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유성운의 기후와 문화 그리고 작품을 찾아서 (19)] ‘킹덤 오브 헤븐’, 중세 온난기가 부추긴 십자군 전쟁 

종교는 명분적 구실, 진짜 목적은 영지와 재물이었다 

‘중세 온난기’가 열리자 유럽 인구 2배 이상 증가해
인구 폭증에 경지 부족해지자 이슬람 땅 눈독 들여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한 장면.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종교는 명분적 구실이었고, 실제 목적은 영지와 재물이었다. / 사진:킹덤 오브 헤븐] 스틸컷
2023년 1월, 런던의 한 유서 깊은 성당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런던에서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유서 깊은 곳 중 하나가 이곳 템플성당 아닐까 싶다. 그 유명한 템플기사단의 교회다.

거창한 입구나 대단한 표식이 없고 길가에 흔하고 작은 문 하나가 있을 뿐이라서 그냥 지나치기 딱 좋다. 작은 문으로 들어와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오면 훅하고 시야에 들어온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성모 마리아가 묻힌 곳의 단서를 찾는 과정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템플기사단은 제1차 십자군원정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기독교 세력이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기사단이다. 유럽 각지에서 후원이 쏟아져 막대한 부를 일궜고, 나중엔 그들이 소유한 보물과 부동산을 탐낸 영국과 프랑스 왕에 의해 각종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제거되는 비극도 겪었다. 일각에선 이들이 성배를 갖고 있었다고도 하나 확실치는 않다. 템플기사단을 둘러싼 이야기는 워낙 극적이고 흥미로워서 서구 역사가나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는데, 나중엔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까지 연결되는 고리이기도 하다.

템플성당은 13세기 잉글랜드의 존 왕이 기사단에 증정한 땅에 세워졌다. 성지 예루살렘이 다시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간 뒤 템플기사단은 그리스도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세웠던 예루살렘 성당을 본따 이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영국의 여느 교회와는 건축 양식이 매우 다르다. 내부에는 십자군 관련 자료나 기사단의 연혁 같은 자료도 볼 수 있다.

로마가 사라진 추운 유럽


▎영국 런던의 템플성당. 템플기사단은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기독교 세력이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립한 기사단이다. / 사진:유성운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변방에 있는 나라였다. 하지만 이런 나라조차도 십자군 전쟁의 열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체 십자군 전쟁은 왜 이렇게 유럽을 뜨겁게 달굴 수 있었던 것일까.

3세기부터 유럽은 긴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한랭기의 여파로 게르만족이 남쪽으로 대거 내려오자 그 혼란으로 인해 서로마제국이 붕괴됐고, 서유럽은 게르만족 일파가 세운 여러 왕국으로 분열됐다. 이들은 로마 제국과 달리 중앙집권적 정치 시스템을 제대로 완비하지 못했다. 군사나 식량을 충분히 확보할 시스템이 없다 보니 군대도 제대로 육성하기가 어려웠다. 한랭화와 기후 불순은 농업 생산량의 악화와 영양 부족, 출산율 감소, 인구 감소를 가져왔다. 이런 유럽의 퇴조는 이슬람 세력의 융기로 이어졌다.

아라비아에서 시작한 이슬람 세력은 무서운 기세로 치솟았다. 육지에서는 동로마제국의 판도였던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에 이어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가 통째로 넘어갔다. 그나마 프랑크 왕국의 카를루스 마르텔이 투르·푸아티에 전투(732)에서 이슬람의 북진을 막지 않았다면 프랑스까지 이슬람의 판도로 넘어갔을 것이다. 로마가 ‘우리 바다(Mare Nostrum)’로 불렀던 지중해도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갔다. 해상 무역의 쇠퇴는 물론 남부 이탈리아는 이슬람 해적들의 침공에 주민들이 끌려가 노예 시장에서 매매되곤 했다. 이때의 유럽은 그저 이슬람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로마가 로마 온난기(Roman Climatic Optimum)라고 부르는 기후의 축복을 받았던 반면 중세 전기의 유럽은 이처럼 기후의 가혹한 시련을 견뎌야 했다.

