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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 

혁신과 창조로 일군 20년 벤처 신화 

최영진 포브스 차장 사진 전민규 기자
기술 하나만 믿고 맨 손으로 제조업 벤처에 뛰어든 무모한 엔지니어는 20여 년 후 성공한 벤처기업가의 모델로 우뚝 섰다. 세계 최초 제품을 8개나 보유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대표 이야기다.

▎황철주 대표가 가장 집중하는 것은 기술혁신이다. 보유하고 있는 특허만 2000여 개, 세계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제품이 8개나 된다.
2013년 3월, 한국에서 최초의 기업인 출신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됐던 황철주(56) 주성엔지니어링 대표. 비록 3일 만에 사의를 표명해 없던 일이 되고 말았지만 만약 황 대표가 중소기업청장에 올랐으면 어땠을까? 이런 상상을 한 이유가 있다. 그만큼 황철주는 입지전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황 대표가 1993년 종자돈 5000만원을 가지고 주성엔지니어링을 창업했을 때 누구도 성공을 예상하지 못 했다. 자본력도 없고, 연줄도 없는 그가 반도체 전(前)공정 증착장비 제조업을 해보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하나같이 뜯어 말리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주성엔지니어링은 한해 수천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고 황 대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벤처기업인’이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놀라운 것은 20여 년 동안 주성엔지니어링을 성공 궤도에 안착시키는 한편으로 다양한 공익적 사회활동에 매진해 지금까지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 경영 어려워지자 공직도 거절


황 대표를 인터뷰 하기 위해 19.8㎡(6평) 정도 되는 접견실에 들어서자 벽면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상장과 위촉장, 훈장 등이 먼저 눈에 띈다. 벤처기업대상 과학기술부 장관상(1998), 벤처기업상 철탑산업훈장(1998), 2011 대한민국 기술대상 금탑산업훈장(2011) 등은 하나같이 그가 성공한 기업가임을 대변해준다. 사회공헌 활동을 보여주는 각종 위촉장도 벽면을 빼곡히 장식했다. 브이소사이어티 회원, 한국진공학회 자문위원, 제10대 벤처기업협회 회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민간위원, 국가지식재산위원회 위원, 한국청년기업가재단 이사장 등 그가 맡았거나, 현재 맡고 있는 직책은 셀 수 없이 많다. 대기업 회장이 아닌데도 이렇게 사회 곳곳에 다양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기업인이 얼마나 될까. 접견실 벽면을 보면서 앞서 ‘황철주 대표가 중소기업청장이 됐으면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라는 상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접견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는데, 황 대표가 편안한 웃음을 지으면서 들어왔다. “만일 (중소기업청장) 기회가 다시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황 대표가 그냥 웃기만 한다. “우연히 제게 그런 기회가 왔는데, 다시 올 것 같지는 않아요.”

황 대표는 중소기업청장으로 내정된 지 3일 만에 사의를 밝혔다. 당시 사의 표명 이유를 ‘주식백지신탁 제도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임기 끝나면 (주식을) 돌려받는 줄 알았다. 내 주식이 나의 의지와 다르게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어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2013년 3월 당시 황 대표는 주성엔지니어링 주식 25.45%(약 695억원 상당)와 부인 지분 1.78%(약 48억원)를 보유하고 있었다. 황 대표가 중소기업청장 자리를 포기한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국가의 부름보다 기업이 먼저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황 대표가 쌓아온 좋은 이미지가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주식백지신탁 제도를 사퇴의 변으로 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고 했다.

“솔직하게 말해 제가 빈손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빈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며 그가 말문을 열었다. 당시 주성엔지니어링이 태양광 사업에 투자해 큰 적자를 보던 시기였다고 했다. 한때 4200억원의 매출을 올렸던 튼튼한 기업이었지만, 글로벌 태양광 산업의 부진으로 매출보다 많은 손실을 본적이 있다. 업계에서 ‘주성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평가를 내릴 정도였다. “국가에 대한 책임감과 기업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정말 어려웠다. 물론 지금도 기업보다 국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만일 주성엔지니어링이 잘나가던 시기였으면 다른 선택을 했을 것 같다. 그때는 자기 기업도 똑바로 하지 못한 사람이 그 자리에 올랐을 때 내 말을 들어줄까라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그런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짓궂은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는 조금 마음이 풀어진 듯 “중소기업을 바라보는 철학이 나와 맞는다면 고민을 해보겠다”며 웃었다.

