

김명국이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조선에서 유명한 화원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인들이 김명국에게 그림을 부탁하려고 몰려들었다. 그런데 한번은 한 일본인이 아무 그림이 없는 빈 병풍을 펼쳐놓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김명국은 평소처럼 커다란 술잔에 가득 부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붓을 잡았다. 그런데 붓에 먹을 듬뿍 찍더니 병풍에 좍 뿌리는 것이 아닌가. 주위에 몰려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해 낯빛이 변했다. 너무 놀라서 부들부들 떠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먹이 흩뿌려진 병풍 위에 김명국의 붓이 지나가자 그 자리에 늙은 매화나무와 대나무, 산과 바위, 벌레와 짐승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붓놀림이 더해지자 그 모습들의 형태가 완전히 갖춰져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솜씨였다. 사람들이 입을 다물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성호 이익이 김명국의 그림 모음집인 [연담화첩] 발문에서 전하는 이야기다.

김명국의 거침없고 호방한 필치는 그 유명한 달마도에서 유감없이 발휘된다. 김명국이란 이름은 몰라도 그의 달마도를 보면 누구나 ‘아, 이거’라는 감탄사를 외치게 될 것이다. 커다란 눈을 부라리고 기다란 눈썹으로 팔(八)자 주름을 만들어 잔뜩 찌푸린 미간이지만 결코 무섭지 않다.

커다란 매부리코와 숱 많은 콧수염, 무성한 구레나룻이 이국적이지만 오히려 친근한 인상이다. 진한 먹물로 굵고 빠르게 친 가사의 선과 농담의 차이를 둬 얼굴 부분은 보다 심심한 담묵으로 처리해 부드러움을 줬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붓에 먹을 묻히기가 무섭게 단숨에 그려냈다. 그래서 오히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달마가 어떤 사람인가. 인도 남부 향지국의 왕자로 태어나 불교에 귀의한 뒤 동쪽(중국)으로 가 선종을 최초로 가르친 1대 조사로, 소림사에서 9년 동안이나 면벽 수행했다는 인물이다. 그토록 용맹정진할 수 있는 굳센 심지를 표현하려면 본질이 아닌 부차적 껍데기들은 모조리 떨어내야 하지 않겠나.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의 말대로 “몇 줄의 짙고 옅은 먹선으로부터 강력한 의지와 고매한 기상이 곧바로 터져 나온다.”

‘달마도’는 일본인이 기증한 작품


▎김명국 그림으로 알려진 신선도 중 하나. 진나라 사람 황초평이 득도해 신선이 된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렸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이 같은 김명국의 거침없는 신필에 더욱 열광한 것은 이웃나라 일본이었다. 문자 그대로 한류(韓流)스타의 원조였던 것이다. 그는 조선통신사를 수행하는 화원 자격으로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일본을 다녀왔다. 당시 일본에서는 참선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선종이 대세였다. 화풍 또한 선승화가 유행했다. 당시 조선 화단은 교화나 계도를 목적으로 하거나 속세를 떠난 은자를 묘사하는 고사 인물류가 인물화의 대종을 이룬 반면, 일본에서는 구복적 목적으로 도교나 불교와 관련된 초자연적 인물을 그리는 도석인물화(道釋人物畵)가 많이 그려졌다.

그런데 김명국의 특기가 바로 도석인물화였고, 그것이 일본의 당시 화풍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특히 그의 호방하고 대담한 필치와 기질이 얌전한 선종화에 식상한 일본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줬던 까닭이다.

일본에서 김명국의 인기는 그야말로 오늘날 아이돌 스타들이 누리는 인기와도 같았다. 조선통신사 수행 화원의 임무는 주요 외교 사례를 기록으로 남기고 현지 풍물 등을 그려 조선에 소개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민간외교 차원에서 그림을 요청하는 현지인들이 있으면 그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김명국에게 그림을 청탁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전 열도가 김명국에 열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김명국을 졸졸 따라다니는 일본인들도 많았고, 통신사가 머무는 숙소 앞에는 일본인들의 긴 줄이 밤새도록 줄어들 줄 몰랐다.

아무리 일필휘지로 그린다고 하더라도 잠도 못자고 하루 수백 장씩 그리려면 얼마나 힘들었겠나. 통신 부사 김세렴은 1636년 11월 14일자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왜인들이 밤낮으로 모여들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한 김명국은 심지어 울려고까지 했다.”

공식 화원 김명국이 일본에 두 차례나 파견된 것 자체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었다. 총 12차례의 조선통신사 역사에서 공식적으로 두 차례 파견된 화원은 김명국이 유일했다. 일본 측에서 “연담 같은 사람이 오길 바란다”며 김명국을 직접 거명하며 파견을 요청해왔기 때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달마도 역시 이때 아니면 1643년 둘째 사행 때 일본인들에게 그려준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42년 모리모토(森本)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이 기증했다고 한다.

