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세에 창업한 듀라코트를 미국 1위의 공업용 특수페인트 업체로 키운 홍명기 회장은 미국 한상(韓商)의 대부다.
듀라코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공업용 특수페인트 생산업체다. 이 부문에선 세계 ‘빅5’ 업체 중 하나이고 미국 내 시장점유율은 부동의 1위다. 지난해 매출은 3억 달러(3276억원)다. 소비재가 아니어서 일반인에게 친숙하지는 않지만 미국 건축업계에선 ‘세라나멜’이란 브랜드로 유명하다. 건축에 필요한 철근의 부식을 막기 위해 특수페인트 세라나멜로 코팅한다. 녹 방지는 물론 여름에는 실내 온도를 낮추고 겨울에는 열 보존 효과가 있어 에너지소모를 줄이는 환경친화적 물질로 각광받는다.이 회사의 창업자 홍명기(79) 회장은 10월 29일부터 사흘동안 광주광역시에서 열리는 제12차 세계한상대회 대회장을 맡아 경영활동 외에도 행사 준비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홍 회장은 포브스코리아와의 전화인터뷰에서 “미국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친환경 물질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며 “건축 분야 외에 자동차 등 새로운 분야에 적용이 가능한 만큼 머지 않은 미래에 연매출 5억 달러 달성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고 기대감을 드러냈다.역설적이게도 홍 회장의 성공은 그가 소수민족으로 미국에서 경험한 차별과 설움이 원동력이 됐다.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화학과를 졸업하고 휘태커라는 페인트 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는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며 회사에 큰 돈을 벌어줬다. 하지만 번번히 승진 문턱에서 좌절을 맛봤다. “기술소장에 오르며 30명의 연구원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함께 입사한 백인 직원이 승진을 거듭하며 훨씬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을 보면서 의욕이 꺾일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때 간호사로 일하던 부인이 “망해도 내가 밥은 먹여 살릴 테니 사업을 한번 해 보라”고 격려했다. 거듭되는 아내의 권유에 저축한 돈 2만 달러로 1985년 듀라코트를 설립했다. 그때 그의 나이 51세였다. 연구부터 개발까지 거의 모든 업무를 도맡다시피 했다.전 직장에서 매달 사람이 찾아와 특허권 침해 가능성을 빌미로 ‘사업을 그만두지 않으면 소송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등 고초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거래처에까지 손을 써 우리 회사에 원료를 공급하지 못하게 하는 통에 웃돈을 내고 암시장에서 원료를 조달하기도 했습니다.”홍 회장이 사업자금 2만 달러를 다 써버리는데 채 6개월도 걸리지 않았다. 결국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일본 스미토모철강을 찾아가 듀라코트 제품이 기존 제품보다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하다는 점 등을 들어 파트너십을 제안했다. 이를 스미토모가 받아들이며 가까스로 사업기반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품질향상은 물론 가격경쟁력 유지와 납기일 준수 등 고객중심의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5년 뒤 스미토모와 25년 독점 공급 계약을 하는 등 지속적인 성장을 이어왔다. 홍 회장의 부친은 종합일간지 평화신문(훗날 대한일보) 대표이면서 수도극장(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바뀜) 주인이었고, 동양 최대 규모의 안양종합촬영소를 설립한 영화인 홍찬 씨다. 홍 회장은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당시 문화예술사업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순탄함이 오래가진 못했다.
