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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개성 담긴 이야기 만든다”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 

글 손용석 기자·사진 정치호 기자



1960년 생, 서울대 불문학과(학사), 미국 MIT 공과대 대학원 경영학과(석사), 2000년 현대모비스 전무

2001년 기아자동차 자재본부 본부장, 2003년 10월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대표이사



금융회사들이 아무도 디자인에 관심을 갖지 않던 시절,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은 디자인도 경쟁요소가 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정 사장의 다음 화두는 ‘스토리’다.
2월 19일 점심시간. 서울 여의도에 있는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옥에 들어서자 로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탁구대에서 직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탁구를 즐기고 있었다.

로비 중앙엔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줄리언 오피(Julian Opie)의 2m가 넘는 설치 작품이 세워져 있다. 발광다이오드(LED)를 재료로 한 작품 앞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음악을 들려주는 로봇이 눈길을 끈다. 일본에서 개발된 인공지능 로봇 ‘미우로(Miuro)’다.

곁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자 “사장님이 일본 출장 길에 가지고 온 것인데 재미있지 않느냐”며 활짝 웃었다.

어느 기업이나 본사 로비는 건물 내에서 ‘가장 엄숙하고 웅장한 공간’이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대카드의 로비는 구성원들이 즐기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비단 로비뿐만이 아니다. 미식축구 라인이 그려진 카펫을 갖춘 본사 강당부터 외부에서 출입층 버튼을 입력하는 첨단 엘리베이터까지 건물 자체가 재미난 이야깃거리로 가득 차 있다.

과거 크기가 작은 미니 카드를 비롯해 업계 최초의 투명 카드, VVIP 회원들을 겨냥한 블랙 카드 등 금융 업계에 부단히 화제를 쏟아내 온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이 이젠 본사 자체를 아예 ‘이야기 공장’으로 만들고 있다.

트레이드 마크가 된 굵은 뿔테 안경에 노타이 차림으로 나타난 정 사장은 “올해 우리의 마케팅 목표가 ‘이야기가 있는 회사’인데 알고 찾아온 것 아니냐”며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기업들의 경우 마케팅을 한다면 주로 노출 중심으로 진행했습니다. 고급 이미지를 심어주려면 고급스러운 광고를 하면 되지 않냐고 말할 정도죠. 하지만 겉돌기만 한 광고는 공허한 메시지에 불과합니다. 지금 시대엔 기업 자신만의 정체성이 담긴 메시지를 전해야지 소비자들도 감동합니다. 이렇게 공간을 활용하는 것도 한 예가 될 수 있겠죠. 이것은 비단 마케팅뿐 아니라 영업을 비롯해 기업의 모든 구성원들이 스토리텔러가 돼야 할 생각해야 할 요소입니다.”

현대카드는 고객과 만나는 공간도 ‘현대카드답게’ 꾸며 놓았다. ‘파이낸스 숍’은 고객이 카드를 발급받고 대출 상담을 하는 곳. 현대카드는 파이낸스 숍에 자사 기업이미지(CI)의 핵심 요소인 끝이 둥근 직사각형 형태의 신용카드 모양과 수직적 상승 이미지를 반영했다.

여기엔 네덜란드의 대표적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룹인 콘크리트와 현대카드의 CI를 제작했던 네덜란드 디자인업체 토털 아이덴티티(Total Identity)가 참여했다. 그는 조만간 빌딩 전체에 카드 이야기를 담은 ‘카드 팩토리’도 건설할 예정이다.

정 사장은 “금융회사이기 때문에 고객들에겐 본질적으로 숫자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공간을 활용해 우리가 추구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바아는 기존 카드업계에서 부대 서비스처럼 중구난방으로 이뤄지던 여행, 교육, 온라인쇼핑을 묶은 고품격 브랜드. 할인혜택보다는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디자인 상품을 갖춰놓으며 고개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현대카드·현대캐피탈 광화문 파이낸스 숍. 왼쪽은 현대 블랙카드.

“프라비아를 통해 수익을 올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누구나 하고 있던 서비스였지만 좀 더 현대카드만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서비스를 추구한 게 주효했던 것 같습니다.”

정 사장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핵심은 ‘영혼과 개성’이다.

“세계적인 명품 업체들을 보면 자신만의 영혼과 개성을 지키는데 성공한 대부분 기업들입니다. 사실 품질만 놓고 보자면 여의도 내에서도 그만한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상점들이 많을 거예요. (웃음) 하지만 영혼과 개성이 담긴 스토리에 소비자들이 다가갈 때, 그 믿음은 결국 품질에 대한 신뢰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광고나 마케팅에서 현대카드나 현대캐피탈의 이름이나 구체적인 서비스 내용만을 알리는 것은 피하라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철학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죠.”