김명국이 일본에서 밤을 새워가며 그림을 그려줬지만 확인된 사례는 거의 없다. 그런데 지난 2020년 연담이 일본에서 그렸다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작품이 발견됐다. 족자그림 [수노인도]가 그것이다. [수노인도]는 도교에서 인간 수명을 관장하는 별자리 남극성(南極星)을 신선의 형상으로 의인화한 그림이다. 주로 생일이나 회갑 때 장수를 기원하며 선물하는 것이다.

일본 내 인기 증거물 '수노인도'

김명국의 [수노인도]는 족자 하단에 머리가 크고 이마는 기괴할 정도로 높은 수노인이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모습이다. 하단 왼쪽에는 취옹이라는 서명이 친필로 쓰여 있고, ‘김명국인(金明國印)’이라는 낙관이 찍혀 있다. 족자 상단에는 대마도에서 통신사 접대를 담당하던 윤번승 다이카 레이센이 쓴 제찬(題贊: 감상이나 내력을 적은 글귀)이 있다.

그는 교토의 도후쿠사 주지를 지낸 당대 지식인이었다. 김명국 그림에서 일본 유명인사의 내력이 확인된 것은 [수노인도]가 처음으로, 조선과 일본 간 통신사 문화교류의 단면을 보여주는 희귀 사료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 그림은 현재 울산박물관이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그렇다고 김명국이 도석인물화만 잘 그린 것은 아니었다. 도화서 화원이 되려면 산수화·인물화·화조화·사군자 등 모든 그림에 능통해야 했고, 왕의 어진을 그리는 만큼 생생한 묘사력이 필수였다.

그의 그림 실력을 설명하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공주가 김명국에게 머리빗을 보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며칠 뒤 빗을 가져왔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공주가 머리를 빗다가 빗의 가장자리에서 머릿니 두 마리를 발견했다. 손톱으로 눌러 죽이려 했는데 죽지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그림이었다.

공주의 머리빗에 이를 그려준다는 게 선뜻 믿기지 않는 일화지만, 그만큼 생동감 있는 묘사력을 설명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신사임당이 꽃을 그렸더니 나비가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얘기처럼 말이다.

김명국은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걸쳐 유행한 절파(浙派) 화풍의 대미를 장식한다. 절파는 중국 명나라 때 절강성 출신 화가들이 유행시킨 화풍으로, 원나라 때 문인 화가들과는 달리 저잣거리 풍경이나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 같은 일반 서민들의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중에서도 산수인물화가 등장하게 되는데, 산수가 중심이 되는 산수화와는 달리 중심 주제가 인물이 되고 산수는 배경에 머물게 된다. 그러다보니 배경인 산수는 필묵이 거칠고 흑백 대비가 심하며 자유분방하고 율동감이 넘친다.

특히 김명국의 그림은 절파 중에서도 후기의 광태사학파(狂態邪學派) 화풍의 작품이 많다. 광태사학파란 이름 그대로 ‘미친 행동을 멋대로 하는 무리’, ‘그림에 있어 사학의 무리’라고 비판하는 이름이다. 절파 화풍이 유행하자 당시 명나라 문인 화가들이 이를 비하해 붙인 것이다.

하지만 힘 있고 거친 필치와 명암 대비가 강한 묵법, 자유로운 준법 등은 김명국의 장기를 백번 살리는 기법이 아닐 수 없었다. 김명국의 [산수도], [설중귀려도], [심산행려도], [기려인물도], [관폭도] 등에서 그런 화풍이 잘 드러난다.

술에 취해야만 붓을 잡던 괴짜

특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답설심매도]는 마른 붓을 날카로운 각도로 대담하게 휘둘러 원경의 눈 덮인 산봉우리를 묘사하는 기법이 두드러진다. 매서운 추위에 사방이 딱딱하게 얼어붙은 한겨울에 행여나 놓칠까 어딘가에 피어 있을 매화를 찾아 눈을 밟으며 집을 나서는 선비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잠에서 덜 깬 듯 팔을 들어 얼굴을 감싸고 사립문에 기댄 채 그를 배웅하는 동자와 어여 들어가라고 손을 흔드는 선비의 모습이 정겹다.

조선 중기를 풍미했던 절파 화풍은 김명국을 정점으로 쇠퇴했다. 조선 시대 최고의 미술평론가라 할 수 있는 18세기의 문인 남태응은 자신이 지은 비평서 [청죽화사(聽竹畵史)]에서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라고 극찬했다.

