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베리 현 CEO 마쿠스 발렌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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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경영자(CEO)는 기업 경영을 둘러싼 파워 피라미드의 최정점을 차지하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CEO가 잘못되면 기업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른바 CEO 리스크다.CEO를 둘러싼 최고의 리스크는 승계(succession) 문제다. 갑작스러운 CEO 유고에 따른 혼란은 물론이고 승계 과정에서의 권력투쟁이나 갈등은 기업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역사를 앞서간 선진국 기업들이 CEO 승계에 심혈을 기울여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프로그램과 전통을 만들어 놓는 이유다.CEO 승계 플랜은 해당 기업의 소유·지배 형태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한다. 확실하게 주인이 있는 가족자본주의적 기업과 이렇다 할 주인 없이 주식이 광범하게 분산돼 있는 주주자본주의적 기업은 가는 길이 분명 다르다. 하지만 본질을 같다. 가급적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게 함으로써 경영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는 것이다.먼저 가족기업들의 경우를 보자. 한국의 재벌 그룹들도 여기에 속한다. 대표적인 해외 사례는 스웨덴의 발렌베리(Wallenberg) 다. 발렌베리는 에릭슨·사브·SEB 등 10여 개의 핵심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다. 시가총액이 스톡홀름증권거래소의 절반, 매출은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거대 그룹이다.
▎발렌베리 창업주 오스카 발렌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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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베리의 엄격한 후계 수련150년 역사의 발렌베리는 창업주 가문에 의해 경영권이 5대째 승계돼 내려오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의 승계 전략은 ‘강인한 의지와 국제적 시각을 가진 유능한 경영자’를 표방한다. 또 검소함과 도덕성, 사회적 책임 등으로 존경받는 기업인이 되도록 가르친다. 이를 위해 발렌베리의 후계자들은 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험난한 바다 생활을 경험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또 자기가 학비를 벌어 유학을 다녀오고 외국의 선진 금융회사에도 취업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국제 금융과 산업의 흐름을 익히고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그러면서 황제식 독단경영의 위험성을 차단하기 위한 노력도 병행한다. 장자 상속의 전통은 없으며 가문의 사촌들 간에 선의의 경쟁을 유도한다. 발렌베리는 항상 2명의 리더를 둠으로써 잘못된 판단 가능성을 줄이고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토록 한다.가문의 승계자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일상적 경영 권한은 전문경영인들에게 과감하게 이양하는 전통도 만들었다. 승계자는 지주회사를 통해 그룹의 비전과 전략, 대규모 투자 결정만 내리고 일상 경영은 전문경영인들이 알아서 하도록 한다. 그러다 계열사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으려고 하면 가문에서 직접 경영에 개입하게 된다.발렌베리가 5대째 경영권을 승계했고 앞으로도 이런 전통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큰 이유는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데 있다. 스웨덴 국민의 발렌베리에 대한 자부심과 사랑은 상상을 초월한다. 스웨덴 국민은 발렌베리가 외국인들로부터 경영권 위협을 받지 않고 안정적으로 기업을 경영할 수 있도록 ‘황금주’제도를 만들어주기도 했다.발렌베리의 경영권 승계 모델은 이건희 삼성 회장도 부러움을 표시했던 것으로 앞으로 한국 재벌들의 교과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스웨덴의 가족기업 발렌베리 그룹은 엄격한 수련을 통해 후계자를 양성한다.핵심 계열사 일렉트로룩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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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없는 회사의 CEO 승계 모델은 미국 기업들이 확실하게 구축해 놓고 있다. 미국에도 1860년대 2차 산업혁명 이후 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1920년대까지 가족기업들이 경제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반독점 경제정책과 사회의 광범한 진보주의 바람 등의 영향으로 대부분 창업주 가문이 주식을 내다팔고 그 돈으로 사회공헌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이때부터 기업의 소유-경영 분리가 확고해져 주식은 시장의 광범한 투자자들이 나눠 갖고 경영권은 전문경영인이 장악하는 형태를 갖추게 된다. 주주들은 배당에 만족할 뿐 경영 일반은 물론 CEO 선출에도 목소리를 내기 힘들어졌다.미국은 대부분 소유-경영 분리초기에는 혼란과 비효율이 심각했다. 일단 회사의 경영권을 장악한 CEO는 좀처럼 권력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고 넘겨주더라도 자기 말을 잘 들을 후배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기업 가치가 훼손되고 파산에 이르는 기업도 많았다. 이는 주주들의 반격을 불러왔다. 1980년대 이후 주식 간접투자가 활성화되면서 소수의 연기금과 기관투자가들의 수중으로 상장주식이 다시 집중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기관투자가들은 경영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강화했고, 그 수단의 하나로 이사회 기능과 권한을 대폭 확충했다. 이사회로 하여금 주주들을 대리해 경영진을 감시하는 동시에 제대로 된 CEO를 뽑도록 하는 승계 플랜 전통도 만들어갔다.