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욱(68) 노키아tmc 회장은 2003년 말 18년간 정들었던 회사를 떠났다. 이재욱 회장이 새로 터를 자리 잡은 곳은 경남 마산 진북면 영학리 학동마을. 이곳에서 그는 63세의 나이에 농사꾼으로 변신해 벼농사를 시작했다.
노키아tmc는 마산 수출자유지역에 있는 노키아의 휴대전화 제조회사다. 이 회장이 은퇴할 당시 이 회사의 매출은 3조5000억 원. 수조 원대의 글로벌 기업을 이끌던 최고경영자가 삽과 괭이를 들고 나서자 주위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말렸다.
지역 농민들도 그에게는 땅을 팔지 않았다. ‘갑자기 농사를 시작하면 몸에 탈이 난다’는 우려부터 ‘땅 투기하려 농사 짓는 시늉을 한다’는 등 따가운 시선도 있었다.
이 회장은 서두르지 않았다. 동네 경조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며 사람들과 거리를 좁혀갔다. 이 지역 불우 청소년들에게는 장학금을 주고 동네 주민을 초대해 잔치도 벌였다.
주민들과 거리를 좁히면서 물 대기가 어려워 농사 짓기 어렵다는 땅이나마 조금씩 사들일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그의 농지는 1만3200㎡로 늘었다. “이왕 늦게 시작한 농촌 생활 조급해하며 서두를 필요는 없지요. 또 농사일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삽 한 자루 들고 마을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사도 하고 못하는 삽질 연습도 해보며 마을 사람들과 친해졌답니다.”
“회장님 논에선 뱀 나오겠어요”
오래전부터 이 회장은 은퇴 후 땅을 사서 집 짓고 농사 지으며 여생을 보내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취미인 등산을 할 때마다 ‘어디 좋은 곳이 없나’ 하고 산자락에 자리 잡은 마을들을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학동마을은 그가 등산하다 점 찍어 놓은 곳이다. 50세를 넘어서며 농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점점 더 궁금해지더군요. 그래서 틈틈이 농업 전문 서적을 읽기 시작했습니다.”그는 다양한 경작법과 품종을 연구한 것은 물론 쌀의 판매겴??구조를 분석했다. 하지만 농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은퇴 후 강아지나 기르며 평화롭게 살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한국 농업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을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는 의지가 강해졌다.
“농부의 시각이 아니라 전문경영자의 시각으로 농촌 문제를 생각해 보니 뭔가 답이 보일 것 같더군요. 또 주위 분들께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제 은퇴 생활이 더욱 풍족해질 것이란 생각을 해 귀농을 결심했어요.”한국 농가에서 생산하는 곡식의 70%는 쌀이다. 하지만 많은 농가에선 벼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만 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이 회장은 직접 농사를 지으며 항상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존 농사법의 문제점을 파악해 나갔다. 그는 우선 농사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보통 논농사를 지으려면 논에 물을 채운 다음 모판을 만들어 모내기를 한다. 양수기로 물을 끌어와야 하고 해충과 잡초가 끼는 것을 막기 위해 수시로 농약도 뿌려야 한다. 때마다 비료를 사용하다 보니 농사를 지어도 늘 적자다.
이 회장은 농약과 비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농법인 ‘지장농법’이 한국 농가에 적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농법은 추수를 마친 논에 자운영 씨를 뿌린다. 콩과 식물인 자운영은 생명력이 아주 강해 다른 식물이 그 근처에서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계절초다 보니 봄이 오는 3월이면 시들어 버린다.
자운영은 질소 성분이 많아서 자연스레 천연 비료 역할도 한다. 비옥해진 논에 물을 대지 않고 볍씨를 뿌리면 지장농법의 첫 준비가 끝난다. “처음엔 동네 농부들이 ‘회장님 논에서 뱀 나오겠다’며 걱정을 하더라고요. 5년이 지난 지금은 신기해하며 제 방식을 따라하는 농가들이 늘고 있답니다.”
벼가 자라면서 잡초를 제거하는 방식도 기존 농법과 큰 차이가 있다. 물을 채우지 않은 논에서 벼를 키우다 잡초가 자라면 물을 끌어온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물에 강한 잡초가 자라면 물을 빼고 잡초를 뽑아준다. “벼는 이삭이 패기 시작하면 많은 수분이 필요합니다. 추수하기 10일 전부터는 물을 가득 채워 놔야 합니다. 잡초가 자라도 이미 한 자가 넘어버린 벼를 이길 수 없지요.”
지장농법을 사용하면 쌀 수확량은 기존 모내기 방식보다 80% 정도 줄어든다. 하지만 비료와 농약, 농사에 필요한 추가 인건비가 거의 들지 않고 유기농 쌀로 인정받으면 가격을 더 받을 수 있다. 결국 기존보다 수익을 더 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벼농사만으로는 농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간신히 먹고 살 만한 정도예요. 새로운 상품과 판매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국내에서 한 해 동안 평균 벼 450만 톤이 생산됩니다. 이 중 350만 톤은 시중에서 소비되고 나머지 100만 톤은 정부가 수매하고 있지요.”
이 회장은 바로 이 나머지 100만 톤을 효과적으로 한국인의 밥상에 올릴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는 우리나라가 매년 250만 톤의 밀을 수입하고 있는 점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주로 밀가루를 사용하는 라면이나 국수, 빵의 원료로 일부만이라도 대신 쌀가루를 써보자는 것이다. 밀 수입량도 줄이고 한국 농가에는 새로운 수익원을 발생시킬 수 있다.
“밀가루를 반죽하면 쫄깃해지는 것은 글루텐이란 단백질 성분 때문입니다. 이 성분이 소량 들어 있는 기존의 쌀로 만든 국수나 빵은 쫄깃하지 않아요. 하지만 쌀을 미크론(1mm의 1000분의 1) 단위로 빻으면 글루텐이 없어도 밀가루처럼 끈기가 생긴답니다. 노키아가 휴대전화를 제조하는 데 사용하던 미세가공 기술을 응용해봤지요.”
이 회장이 개발한 쌀 자장면과 국수는 경남 지역에서 학교 급식으로 채택되고 있다. 지난해 1월에는 지장농법을 높이 평가한 경남 고성군에서 13만2000㎡의 대지를 무상 임대해 줬다. 한 대기업에선 미세한 쌀가루를 이용해 식품을 개발해보자는 제의도 들어왔다. 새로운 농법과 상품을 구상한 그는 지난해 10월 25일 추수를 마친 13만2000㎡의 고성 들판에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농업 관련 공무원, 국회의원, CJ겞澯?등 대기업 관계자 750명을 초대했다.
이 회장은 미세 쌀가루로 만든 냉면, 자장면, 잔치 국수를 이들에게 대접하며 지장농법을 소개했다. 농업진흥청 관계자에겐 꼼꼼히 기록했던 농법과 쌀가루 제조법을 전달했다. “이제 정부에서 농민을 지원할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농업 구조를 보면 아직도 고치고 싶은 일이 산더미지만 한번에 모두 고칠 수는 없지요. 잠시 숨 좀 돌리고, 다음 할 일을 찾아 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