[청죽화사]에는 또 다른 일화도 나온다. 김명국은 일본 체류 중 한 장군의 초청을 받았다. 지역 권력자로 기세가 등등한 인물이었던 장군은 고급 비단을 벽과 문에 바른 세 칸짜리 건축물을 새로 지은 터였는데, 마침 김명국이 일본에 오자 그에게 장병화(障屛畵)를 청한 것이었다.

장병화는 금박이나 은박을 섞은 물감으로 벽화처럼 문과 벽, 병풍 등에 그리는 그림을 일컫는다. 칸막이로 공간을 나누는 일본 건축 특성에 맞춰 16~17세기에 크게 유행하던 것이었다. 장군은 김명국이 술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푸짐한 주안상도 준비시켰다.

이윽고 취기가 오른 김명국 앞에 금가루를 탄 먹물이 놓였다. 그런데 김명국은 붓을 잡는 대신 금물을 술처럼 들이켜더니 사방 벽에 뿜어 내뱉었다. 화가 난 장군이 벌떡 일어나 칼을 빼들었다. 하지만 김명국은 호탕하게 웃으며 술을 한 잔 마셔 입을 씻어 낸 뒤 맨붓을 쥐고는 벽에 묻은 금물 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벽에 튄 금가루와 먹물이 그의 붓이 지나가는 길을 따라 바위를 만들어내고 암벽처럼 치솟았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폭포수가 쏟아지더니 힘찬 물길을 이뤄 강으로 흘러들었다. 강가에는 수양버들이 한두 그루씩 자라나 이내 숲을 이루고 풍성한 가지들을 강물을 향해 내려뜨렸다. 나룻배 위에서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 등 뒤로 안개가 자욱하고 그 뒤로 산들이 첩첩이 겹쳤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미친 듯이 춤을 추던 김명국의 붓이 멈추자 사방에 선경이 따로 없는 산수화가 펼쳐졌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마치 무릉도원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그림은 훼손 방지용 기름을 바른 채 남태응 당대까지 보존돼 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 참으로 아쉽다.

김명국은 임진왜란 이후 침체했던 조선 화단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성호 이익은 당대 이름 있는 시서화 수집가였던 중빈 이관휴와 그림 품평을 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글씨는 신라의 승려로부터 근래 황기로의 초서와 한호의 해서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대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는데, 화가들 중에는 누가 이들과 비견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한 이관휴의 대답이 이렇다.

“안견 이전의 화가에 대해서는 살펴볼 길이 없으나 이후로는 지금까지 세상에 이름난 이가 끊이지 않고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근래 김명국이 그린 [노선도(老仙圖)]는 짙고 원숙한 화풍이 흡사 석봉(한호)에 필적할 만하고 각종 기이한 새와 짐승에 표현된 화풍은 고산(윤선도)의 풍격을 새로운 모습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석봉에 뒤지지 않고 고산과도 대등하니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연담화첩] 발문에 전한다.

이처럼 일본 열도를 열광케 한 김명국이지만 국내에서는 상대적으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미천한 출신 탓이다. 1600년 무렵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 정확한 생몰연도가 확인되지 않는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어떻게 화원이 됐는지도 모른다.

의궤에 적힌 그의 이름 한자도 세 가지(明國, 命國, 鳴國)로 다르다. 자신이 바꿔 썼을 수도 있지만, 왕실 기록을 남기는 데 화원 이름 따위는 중요치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술이 오히려 자유분방한 필치 이끌어내


▎김명국의 [답설심매도]. 전형적인 절파 화풍의 산수인물도다. / 사진: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김명국은 그림 실력 하나만으로 도화서에 들어가 화원 추천과 선발 업무를 담당하는 종6품 교수가 됐고 정6품까지 올랐다. 1647년 창경궁 중수 공사 때 화원 6명과 화승 66명을 데리고 책임 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호방한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게 이재에도 밝았던 모양이다. 당시 일본에서도 인삼의 인기가 높아 통신사 일행 가운데 역관 등 중인들이 인삼을 몰래 가져가 파는 사례가 많았다. 김명국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1636년 방일 때 정사였던 임광의 [병자일본일기(丙子日本日記)] 11월 18일 기록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일행을 검색할 때 김명국의 인삼 상자가 또 발각돼 밉살스러웠다.’

이 밖에도 김명국은 이익을 챙기다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둘째 사행에서도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을 거절하고 돈을 많이 주는 상인들의 요구를 좇아 그림을 그려줬다가 비난을 받았고 귀국 후 처벌도 받았다. 국가의 명예를 떨어뜨리고 국익을 가벼이 여긴다고 욕할 수 있을지 모르나, 어찌 보면 오히려 예술이 국격을 높이는 길임을 일찌감치 발견한 선각자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2022년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2023년 초 첫 소설 [화살 끝에 새긴 이름]을 발표했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을 펴냈다.

202402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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