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설립 이후 포드 자동차와 기술제휴를 맺고 ‘코티나’를 조립 생산하던 현대자동차가 1972년 독자 고유모델 개발을 선언하자 세계 자동차업계는 코웃음을 쳤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0달러에 불과했고, 아시아에선 일본이 유일하게 자동차 고유모델을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현대자동차가 고유모델을 개발해 그 차를 수출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며 비웃었다.하지만 꿈은 곧 현실이 됐다. 일본 미쓰비시와 기술제휴로 1975년 말 ‘포니(조랑말)’가 탄생했다. 국산화율 90%, 최초의 국내 고유모델이었다. 포니는 1976년 시판 첫 해에 1만726대가 팔려 국내 시장 점유율 1위(43%)에 올랐다. 현대차는 그해 7월 26일 중남미 에콰도르행 선박에 포니 5대를 실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자동차 첫 수출이었다. 시판 첫 해 1019대를 수출했다.# 2 지난 10월말 현대자동차그룹은 현대·기아차 두 회사가 국내외 공장에서 생산한 완성차가 8000만 대를 돌파했다고 밝혔다. 현대차가 창사 이듬해인 1968년 울산공장에서 코티나 차종 556대를 생산하고, 기아차가 1962년 경기 광명시 소하리 공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한 지 50여년 만에 이룬 성과다.8000만 대는 현대차의 베스트 셀링 모델인 아반떼(전장 4550㎜)를 한 줄로 세울 경우 약 36만4000㎞에 이른다. 지구를 9바퀴 돌 수 있고, 펼쳐 놓으면 서울시 면적(605㎢)을 덮고도 남는다. 8000만 대의 74%인 5988만 대를 국내 공장에서 생산했다. 그중 절반이 넘는 3313만 대를 해외에 수출했다.현대·기아차는 지난 10년간 세계 자동차업체 가운데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싸구려 차’를 만드는 브랜드로 인식됐지만 2005년 이후 8년째 세계 5위 생산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글로벌 판매대수는 2002년 271만 대에서 지난해 712만 대로 2.6배로 증가했다.영업이익률 또한 프리미엄 브랜드인 독일 BMW에 견줄 정도로 높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생산시설에 대해 앞선 투자를 하고, 협소한 내수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 시장을 개척한 결과”라고 설명했다.이남석 중앙대 교수(경영학과)는 현대차그룹의 성장을 생산 플랫폼 공용화에서 찾았다. 그는 “현대차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기아차와의 통합 과정에서 비용 절감을 꾀했다. 플랫폼 공용화를 통한 규모의 경제를 달성했다”고 말했다. “본연의 경쟁력 외에 외부 환경 요인이 유리하게 작용한 측면도 있다. 일본 도요타가 리콜사태와 동일본 대지진 등으로 헤매고, GM이 2008년 말 금융위기 여파로 파산하는 사이에 많은 이점을 누렸다. 정부의 고환율 정책 효과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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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 대수보다 품질·브랜드가 중요10월 말 러시아·슬로바키아·체코·독일 등 4개국을 방문한 정 회장은 섭씨 영하 5도 추위에도 불구하고 아침 7시부터 도보로 1시간 동안 이동하며 프레스·차체·의장 라인을 집중 점검하는 등 강행군했다. 이어 생산·판매법인, 기술연구소를 방문해 판매 전략을 집중 점검한 그는 “품질 고급화로 미래를 대비하라”고 반복해 강조했다.“유럽시장 침체에도 불구하고 현대·기아차는 시장점유율을 상승시키며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뒷받침되지 않아 성장세가 주춤한다. 이제는 질적인 도약이 중요한 시점이다. 전 임직원이 역량을 집중해 품질 고급화, 브랜드 혁신, 제품구성 다양화를 추진해야 한다.”정 회장의 지적처럼 현대차의 브랜드 가치는 경쟁업체에 비해 아직 낮은 수준이다. 포브스가 11월초 발표한 ‘2013 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브랜드’에서 현대차는 81위를 기록했다. 브랜드 가치는 65억 달러로 지난해보다 21% 커졌지만 순위는 71위에서 열 계단 하락했다. 자동차 브랜드만을 떼어보면 BMW·도요타는 물론이고 혼다·닛산 등에 이어 10위에 그쳤다(60쪽 참조).이남석 교수는 “현대차가 안고 있는 문제는 지금까지 겪어온 도전 과제와 성격이 다르다”고 진단했다. “생산성, 자동변속기 성능, 원가 절감 등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이젠 생산적 측면의 경쟁력보다는 비(非)생산 측면의 경쟁력이 훨씬 중요해졌다. 브랜드 가치나 디자인 경쟁력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강조 되고 있다.”