주성엔지니어링의 현재가 만들어진 것은 기술력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있는 ‘주성 밸리’에는 연구동과 생산라인 등 아홉 개 동의 건물이 있다. 대표가 일하는 공간은 공장 정문 왼편에 있는 소박한 3층짜리 건물이다. 황 대표를 만나러 오는 이들은 정문 바로 옆에 대표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놀란다. 대다수의 기업인들은 좋은 자리에 대표 공간을 만들기 때문이다. 차가 오고가는 번잡한 곳에 대표 사무실이 있지만, 정문을 통과하면 6개의 R&D 센터가 주인처럼 차지하고 있다. 주성엔지니어링의 중심이 R&D 센터라는 것은 들어선 건물 위치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97년 처음 이곳에 공장 한 동이 들어섰을 때와 비교해보면 상전벽해가 된 것이다.

창업 때부터 수출기업으로 목표 설정


1993년 주성엔지니어링을 창업했을 때 임직원은 달랑 5명. 2015년 8월 말 현재 전체 임직원은 380여 명이다. 이중 60%가 R&D 인력이다. 회사가 아무리 어려워도 매출액의 10~20%를 연구개발비로 투자한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가 73%를 차지할 때도 있었다. “주성엔지니어링의 현재는 R&D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 때문에 가능했다”고 황 대표는 강조했다.

R&D에 대한 무서운 집착은 주성엔지니어링이 대기업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살아남는 원동력이다. 주성엔지니어링의 제품은 세계 16개국에 수출되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건 주성엔지니어링 하면 원천기술을 보유한 한국의 중견기업으로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황 대표는 “주성엔지니어링이 보유한 특허는 2000여 개가 넘는다. 세계 최초로 기술개발에 성공한 제품도 8개나 된다”고 자랑했다. 황 대표는 매일 아침마다 R&D 연구원과 회의를 하면서 기술 개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 자신이 반도체 전문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황 대표는 경북 고령군 방앗간 집 5남매 중 막내 아들이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작은 공장에 취직했지만, 친구들은 대학 입학을 권했다. “친구들이 내가 공부를 잘해서 그런지 대학 입학을 많이 권유했다”고 했다. 2년제 대학을 거쳐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네덜란드계 반도체장비회사 한국법인에 입사하면서 반도체와 인연을 맺게 된다. 7년 동안 일하면서 남들이 알려주지 않는 반도체 공정의 핵심 기술을 스스로 터득해야만 했다. 그가 수집하고 작성했던 자료만 작은 트럭 한 대분이었다고 하니, 청춘을 반도체 기술을 얻는 데다 쏟은 셈이다. 이 회사는 실적부진으로 한국을 떠났다. 그는 “이때 창업을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쉽지 않은 길임을 알았다. 처음부터 내수 시장이 아닌 전 세계를 목표로 했다. 그를 비롯해 창업 멤버 5명이 기술 개발에 매달렸다. 그런 노력을 거쳐 세계 최초 기술 제품인 반도체 전공정 증착장비 UHV-CVD(산소 및 수증기 분압 최소화를 통한 초고순도의 증착 환경을 제공하는 제품)를 개발했다. “창업을 한 후에 바로 제품을 수출할 수 있었다. 원천기술만 있으면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할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게 실제로 이뤄지더라.”