이런 사정은 유라시아 대륙 건너편에 있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진(晉)은 유목 민족의 침공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중원은 5호(胡)라고 불린 흉노(匈奴)·갈(羯)·선비(鮮卑)·저(氐)·강(羌) 등 유목 민족들이 잇달아 정권을 수립하는 등 16개의 나라가 흥망을 되풀이하는 혼란상이 이어졌다.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로마가 무너진 뒤 게르만족들이 과거 로마 영토에 여러 개의 나라를 세운 것과 비슷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쫓겨간 진나라 왕족은 유목 민족의 공세를 피해 남쪽으로 이동한 뒤 옛 오나라의 영토인 양쯔강 인근에 동진을 건국해 겨우 한족 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10세기부터 반전이 시작됐다. 긴 한랭기를 종식시키는 ‘중세 온난기’가 열리면서다. 이때 상승한 온도 덕분에 서유럽의 여름 평균 기온은 과거 수준을 회복했다. 학자들에 따르면 20세기 평균보다 0.7~1.0℃가량 높았다고 한다. 북유럽에서도 포도밭을 만들 정도로 날씨는 온화했고, 과거와 같은 식량 생산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식량은 불확실성을 달래주는 힘이 있다. 중세 유럽에 이슬람 못지않게 공포를 안겼던 바이킹들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들은 프랑스 북부와 잉글랜드, 시칠리아 섬 등에 정착하면서 더는 주변을 침략하지 않았다. 정착과 농업이 본격화되자 유럽은 다시 인구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1000년~1300년대 중반까지 유럽 인구는 3500만 명에서 8000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은 노동력과 군대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럽의 반격, 십자군 전쟁


▎예수 당시 유대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지금은 이슬람 모스크가 서 있다. 이슬람교를 창시한 무함마드가 이곳에서 승천했다고 해, 이슬람교 3대 성지 중 하나로 꼽힌다.
로마 시대 이후 제해권이 넘어갔던 지중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됐다. 온화해진 기후로 인해 유럽 각지에서 숲이 회복되면서 선박을 건조할 목재가 풍부해진 것이다. 지중해 해상 무역 세력이었던 이탈리아 남부의 베네치아, 제노바, 아말피 등의 도시들이 강력한 해군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억눌려왔던 기독교 세력이 땅을 되찾겠다는 일명 레콩키스타(Reconquista) 운동을 시작했다. 유럽은 이제 이슬람 공포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아니, 이제는 그 이상을 노릴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을 충분히 회복했다. 이렇게 유럽의 반격으로 시작된 것이 십자군 전쟁이다. 물론 십자군 전쟁은 비잔틴 제국의 약화로 성지가 이슬람 세력에게 넘어갔다는 종교적 명분이 강력하게 작용했다. 하지만 당시 이슬람 세력은 유럽에서 온 순례자들의 성지 방문은 막지 않았기 때문에 순례는 얼마든 가능했다.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종교는 명분적 구실이었고, 실제 목적은 영지와 재물이었다는 이야기다.

유럽은 인구와 증가하고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경지가 부족해지는 상황까지 도달했다. 식량을 증산하기 위해, 계속해서 숲의 나무를 베어 농지로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잘라낸 나무는 배를 건조하거나 성당을 건축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 웨스트민스터사원, 샤르트르 대성당, 쾰른 대성당 같은 하늘을 찌를듯한 고딕 양식의 성당들이 잇달아 건설됐다.

급기야 귀족들은 자녀에게 나눠줄 영지가 부족해졌고, 상인들은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고 싶어 했다. 또한 평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을 세워 신분을 상승시킬 좋은 기회였다. 다시 말해 유럽은 인구와 힘을 어디론가 확장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포화상태가 되면서 그 표적을 동쪽으로 잡은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여러 차례 반복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예컨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뒤 그 힘을 조선으로 향했던 것처럼 말이다.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고 모든 것이기도 하다”는 대사는 이런 배경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다.

