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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다이사쿠 칼럼] 미국 하버드대학교 강연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3) 

현대문명이 가야 할 제3의 길은 ‘자타(自他)의 융합’ 

과학기술 성과 이룬 ‘이성 만능주의’가 현대 문명 위기 불러
‘자력’ ‘타력’ 맹신 버리고 조화 이뤄야 ‘인간복권’ 가능해져


▎자력(自力)은 홀로 완전할 수 없다. 유한한 자신을 초월한 영원한 타력과 융합해야 비로소 완전히 작용한다. 이것은 본래 자기 안에 있는 완전한 힘을 깨우는 인간복권의 첫걸음이다.
1993년 9월,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국제창가학회(SGI) 회장이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21세기 문명과 대승불교’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강연을 했습니다(첫 번째 강연은 1991년 9월). 이 강연을 4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이번 3회에서는 대승불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는 관점을 세 가지로 요약해 소개합니다. (다음 4회는 8월호에)

(대승불교가 21세기 문명에 공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관점 중 첫째, ‘평화 창출의 원천’이라는 지난 호 설명에 이어)

둘째, ‘인간복권의 기축’이라는 관점입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말하면, 다시금 종교의 시대를 부르짖는 지금이야말로 과연 종교를 갖는 것이 인간을 강하게 하는지 약하게 하는지, 선하게 하는지 악하게 하는지, 현명하게 하는지 어리석게 하는지 그 판단을 잘못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함으로써 마르크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듯하지만, 그의 종교아편설이 전혀 무의미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활하고 있는 많은 종교가 아편적인 측면을 완전히 제거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을뿐더러, 얼마 전 텍사스주에서 총격 사건을 일으킨 교단(1993년 2월 텍사스 웨이코 마운트카멜 센터의 사이비 종교 ‘다윗가지파’에 대한 무기 단속 과정에서 벌어진 총격전 사건) 등은 극단적인 예지만, 세기말의 ‘신(神)들’ 중에는 상호의존과 문화교류의 진전에 역행하는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존재도 많은 듯합니다.

그런 까닭에서도 저는 불교에서 말하는 ‘타력(他力)’과 ‘자력(自力)’,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은총’과 ‘자유의지’의 문제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양쪽의 이상적인 균형에 관해 다시 검증하고자 합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흐름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모든 일에 대한 결정권을 오로지 신의 의지에 맡긴 ‘신 중심의 결정론적 세계’에서, 그 결정권을 인간에게 맡긴 ‘자유의지와 책임의 세계’로 서서히 역점이 옮겨가는 과정입니다. 말하자면 ‘타력’에서 ‘자력’으로 주역(主役)이 바뀝니다.

잘 아시다시피 그것은 분명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큰 성과를 쌓아 올렸지만, 동시에 그 이성 만능주의는 인간이 자력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자만을 낳아 현대 문명을 꼼짝달싹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타력 의존이 인간의 책임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면, 근대의 자력 의존은 인간의 능력을 과신한 것이자 에고(Ego)가 비대화(肥大化)한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현대 문명은 이제 자력과 타력 어느 한쪽으로 편중하는 것이 아니라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의 융합을 설하는 대승불교 관점


▎1993년 4월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에 있는 사이비 종교 ‘다윗가지파’의 건물이 화염에 휩싸인 가운데 연방 요원들이 장갑차를 동원해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이른바 ‘웨이코 사건’은 타력에 의존한 종교의 역기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그런 점에서 “자력도 고정된 자력이 아니로다.” “타력도 고정된 타력이 아니니라.”(어서 403쪽)라고 정묘(精妙)하게 설하는 대승불교의 관점은 중요한 시사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서는 두 힘이 서로 융합하고 어우러져 절묘한 균형을 이루도록 종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말하면, 일찍이 존 듀이는 ‘공통 신앙’을 주장하며 특정한 종교보다는 ‘종교적인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가 자칫하면 독선이나 광신(狂信)에 빠지기 쉬운 데 반해, ‘종교적인 것’은 ‘인간의 관심과 에너지를 통일’하고 ‘행동을 이끌고 감정에 온기를 불어넣으며 지성에 빛을 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형식의 예술, 지식, 노력, 일한 뒤의 휴식, 친밀한 교류와 교육, 우정과 연애, 심신(心身)의 성장 등에 포함된 가치’를 꽃피우고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듀이는 타력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것’이란 선하고 가치 있는 것을 희구하는 인간의 능동적인 삶을 북돋는, 이른바 뒤에서 밀어주는 것과 같은 역용(力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야말로 “‘종교적인 것’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입니다.

유한한 자신 깨달아 겸허한 자세로 타력에 융합해야

근대인의 자아신앙(自我信仰)이 무참한 결말을 보여주었듯이, 자력은 단독으로 자신의 능력을 완수할 수 없습니다. 타력, 다시 말해 유한한 자신을 초월한 영원한 것에 기원하고 융합해야 비로소 자력도 완전히 작용합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힘은 본디 자기 안에 있던 것입니다. 듀이도 필시 염두에 두었을 이러한 관점이야말로 종교가 미래성을 지닐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분수령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불교인뿐 아니라 모든 종교인이 역사의 톱니바퀴를 되돌리지 않으려면 이 점에서 절대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인간복권은커녕 또다시 인간을 도그마(독단)와 종교적 권위에 예속시키려는 힘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비 콕스 교수가 우리의 운동을 가리켜 “휴머니즘의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라고 주목한 점에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불전에는 “일념에 억겁(億劫)의 신로(辛勞)를 다하면 본래 무작삼신(無作三身)이 염념(念念)에 일어나느니라.”(어서 790쪽)라는 말이 있습니다.

불교는 관념이 아니라 시시각각 인생의 궤도를 수정하게 합니다. ‘억겁의 신로를 다한다’고 씌어 있듯이 모든 과제를 한몸에 받아 모든 의식을 자각시킨다, 모든 생명력을 연소시킨다, 그렇게 온 힘을 기울여 해야 할 일을 한다, 그 속에 ‘무작삼신’이라는 부처의 생명이 순간순간 솟아 나와 인간적 영위를 올바른 방향으로, 올바른 길로 이끌고 격려합니다.

법화경에 종종 드럼이나 트럼펫과 같은 악기가 등장하는 까닭도 그 울림들이 살아가는 의지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처의 생명이 일으키는 역용이 “그대여 강해져라. 그대여 선해져라, 현명해져라”라는 인간복권에 대한 메시지임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 이케다 다이사쿠(1928~2023) - 국제창가학회(SGI)회장 역임. 소카대학교·소카학원·민주음악협회·도쿄후지미술관·동양철학연구소 등 설립. 유엔평화상·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 등 24개국 훈장, 세계계관시인 등 수상 다수. 전 세계 대학으로부터 409개의 명예박사·명예교수 칭호 수여. 토인비 박사와의 대담집 [21세기를 여는 대화]를 비롯한 저서 다수.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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