1995년 창업 첫해 매출은 13억원이었다. 처음 개발한 장비를 여러 차례 업그레이드해 수출하면서 2년 동안 돈을 모았다. 이 자금은 디램 메모리 공정장비인 ‘유레카 2000’ 개발로 이어졌다. 창업 3년 만에 매출액은 20배 이상 성장했다. 이 장비에 대한 황 대표의 애착은 대단하다. 미국의 장치회사와 협업을 통해 완성했고, 수출에도 성공했다. 그러자 한국의 대기업이 이 제품을 해외에서 역수입했다. 황 대표는 “대기업 입장에서는 조그마한 중소기업 제품을 신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우리 제품이 인정받는 것을 보고 국내에 들여온 것”이라고 회고했다. 낮은 온도에서 고품질의 박막 형성 기술을 선보인 ‘SDP CVD’, 초미세화 공정을 구현한 ‘TSD CVD’ 등 세계 최초 제품이 계속 개발돼 나왔다. 1999년에는 코스닥에 입성했다. 당시 공모가는 사상 최고인 34만원. 한국의 대기업도 주성엔지니어링의 기술을 인정했다. 내수 비율이 50% 이상으로 치솟았고, 황 대표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지옥에 2번 떨어져 봤다”는 황 대표의 말처럼, 예상치 못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그가 말한 지옥 경험은 2001년 대기업과 납품 계약이 취소되던 때, 그리고 2007년 시작했던 태양광 사업의 부진이다. 황 대표는 “나의 무능함을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나의 부족함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 상황을 겪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위기를 맞으면서 점차 경영자에서 기업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황 대표는 경영자와 기업가의 차이에 대해 “경영자는 수익만을 생각하지만, 기업가가 되려면 사회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가 정신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성공에 대한 가치관도 바꿔나갈 수 있었다. 예전에는 성공은 돈 많이 벌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진짜 성공은 사회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 돈을 벌었거나,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것”이라며 “사회에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사회적) 공유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황 대표는 설명했다. 그는 회사 임직원을 대하는 태도도 바꿨다. 투명 경영을 최고의 가치로 꼽았다. 그리고 소통의 기회와 시간을 많이 가졌다. 임직원 교육도 강화했다. 그러면서 임직원들에게 ‘비전’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임원에게는 1년에 1개월 동안 쉴 수 있는 기회를 준다. 팀장급은 3주 동안 쉴 수 있게 했다. 사람이 쉬어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성엔지니어링의 체질을 바꾸는 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황 대표는 세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2011년 3월 한국청년기업가정신재단을 설립한 이유다. “기업가로서 희망이 있는 세상을 만들고, 청년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줄 수 있는 인프라 구축을 하고 싶었다. 그런 교육을 하는 재단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황 대표가 사재 20억원, 황 대표와 함께 한국벤처기업 협회 공동대표를 맡았던 남민우 다산네트웍스 대표가 10억원의 사재를 출연했다. 여기에 정부와 기업의 도움으로 총 102억원의 출연금을 모아 재단을 설립했다.

“극한의 어려움을 이겨내야 성공한다”


▎10년 전 주성엔지니어링 부지의 미래를 생각하며 만든 미니어처. 10년 후 미니어처의 모습은 현실이 됐다.
“사람들에게 공통된 생각이나 지향하는 목표가 부재한 시대다. 대한민국 정신이 없는 것이다. 이 정신을 빠른 시간에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업가 정신을 씨앗으로 해서 대한민국 정신을 함께 만들고 싶었다.”

재단은 기업가정신 및 창업교육, 연구 및 조사활동 청년들의 창업을 돕는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고 있다. 황 대표는 이중 멘토링 활성화에 많은 공을 들인다. “기업을 운영하면서 힘든 일을 겪으면서 멘토링의 부재가 너무 아쉬웠다”고 설명했다. 재단은 청년과 스타 CEO와 함께 하는 ‘이야기 쇼’ 등의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황 대표는 “극한의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청년 창업자들에게 강조한다. 자신의 외동아들에게도 “사업을 이어받고 싶으면 극한의 어려움을 직접 겪어보고 이겨내야 한다”고 말할 정도다. 왜 이렇게 어려움을 강조하는 것일까. 그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서는 기득권을 가진 자와 1등만이 성공한다. 이런 환경에서 창업자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려움을 극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연줄이나 재력도 없는 상황에서 기술력 하나로 주성엔지니어링을 이끌어온 황 대표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주성엔지니어링 연구동에서 사진 촬영이 유일하게 가능한 곳이 있다. 그곳에는 10년 전 만든 ‘Future Valley’라는 이름의 미니어처가 있다. 현재 주성엔지니어링의 부지 모습과 똑같이 닮았다. 황 대표가 10년 만에 꿈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지금부터 10년 후 주성엔지니어링은 어떤 모습일까? 그는 “반도체 장치 산업에서 세계 1등 기업이 되는 것”이라며 무심한 듯 이야기했다. 10년 후 황 대표가 꿈꾸는 또 다른 퓨처 밸리의 모습이 기대된다.

- 글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

201509호 (201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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