▎2010년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에게 ‘자랑스런 한국인상’을 수여하는 홍명기 회장(왼쪽). 미국 캘리포니아 주 리버사이드의 듀라코트 사옥 입구에 선 홍 회장(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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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문화는 오늘의 미국을 만든 원동력온 나라가 6·25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졌던 1954년, 그는 서울대 문리대에 낙방하면서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친구들은 다 합격하고 저만 떨어졌어요. 체면이 말이 아니었죠. 그래서 이참에 미국 가자 마음먹었죠. 당시에도 미국은 ‘기회의 땅’이라 생각했거든요.” 하지만 유학 중에 가세가 급격히 기울면서 목장에서 우유를 짜고 남자가정부로 일하며 숙식을 해결하는 등 힘든 시간을 보냈다.UCLA 마지막 학기 등록을 앞두고는 당시 200달러였던 학비를 낼 수 없어 염치불구하고 2년간 수업을 들었던 영어과목 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연세가 좀 든 여교수였는데 이튿날 아침에 다시 오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은행으로 데려갔어요. 만기가 많이 남은 미국채(bond)를 찾아 그중 200달러를 줬어요. “너는 졸업을 해야 돼(Your job is to graduate)”라는 말과 함께요. 그 말을 듣고 눈물이 그치지 않더군요.”홍 회장이 2001년 ‘밝은미래재단’을 설립해 지난해까지 미국 동포사회에 7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하고 모교 UCLA 등 여러 대학에 한국과 아시아 관련 연구과정 설립을 지원하는 등 활발한 사회공헌활동은 그때의 감동과 무관하지 않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어려운 이들을 돕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1999년에는 자금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남가주한국학원의 이사장을 맡아 6개월만에 350만 달러를 모금해 정상화시켜 한인사회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기부문화야말로 미국을 선진국으로 만든 원동력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자 중 하나인 워런 버핏이 한 일을 보세요. 미국의 400대 부호에게 재산의 50% 이상을 기부하자고 독려하지 않았습니까? 선진국으로 향하는 대한민국에도 그런 기부 문화가 정착돼야 합니다.”홍 회장은 기업활동을 통해 한국의 국가경쟁력을 높이는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바쁜 일정에도 제12차 세계한상대회의 대회장을 맡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50여개국에서 1000여 명의 한상(韓商)이 참여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번 행사에 박근혜 대통령의 참석을 부탁하기도 했다.“지난 5월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LA 동포 만찬 간담회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 참석을 부탁했습니다.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는데 화상(華商) 네트워크가 큰 역할을 한 것처럼 한상도 창조경제를 이끄는 핵심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참석하면 큰 힘이 될 겁니다.”
차세대 한인 지도자 양성에 힘 모아야그는 이번 행사를 통해 “전라도 음식을 세계에 알리는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밝혔다. “광주하면 가장 먼저 음식이 떠오르잖아요? 이 고장의 독특한 음식을 전 세계에 소개하는 것도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한상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한국식 교육에 대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예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미국에서도 한국 부모의 교육열은 정평이 나있다. 홍 회장은 성김 주한미국 대사와 김용 세계은행 총재를 예로 들며 “한국 국내의 인재뿐 아니라 재외 한인 인재도 폭 넓게 등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도 미국에서 한인의 목소리를 대변할 정치적 목소리가 부족한 것을 아쉬워했다.“오래전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옆자리의 유대계 미국인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어요.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예전에는 유대인이 미국 명문대 수석졸업을 도맡아 했는데 요즘은 한국인이 대세라고 치켜세우더군요. 어깨가 으쓱해 듣고 있었는데 이 친구 한다는 소리가 ‘한국인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미국에 있냐’는 거에요.그러면서 자기들(유대인)은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 우리 이익을 대변할 리더가 있다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김창준 위원(한국계 최초로 미국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1993년부터 1999년까지 3선)이 현직에 있었는데 지금은 누가 있습니까?”그는 미국으로 이민 온 한인 부모들이 개인의 성공에는 신경을 많이 썼지만 한인사회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은 부족했다고 평했다. “독도 문제만 봐도 적지 않은 수의 일본계 미국 연방의원의 존재가 국제 여론을 조성하는데 한국에 부담이 되는 현실입니다. 이제부터는 차세대 한인 지도자들이 미국 정가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공화당을 지지하는 홍 회장이 주변 공화당원들에게 욕을 먹으면서까지 민주당 소속의 강석희 전 캘리포니아 어바인 시장의 후원을 맡고 2008년 선거에서 당선을 도왔던 것도 이러한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강 전 시장은 지난해 연방하원의원 도전에 실패했다).홍 회장은 입양한 두 자녀를 포함 1남3녀를 뒀다.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회계사, 대학교수, 치대 학생으로 모두 제 몫을 하고 있지만 회사를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이미 기부를 약속한 1000만 달러 외에 최근 추가로 최소 1000만 달러를 기부할 뜻을 밝혔다. “기부금이 미국내 한인 자녀들의 교육에 쓰여져 미국 주류사회 리더를 많이 길러낼 수 있다면 언젠가 한인 대통령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