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지 대양간호대학 학장은 백영심 간호사와의 인연으로 의료 봉사에 나섰다.
▎말라위 릴롱궤 대양간호대학 입구에서 촬영에 응한 김수지 학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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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간호학 박사 1호인 김수지(71) 학장은 이화여대 간호대 학장, 서울 사이버대학교 총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그가 남은 여생을 보내는 곳은 지구 반대편인 아프리카 말라위다. 이곳에서 대양간호대학 학장을 맡고 있다.김 학장은 “가끔 삶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한다”고 했다. 특히 2010년 12월을 잊을 수 없다. 서울사이버대 총장에서 물러난 후 그는 일본 세인트루크 간호대학 석좌교수로 갈 계획이었다. 그때 백영심 간호사가 찾아왔다. 백 간호사는 1990년 28세에 아프리카로 의료 선교를 떠났다.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고통받는 환자를 돕기 위해 아프리카 말라위에 남았다. 그의 소식을 들은 정유근 대양상선 회장이 사재 33억원을 털어 후원했다. 그 돈으로 말라위 릴롱궤에 대양누가병원이 설립됐다.“백 간호사가 대뜸 간호대학을 운영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1월 4일이면 첫 입학식이 열리는 데 아직까지 학장을 구하지 못했다는 거에요. 젊은 후배를 소개하겠다고 하니 백 간호사는 극구 제가 적임자라는 거에요. 국내 간호학 박사 1호로 수십년 간 쌓아온 경험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게다가 월급 줄 형편이 안된다고요. 하지만 저보다 젊은 사람이 낫지 않겠어요.다른 사람을 추천하겠다고 하니 백 간호사는 남 얘기하듯 암에 걸렸다고 하더군요. 수술을 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거구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얼마전 봤던 영화 ‘울지마 톤즈’가 떠올랐어요. 고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홀로 의료봉사를 했어요. 병원도 짓고, 학교도 세우고 음악 밴드부까지 운영했잖아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다가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영화 보는 내내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면 이태석 신부에게 큰 힘이 됐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백 간호사 수술 하루 전날인 26일 병문안을 갔더니 손에 비행기표를 쥐어주더군요. 1월 1일에 말라위로 떠나는 티켓이었어요. 백 간호사는 이미 제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2011년 1월 4일 말라위 릴롱궤에 대양간호대학 입학식이 열렸다. 1400여 명 지원자 중 선발된 30명 학생이다. “신입생의 눈은 희망으로 들떠 어찌나 반짝이던지요. 학생들에게 앞으로 20년 후에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써보라고 했죠. 상당수가 고향으로 돌아가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싶다고 하더군요.”김 학장은 먼저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는 데 이상하게 성적이 안 올라요. 가만 보니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는 겁니다. 책이나 공책을 살 돈이 없기 때문에 필기를 해본 적이 없는 거에요. 교사가 말하는 것을 무작정 암기합니다. 외운 것을 말하면서 공부하는 거에요. 그렇다고 비싼 책을 다 사줄수가 없어요. 책 한권으로 8명이 공부하고 있어요.”그는 서울사이버대학 총장 경험을 살려 e러닝 교육을 준비 중이다. 현지 사정을 들은 한국의 한 후원자가 25대의 노트북 컴퓨터를 보내줬다. 그가 학장을 맡은 후 큰 변화는 대학이 3년제에서 4년제로 승격됐다는 점이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학생은 병원 뿐 아니라 지역사회에 나가 간호 활동을 할 수 있다. 수많은 학생의 꿈인 고향으로 돌아가 보건소를 짓고 의료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간호대학 4년제로 승격학장은 “간호학은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뿐 아니라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을 배우는 중요한 학문”이라고 말했다. “말라위는 최빈국이에요. 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영양실조·말라리아·에이즈·폐렴 등 다양한 병에 걸려있어요.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지는 겁니다. 학생들은 농사 짓는 방법을 배울 거에요. 김순권 옥수수 박사에게 슈퍼 옥수수 씨앗을 얻었어요. 농사를 지을 줄 알아야 골고루 영양소를 공급하는 방법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수 있어요. 농사 짓는 방법을 체계적으로 교육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이곳에선 일할 사람이 부족합니다.”인터뷰 내내 김 학장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그는 “말라위에서 보내는 하루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처음엔 2년을 목표로 왔어요. 대학이 4년제로 전환되면서 조금씩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려고요. 제 뒤를 이어 학교를 운영할 후계자도 키워야하고요. 지금 할 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