하지만 정 회장이 유럽에서 품질을 강조하던 그 시간에도 국내외 자동차시장에서 현대·기아차 관련 악재가 연이어 터졌다. 10월 28일(현지시간)엔 미국 고속도로 교통안전국이 기아 쏘렌토 6만여 대를 상대로 선루프 결함 예비조사에 착수했다. 이어 30일엔 한국의 국토교통부가 현대차의 제네시스 10만3000여 대에서 ABS제어장치 결함이 발생해 리콜 조치한다고 밝혔다.현대·기아차는 지난해 미국 환경보호청(EPA) 조사 결과 13개 차종 90만 대의 연비가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판정을 받기도 했다. 결국 최근 미국 소비자조사기관 컨슈머리포트가 발표한 ‘2013 자동차 신뢰도 조사결과’에서 조사 대상 28개 브랜드 중 기아차 16위, 현대차 21위에 머물렀다. 특히 현대차는 2009년 이후 순위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김필수 대림대 교수(자동차과)는 “지금의 자동차는 움직이는 생활공간으로 패러다임이 변화했고, 소비자가 차량 문제를 공론화할 수 있는 장이 확대됐기 때문에 작은 오점이라도 감추기 힘들다”며 “품질 불량에 대한 대처가 안이하면 장기적 관점에서 기업 이미지가 훼손된다”고 말했다. 이남석 교수는 “급격하게 외형이 팽창하다 보니 품질 문제, 부품업체의 동반 글로벌화에 따른 경영능력 문제 등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문책이 이어졌다. 현대차 연구개발본부장 등 임원 3명이 품질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현대는 ‘자발적 사의 표명’이라고 밝혔지만 업계에서는 품질경영을 강조하는 정 회장이 실제로는 이와 동떨어진 모습이 나타나자 그룹 내에 ‘경고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풀이한다.최근 한국신용평가는 보고서를 통해 “글로벌 완성차시장의 저성장 국면과 중소형차 시장의 경쟁을 감안하면, 고급차종의 판매기반을 확충하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출시 예정인 제네시스 후속 모델과 내년 미국시장 판매 계획인 K9의 성공 여부가 향후 고급차 부문의 경쟁력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또 “최근 관심이 늘고 있는 친환경차 부문에서의 기술력과 제품경쟁력이 중장기적으로 글로벌 완성차 시장의 경쟁구도를 바꿀 가능성도 있어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현대차그룹은 BMW의 M시리즈, 메르세데스 벤츠의 AMG와 같은 고성능차 양산을 검토 중이다. 현재 개발 중인 i20 월드랠리카를 기반으로 슈퍼카급 고성능차를 만든다는 구상이다. 장기적으로는 친환경차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올해 연구개발(R&D) 투자비용을 지난해 5조1000억원보다 약 37.3% 늘어난 7조원 규모로 확대했다. 이 중 친환경차 R&D 비용이 3조원을 넘는다. 올 초에는 세계 최초로 수소연료전지차 양산 체계를 울산공장 내에 구축했다.‘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정 회장은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문화·예술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향후 10년 동안 총 120억 원을 들여 문화·예술 후원 활동(메세나)을 시작했다. 임직원에 대한 역사교육 강화도 주문했다. 정 회장은 “역사관이 뚜렷한 직원이 자신과 회사를, 나아가 국가를 사랑할 수 있다”며 “뚜렷한 역사관을 갖고 차를 판다면 글로벌 시장에서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동차에서 예술과 역사의 향기가 풍겨나도록 만들어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화하겠다는 의도다.최근 정 회장은 출근을 30분 정도 앞당긴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그룹 출범 이후 14년간 지속해온 오전 6시30분 출근시간이 6시로 당겨졌다. 예고 없이 수시로 담당자를 불러 보고를 받는 정 회장이 더 부지런해짐에 따라 부문별 부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 역시 하루의 업무 시작이 더 빨라졌다. 최근 악화된 국내외 경영환경에 따라 조직에 긴장감을 주기 위해 꺼내든 카드라는 해석이 많다.현대차는 창업 후 앞선 경쟁자들을 벤치마킹하면서 달려왔다. 하지만 이젠 ‘패스트 팔로어’에서 ‘퍼스트 무버’로 변신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현대차그룹에 분기점이었다. 지난 10년간 이룩한 성장세를 향후 10년에도 이을 수 있을지 가늠하는 한가운데 정몽구 회장이 서 있다. 김필수 교수는 “현대·기아차도 프리미엄 브랜드로 포지셔닝을 고민할 시점”이라며 “도요타가 프리미엄 브랜드 렉서스를 선보인 것처럼 또 다른 도약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