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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sting | PUREUN GROUP CHAIRMAN KOO, HAE-WON - 20년째 울려퍼지는 ‘ 푸른 하모니’ 

 

사진 오상민 기자
구혜원 푸른그룹 회장은 1999년 남편 고 주진규 회장이 타계한 후 남편의 뜻을 이어 푸른저축은행 사내합창단 ‘푸른코러스’를 운영했다. 올해 합창단이 창단 20주년을 맞았다. 음악의 힘은 컸다. 150여 명 전 직원이 공연을 위해 한마음으로 움직이면서 화합을 이뤘다. 경영 성과도 좋다. 저축은행 중 유일하게 상장된 푸른저축은행은 지배구조 우수기업으로 평가받는다.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푸른그룹을 이끄는 구혜원 회장. 핵심 계열사인 푸른저축은행의 사내합창단 ‘푸른코러스’가 창단 20주년을 맞아 지난 5월 24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공연을 했다. 사진은 구 회장이 공연 당일 리허설을 관람하는 장면.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지난 5월 24일 저녁 서울 여의도 KBS홀에 가곡 ‘남촌’이 울려 퍼졌다. 41명 합창부 단원의 감미로운 하모니에 객석을 가득 메운 1500여 명 관객의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푸른저축은행의 사내 합창단 ‘푸른코러스’의 20주년 기념 연주회였다. 주제는 ‘사계(四季)’. 끝임없이 변화하며 순환하는 계절처럼 푸른코러스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마련한 무대다. 합창은 기본이고 역동적인 난타와 탱고 공연, 해금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졌다.

특히 마지막 무대에 감탄사가 이어졌다. 가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노래와 함께 수화로 율동하며 구혜원(55) 푸른그룹 회장 겸 푸른저축은행 대표이사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지난 4월 푸른저축은행에 입사한 장남 주신홍 과장도 함께했다. 푸른그룹은 푸른저축은행을 비롯해 부국사료, 푸른 F&D, 푸른통상 등을 거느린 중견그룹이다. 구 회장은 20주년을 기념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푸른코러스는 그에게 큰 의미가 있다. 1999년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남편 고 주진규 푸른저축은행 회장이 창설한 합창단이다. 주 전 회장은 사조그룹 창업자인 고 주인용 회장의 차남으로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 외동딸인 구 회장과 결혼했다. 20년 전 구 회장은 남편이 합창단과 연습할 때 피아노 반주를 해주기도 했다. 첫 공연날 회사 유니폼을 입고 무대에 오른 푸른코러스가 부른 곡이 남촌이었다.

20주년 행사가 끝난 지 보름이 지났을 무렵 구 회장은 10여 명의 직원과 저녁 식사를 했다. 손용희 합창단 단장을 비롯해 지휘자, 창단 멤버 등이 모였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는 데 가장 애쓴 직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였다. 창단 멤버였던 임기태 영업 1부 이사는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당시 평사원으로 무대에 올랐던 그가 20년 후 고등학교 3학년 딸과 함께 출연했기 때문이다. 그는 난타 공연을, 딸은 해금을 연주했다.

이문성 마포지점장은 “공연 책자 속 20년 간의 푸른코러스 포스터를 본 순간 울컥했다”고 했다. “푸른코러스 자체가 회사의 역사가 된 거 같아요. 특히 1999년 겨울에 열린 주진규 회장의 추모 음악회를 잊을 수 없어요. 그때 제가 주 회장의 애창곡인 ‘제비’를 불렀는데 객석이 눈물바다였습니다.”

임 이사도 주 전 회장을 추억했다. “참 노래를 잘하고 좋아했어요. 출근할 때면 회사 입구부터 노래를 부르며 들어왔지요.” (웃음) 구 회장이 설명을 보탰다. “남편은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캠퍼스)에서 경영학 박사를 딴 학구파였지만 성악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대학시절 성악과 수업을 청강할 정도였으니까요. 듣기로는 부모 몰래 아르바이트를 해서 성악과 교수에게 개인 지도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위기 이겨낸 정도경영

2시간 가까이 구 회장은 직원들과 담소를 나눴다. 흥미롭게도 그는 직원의 가정사는 물론 자녀 이름까지 일일히 기억했다. 해마다 푸른코러스 공연에 직원 가족들이 참석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 마치 모두가 한식구마냥 정겨워 보였다. 연주회는 2001년부터 나눔 활동도 한다. 아예 ‘불우이웃돕기’ 등의 타이틀로 연주회를 개최했다. 성금은 전액 복지단체에 기부했다. 2006년부터는 꽃다발이나 화환 대신 ‘사랑의 쌀’을 기부받아 ‘한국시각장애인 복지관’ 등 여러 복지단체에 나눠준다. 관람객들은 자선 연주회를 무료로 관람하고, 나눔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

구 회장이 경영 일선에 나선 것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1999년이다. 처음 6개월 동안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다. 평소 먹지 않았던 국물이 없으면 도통 밥을 삼킬 수가 없었다. 남편과는 대학시절 미팅으로 만났다. 이후 남편의 적극적인 구애로 결혼까지 이어졌다. 옛 생각에 구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열정적인 사람이었어요. 로맨티스트이기도 했고요. 생일 때면 한아름 꽃을 안겨줬어요. 그 안에 직접 쓴 편지가 있었고요….”