대표적인 사례가 GE(제너럴 일렉트릭)다. 1878년 발명왕 에디슨이 창업한 130년 전통의 GE는 모범적인 경영권 승계로 유명하다. 한번 CEO를 맡기면 20년 넘게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권한을 주되, 혹독한 선출 과정을 통해 검증에 검증을 거듭한다. 현재 10년째 회장을 맡고 있는 제프리 이멀트가 단적인 예다.전임 회장인 잭 웰치는 자신의 후계자를 뽑는 데 무려 7년을 공들였다. 1994년에 전 임원 중에서 23명의 후보를 추려냈고, 98년에 3명을 최종 후보로 압축했다. 이어 2년간 후보끼리 경쟁시킨 후 2001년 이멀트가 선임됐다.미국 기업들의 CEO 승계 플랜은 전미 이사협회(NACD)와 경영학계 원로 교수 등에 의해 2000년대 중반 이후 모범규준(Best Practice) 형태로 정리돼 보급·활용되고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등에 소개된 ‘CEO 승계 모범규준’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문답 형식으로 미국 기업들의 CEO 승계 흐름을 살펴보자.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모범적인 기업의 경우이고, 그렇지 않아 탈이 나는 기업도 적지 않다.①승계 작업은 누가 주도해야 하나?현직 CEO가 주도해선 안 된다. 이사회가 끌고 가며 현 CEO와 협력해야 한다. GE의 경우도 잭 웰치 혼자 후계자를 육성한 게 아니라 중심 역할은 이사회가 했다. 웰치 또한 이사회 멤버의 하나로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이게 가능하려면 이사회가 CEO의 입김에서 벗어나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어야 한다. 이사(대부분 사외이사)부터 CEO를 제대로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도록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인물들로 채워져야 한다는 얘기다. 미국 기업의 사외이사는 대부분 각 산업 분야에서 CEO를 역임했던 원로 기업인들이다. 한국처럼 교수나 관료 출신은 거의 없다. 미국의 사외이사들은 대부분 CEO나 기업 임원을 거쳤기에 돈도 많다. 따라서 경영진에서 물러난 뒤 국가 경제를 위해 봉사하는 자세로 사외이사를 맡아 일한다. 대체로 60대 들어 현직에서 물러난 뒤 사외이사를 맡고 70대를 맞아 완전 은퇴해 노후생활을 즐긴다. 그래서 금융그룹과 은행 등에선 아예 이사회 멤버의 나이를 70~72세 정도로 제한하기도 한다. 당연직 이사회 멤버인 CEO도 자연히 이 적용을 받는다.
▎에디슨이 창업한 GE는 130년 동안 성공적으로 경영권을 승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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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언제부터 승계 작업을 시작해야 하나?새 CEO가 취임하는 즉시 다음 CEO 승계를 준비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먼저 CEO의 돌발 유고에 대비한 비상계획부터 만들어둬야 한다. 비행기 사고 등 돌발 사고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CEO 대행을 누가 맡을 것이며, 과도기의 권한은 얼마만큼 주어질 것인지, 최단 기간에 새 CEO를 뽑을 방안 등이 포함된다.CEO 승계 프로그램은 5~10년을 내다보고 추진돼야 한다. 이사회는 사내의 될성부른 중간관리자 20~30명 정도를 항상 관찰하고, 제각각 일정한 임무를 준다. 이사회 멤버들은 후보자들과 계속 만나 대화하며 자질을 검증한다. 이사회는 최소한 연 1회 공식적인 후보자 평가회의를 열어야 한다. 현 CEO 퇴임 3~4년 전부턴 승계 계획을 공식화해야 한다. 후계자를 3~4명으로 압축해 회사 안팎에서 차기 CEO를 자연스레 예측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현직 CEO에게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CEO 승계의 열차는 떠났고 3년 후쯤엔 물러나야 할 테니 그 뒤를 알아서 대비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③외부 인재 영입은 바람직한가?가급적이면 내부 인재 중에서 CEO가 나오는 게 좋다. 아무래도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 조직을 잘 알 것이고, 조직원들의 충성도 쉽게 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불가피하게 외부 수혈이 필요할 때도 있다. 급격한 산업 트렌드의 변화, 기업 생존전략의 획기적 변화, 조직 내 갈등 치유와 구조조정 등의 경우다. 그럼에도 외부 인사가 느닷없이 CEO로 영입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급적이면 임원 때 경영진으로 스카우트해 내부에서 CEO감으로 성장하도록 유도하는 게 좋다. CEO 후보군 중에서 3분의 1 정도는 외부 스카우트 인력으로 채워나가는 것도 조직의 긴장감을 높이는 데 유효한 선택이다.이사회는 일상적으로 인재 서치펌과 소통하며 외부의 유능한 인재들을 탐색하고 꾸준히 영입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④후계자 육성 과정에서 주의할 점은?경마(horse race)하듯 CEO 후보자들을 몰아붙여선 안 된다. 일정한 임무를 주고 경쟁을 시키되 자기들이 경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도록 하는 게 좋다. CEO 경쟁인지 일상 업무인지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채 그저 일을 통해 능력을 키워가도록 서서히 몰아야 한다. CEO 후보군 리스트는 내부든 외부든 공개하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한다. 그저 자연스럽게 회사 안팎에 좋은 평판을 얻어가고 ‘바로 이 사람이야’라고 시장이 알아서 예측하도록 하는 게 최선이다. 시장의 평가는 결국 이사회의 평가와 일치할 것이다.⑤떠나는 CEO는 어떻게 해야 하나?회사 안에서 계속 기웃거리도록 해선 안 된다. CEO 자리에서 퇴임하는 순간 곧바로 떠나는 게 회사를 위해서든, 본인을 위해서든 최상의 선택이다. 이사회 멤버로도 남아선 안 된다. 전직 CEO가 이사회 회의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신임 CEO가 뭔가 혁신을 시도할 때마다 전직 CEO의 잘못을 건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본인은 회사가 걱정되고 뭔가 도와주고 싶을지 모르지만 깨끗이 사라져주는 게 진짜 돕는 길이다.CEO에서 물러나면 다른 회사의 CEO 내지는 사외이사로 자리를 옮기는 게 좋다. 그러다 3~4년쯤 지난 뒤 지금의 회사에 사외이사로 돌아오는 것은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