중국의 역사서 [신당서]에 따르면 발해의 수도였던 중경현덕부에 속한 노주(盧州)의 특산물은 쌀이었다고 한다. 이곳은 북위 43도에 해당하는 지역이니 연해주와 비슷한 위도다. 이런 북쪽 지방에서 쌀을 특산물로 내놓을 정도로 농경이 발달했다는 것은 동아시아 역시 중세 온난기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동아시아의 중세 온난기


▎장자 상속이 일찍 자리 잡은 유럽에서는 둘째나 셋째 아들은 유산을 거의 상속받지 못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십자군 전쟁이나 신대륙 개척 같은 일에 뛰어들어 신분을 상승시키려 했다.
가장 따뜻했던 시기는 11세기로, 중국사에서 북송 시대 진종에서 철종 시대의 100년으로 본다. 송나라는 실제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비약적으로 경제와 문화가 발달한 시기로 꼽힌다. 송대에는 철을 단련하는 용광로와 수력 방직기, 화약과 강노, 물시계 등이 송나라 때 발명됐고, 건축에 아치형 다리와 받침대가 쓰였다. 조선업이나 항해술도 대단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 나침반과 수력 터빈을 사용했다. 또한 수차의 개발로 계단식 논을 통한 쌀의 집약적 재배가 가능해졌다. 잉여 식량이 생산되자 상업이 활발해지고 이와 더불어 운송, 숙박 등 서비스업 등이 함께 맞물려 발달하면서 지폐와 어음도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영국 옥스포드 너필드 컬리지(Nuffield College, Oxford)의 스티븐 브로드베리 교수에 따르면, 송나라는 1020년에 1인당 GDP가 1000달러(1990년 가치 기준)를 돌파했다. 참고로 영국이 1000달러를 돌파한 것은 이로부터 400년 가량이 지난 1400년대부터였다.

그런데도 송나라는 왜 산업혁명 같은 시기에 도달하는 데 실패했을까. 송대에는 후세에 영향을 끼친 많은 사상가가 배출됐다. 주희를 비롯해 주돈이·정이·정호 등이 대표적이다. 당시 송나라에선 이들을 도학가라고 불렀다. 이들은 당시의 정치·사회·경제 문제를 도덕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고, 도덕으로 법률을 대신하려는 경향을 만들어냈다. 사유재산 보호 같은 민법을 발달시키기보다는 천리와 인욕, 선과 악 등으로 모든 것을 구별했기 때문에, 실제 현실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상인들이 관리가 될 수 없도록 한 것은 탐욕스럽고 비루한 풍속을 방지하고 진실한 기풍을 북돋우기 위한 것”([염철론])이라는 관념은 오랫동안 중국 관료 사회를 지배했다. 사익 추구는 경계됐으며 최대한 억제하는 분위기였다. 경제 정책은 정확한 규정이나 법령에 의해 좌우된 것이 아니라 당대 정권의 도덕적 기준에 맞춰 재단됐다. 무능한 관료에 맞서 양산박에서 활동한 108명의 호걸을 다룬 [수호지]가 송대를 배경으로 쓰인 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경제는 유사 이래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했는데, 서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왕안석의 변법 실패 등 의욕이 앞선 개혁안이 좌초돼 혼란을 가중시켰고,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울 뿐 현실 정책에선 무기력한 정부에 대한 불신이 극도로 커졌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레이 황은 송나라의 쇠퇴를 놓고 “도학가들의 사상은 좁게는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강조했고, 개인의 사적인 이익과 관련된 개념을 말살했다. 오늘날 중국의 민법 발달이 미진하고 도덕관념으로 법률을 대신하는 경향을 보이는 건 송대의 유학자들과 무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송나라 이후 중국은 약 700년간 같은 수준을 맴돌았다. 송나라의 도학 발달이 민생에 남긴 후유증이 이토록 컸다.

※ 유성운 - 중앙일보 기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기후환경학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저서로 [걸그룹 경제학], [리스타트 한국사도감], [사림, 조선의 586]이 있으며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세계사 속 중국사도감] 등을 번역했다.

202402호 (2024.0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