구 회장은 강인했다. 그는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란 존재는 강하다”고 설명했다. “사고당시 아들이 고등학생, 두 딸이 중학생과 초등학생이었어요. 애들이 불안해하는 모습에 정신 차리지 않으며 안되겠더군요. 다행인 점은 남편이 회사 기반을 잘 닦아 놓았어요. 당시 3년 연속 업계 최고 순익을 올린 우량기업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경영 전문가가 아니었던 그는 오롯이 기본에 충실했다. 취임 이후 빠짐없이 오전 8시 대출심의에 참여한다. 심의위원 중 가장 깐깐하다. 조금이라도 부실 우려가 높은 대출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욕심 내지 않고, 원칙에 맞게 투자해야 튼튼한 기업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말 뿐이 아니다. 지난해 1월엔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요즘 대기업 오너들이 경영상 책임을 피하기 위해 대표이사직을 내려놓는 모습과 비교된다.

기본을 강조한 책임경영은 파고를 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첫 번째 시련은 취임 1년 후 찾아왔다. 자산규모 3위의 간판 금고인 동아금고에 이어 5위인 해동금고가 영업정지를 당했다. 불안감을 느낀 수많은 고객이 저축은행에 몰려 예금을 빼기 시작했다. 예금자보호제도가 없을 때라 사태는 심각했다. 당시 푸른상호저축은행(구 푸른상호신용금고)도 상황은 비슷했다. 구 회장은 당황하지 않고 아버지 구평회 회장과 오빠들에게 전화해 개인 자금을 예치해 달라고 부탁했다. 효과는 탁월했다. 오너가 나서서 예금을 하자 고객들도 믿고 돈을 맡겼다.

2003년 카드 대란 이후 신용경색이 발생했다. 푸른저축은행도 끝내 2004년 159억원의 적자를 냈다. 은행 건전성 지표인 자기자본비율(BIS)도 6.04%로 크게 하락했다. 구 회장은 BIS비율을 높이기 위해 10년 만기 후순위 예금에 가입했다. 사실 대주주에겐 이 예금은 불리했다. 가입기간 내 중도인출이 안될 뿐 아니라 장기 예금으로서 특별한 혜택이 없다. 저축은행이 파산했을 경우 예금자가 돈을 찾아간 후 마지막으로 예금을 받을 권리가 있다.

구 회장은 “드디어 내년이면 예금이 만기”라고 했다. “당시 후순위채권을 발행하면 BIS비율을 높일 수 있었지요. 장기적으로 비용이 발생해 회사엔 손해더군요. 대신 개인자금으로 예금에 가입하고 아버지껜 자사주를 매입해달라고 했습니다. 근데 주가가 높을 때 사셔서 주가가 떨어지니까 너 때문에 손해가 많다고 투덜거리셨어요.” (웃음)

빠른 판단으로 위기를 넘은 적도 있다. 2010년 12월 자회사인 푸른2저축은행(현 OSB저축은행)을 일본계 종합금융그룹인 오릭스코퍼레이션에 매각했다. 금액은 약 1200억원. 놀랍게도 2011년 저축은행사태가 발생하기 직전이었다. 구 회장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경기가 악화되고 저축은행의 영업이 크게 위축되자 재무구조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직감했다”고 말했다.

매각 이후 푸른저축은행의 BIS비율은 2.94%포인트 오른 13.75%를 기록했다. 저축은행사태로 저축은행이 줄줄이 무너졌을 때 푸른저축은행은 끄덕 없었다. 구 회장은 “당시엔 결단이 필요했지만 한식구나 다름없던 직원들을 떠나 보낸 게 마음에 남는다”고 했다. 그나마 2002년 주식을 주당 5000원에 임직원들에게 상여로 지급했는데 매각 때 4만5000원에 팔려 수익을 올려줬다는 점이 위안이 된다고 덧붙였다.


▎20주년 행사를 기념해 구혜원 회장과 장남 주신홍 푸른저축은행 과장이 함께 무대에 섰다. 사진은 공연에 앞서 노래를 맞춰보는 모습.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딸 사랑

구 회장이 안정적으로 회사를 이끈 데는 아버지 고 구평회 E1 명예회장의 역할이 컸다. 구평회 명예회장은 LG화학 전신인 락희화학의 히트상품인 치약을 개발했고, GS그룹이 맡고 있는 정유사업을 일궈냈다. 구혜원 회장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보며 자연스럽게 경영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특히 국화빵마냥 닮은데다 위로 오빠만 셋을 둔 고명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구평회 명예회장은 영어실력이 뛰어나 LG그룹을 대표해 해외 사업을 추진했다. 한국인 최초로 태평양경제협의회(PBEC)의 국제의장을 지냈고, 한미경제협의회장, 무역협회장도 역임했다. 구평회 명예회장은 세계 곳곳으로 출장을 다녀올 때마다 딸 선물만 잔뜩 사왔다. 구 회장은 “방 한 켠 진열장이 아버지가 각국에서 사온 민속인형으로 꽉 찼다”고 들려줬다.