정 사장이 추구하는 현대카드의 이야기가 가장 잘 녹아 있는 것은 바로 ‘더 블랙(the Black)’ 카드다. 블랙카드는 현대카드가 2005년 2월 국내 최초로 선보인 VVIP 카드. 연회비 100만원, 출시도 하기 전에 총 회원 수를 9999명으로 한정한 사실 등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블랙카드는 경제 및 사회적으로 엄격한 자격 기준을 만들어 이에 걸맞은 사람에게만 발급된다. 여기엔 절차가 있다. 우선 현대카드는 자격 기준을 통과한 예비 고객을 초청한다.

현대카드의 초청장을 받은 고객이 가입 의사를 밝혔다 하더라도 한 단계 더 거쳐야 한다. 현대카드의 CEO, 리스크본부장, 마케팅총괄본부장 등으로 구성된 ‘더 블랙 커미티(the Black committee)’의 최종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처음 카드 업계에 들어와 보니 이상한 점이 있었어요. 카드회사들은 저마다 골드카드와 플래티늄 카드를 내놓으며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전체 카드 시장에서 프리미엄 카드 비중이 70%에 달하는 겁니다. 어떻게 VIP 서비스를 할 수 있을까 싶더군요. 그렇게 해서 블랙카드를 기획하게 됐습니다.”

2005년 당시 신용카드 업계는 블랙카드의 완패를 점쳤다. 연회비 100만원짜리 카드에 대한 수요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런 회의적인 시선 속에서도 현대카드는 오히려 회원 진입장벽을 더 높이는 전략을 채택하고 강력한 마케팅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실패를 점치던 업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현재 블랙카드의 1인당 월평균 사용액은 900만원에 육박한다. 최고의 VVIP들을 회원으로 둔 만큼 당연히 연체율은 0%. 블랙카드의 성공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정 사장에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현재 한 달에 블랙카드를 발급받는 사람은 평균 5명에 불과해요. 그래선지 지금 제게 가장 많은 민원 중 하나가 블랙카드를 발급해 달라는 겁니다. 또 다른 문제는 블랙카드만으로 수익이 나고 있다는 거예요. 비즈니스를 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앞으로는 수익이 안 나도 회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제공하려 합니다.”

블랙카드의 성공은 2006년 2월 출시한 연회비 30만원의 상위 5%를 위한 VVIP 카드인 ‘더 퍼플(the Purple)’의 성공으로 이어졌다.

정태영 사장은 문화 마케팅에서도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팝페라 그룹 일디보를 초청한 ‘현대카드 슈퍼콘서트-Il Divo’를 성황리에 열었고 비욘세 첫 내한공연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김연아, 에브게니 플루센코, 안도 미키, 피트 샘프라스 등 세계적 스포츠 스타를 초청하는 ‘현대카드 슈퍼매치’ 시리즈는 국내 스포츠 마케팅의 새 이정표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중적 관심과 별도로 전통적인 VIP 스포츠, 수준 높은 애호가 및 마니아 층을 확보하고 있는 종목을 선정한 게 주효했다.

이런 스포츠 마케팅은 구체적으로 기업의 매출 증대에 기여했다. ‘현대카드 슈퍼매치Ⅲ-로저 페더러 VS 라파엘 나달’ 전의 인터넷 예매 현황을 분석한 결과, 티켓 구입자의 90% 이상이 현대카드를 이용해 결제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슈퍼매치 기간에 신규회원의 유입이 평소에 비해 30%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현대카드만의 이야기가 담긴 마케팅 덕분일까. 현대카드는 현재 고객의 1인당 월 신용판매 이용액 평균이 80만~90만원으로 단연 업계 1위다.

현대카드가 특별한 스토리를 만드는 데는 조직원들의 구성도 남다르기 때문이다.

“전체 직원 중 금융전문가 출신은 절반 밖에 되지 않습니다. 장기나 체스를 둘 때도 다양한 역할의 말들이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최근엔 인사 제도도 완전히 바꿨습니다. 사내에 자리가 생기면 모든 직원이 응모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스스로를 ‘매물’로 등록할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정 사장의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너무 홍보를 잘한 건지, 사람들이 현대카드나 저를 생각하면 디자인을 떠올리는게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금융회사이고, 내부에서는 치열하게 숫자로 승부합니다. 얼마 전 금융회사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사무라이 펀드 유치에 성공한 걸 보더라도 내부 역량이 높다고 자부합니다. 실제 회사 분위기도 자율스러워 보이지만 규율이 상당히 엄격해요. 전 신입직원들에겐 창의성과 같은 것을 강조해서 환상을 심어주진 않아요. 지금 그들이 필요한 건 단순히 창의성이 아니거든요.”

정 사장에겐 캐피탈 업계에 불고 있는 수익성 악화도 근심거리다. 은행들의 수익률이 떨어지면서 캐피탈 업계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리고 금융회사도 이젠 대출만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지금으로선 우리의 이야기를 소비자들에게 들려주고 이를 통해 신뢰를 구축해 간다면 더 많은 성장동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겁니다.”

200803호 (200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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