구 회장이 경영을 맡은 이후 구평회 명예회장은 시간 날때마다 딸 회사를 방문했다. “아버지는 회사 경영에 어려움이 없는 지 두루 살폈지요. 가끔은 계열사 대표들에게 밥을 사주며 잘 도와달라고 부탁했어요. 푸른코러스 공연에도 여러 차례 오셔서 재미있게 보곤 했답니다. 요즘 2년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큰 그늘이 그립습니다.”

어린시절의 구 회장은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예체능에도 소질이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땐 피겨스케이팅으로 전국체전에 나가 금메달을 땄습니다.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공연 문화가 드물던 1960년대부터 아버지께서 공연장에 데리고 다녔어요. 세상을 떠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물론 세계 최고의 오페라 가수로 활동했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공연도 볼 수 있었지요.”

그는 “하지만 창조적인 예술가로 활동할 만큼 자유로운 영혼은 못 된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마디로 고지식했어요. 학창 시절 결석은커녕 지각 한 번 한적이 없어요. 꼼꼼하고 철저한 성격은 오히려 삭막한 숫자와 싸우고 매사 정확해야 하는 금융업종에 맞는거 같아요.” (웃음)

은퇴 후 아트주얼리 전시관 만들고파

구 회장은 한 가지 버릇이 있다. 상대방과 눈을 맞추고 얘기를 나눈다. 그는 “눈을 보면 상대방 마음이 잘 느껴진다”고 했다. 상대방 눈을 보기 위해 습관적으로 눈을 크게 뜨면서 이마에 잔주름이 많이 생겼다. 그만큼 구 회장은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선 구 회장의 휴대전화 문자가 유명하다. 경영으로 많은 사람과 소통하기 어렵다보니 그는 휴대전화 문자를 활용한다. 간단한 문자가 아니라 장문으로 안부를 전한다. 지난 푸른코러스 20주년 행사가 끝난 뒤에도 그는 참석한 지인들에게 꼬박 2시간 동안 고마움을 담은 문자를 보냈다.

실제 그를 만나면 소박한 모습에 놀란다. 명품 브랜드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태원 뒷골목이나 동대문 상가에서 쇼핑을 한다. 홍대나 이태원쪽 벼룩시장에도 자주 간다. 한번은 원단 시장에서 직접 옷감을 떼다 어깨에 두를 숄을 만들기도 했다. 구 회장은 “지인들이 짠순이라고 부른다”며 웃는다. “허투루 돈 쓰는 것을 안 좋아해요. 회사에선 항상 이면지를 잘라서 메모지로 사용합니다. 공연을 좋아해서 자주 공연장을 찾는데요. VIP석 대신 VIP석 바로 옆이나 뒤에 붙어 있는 R석을 구매해요. 할인을 대비해 지난 공연표까지 모아 뒀답니다.”

그가 유일하게 돈 쓰는 곳이 아트주얼리다. “아트주얼리는 그림에 비하면 저렴하게 모을 수 있어요. 공간도 크게 필요하지 않고요. 특히 일상 생활에서 착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이점이 많습니다.”

아트주얼리 매력에 빠진 데는 이유가 있다. 국내 1세대 장식구 작가로 불리는 김정후 씨가 단짝이다. 30년 가까이 그를 따라 다니며 아트주얼리 작품을 감상하고 수집하다 보니 이 분야 전문가가 됐다. 지난 5월엔 20주년 연주회 테마인 ‘사계’를 주제로 신진작가 6인의 아트 주얼리 작품을 본사에 전시하기도 했다. 모두 그가 추천한 작가다. 인터뷰 당일에도 그는 단정한 검정 원피스에 아트 주얼리로 멋을 냈다. 빛깔이 고운 자개에 진주가 달린 귀걸이는 김정후 작가의 작품이다.

색색의 가죽 조각을 끈으로 연결한 목걸이도 독특했다. 그가 수집한 아트주얼리는 약 300여 점. 구 회장은 은퇴 후엔 비영리 아트주얼리 미술관을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소장품을 전시하거나 신진 작가를 후원하는 전시회를 기획해 보고 싶어요. 세계적으로 아트 주얼리 컬렉터로 출발해 아트주얼리 전시 기획자로 변신한 헬렌 드럿이 유명합니다. 그처럼 되지는 못하겠지만 학생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드는 게 꿈이에요.”

요즘 장남 주신홍 과장이 후계자 수업을 받는다. 구 회장은 “그동안 회사를 지키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직원들에게 미래 비전을 심어주지 못한 거 같다”며 “아들이 그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아들이 부드러운 성격에 대인관계가 폭넓어 잘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20주년 공연 당일날 리허설 때 잠시 주 과장과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입사한 지 한 달 밖에 안돼 일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고 했다. “가끔 창업 당시 입사한 직원들이 아버지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에게 아버지는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더군요. 아버지가 세운 회사에서 일하다보니 책임감이 무겁습니다. 우선 열심히 배우고, 직원들과 소통을 통해 친분을 쌓아갈 계획입니다.”

201407호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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