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게 사회공헌사업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사회공헌 조직을 형식적으로
두거나 단순 후원금 전달에 머무르는 기업이 많다. 네이버가 2005년 서비스를 시작한 온라인 기부
포털 해피빈은 11년 동안 변화를 거듭하며 기부문화에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M49P-PXTV-OAA9-5F4A’ 6월 10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 네이버 그린팩토리에서 만난 최인혁(45) 해피빈재단 대표의 명함 뒷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숫자들이 배열돼 있었다. ‘콩 쿠폰’과 교환할 수 있는 인증번호다. 해피빈 사이트에 이 번호를 등록하면 기부 콩 10개(1000원 상당)를 받을 수 있다. 최 대표는 이렇게 사람을 만날 때마다 콩을 뿌린다.해피빈은 2005년 네이버가 시작한 기부 포털 서비스다. 2009년에 해피빈 재단법인이 설립됐다. 초기에는 후원이 필요한 공익단체가 해피빈 사이트에 사연을 올리면 기부자가 가상 화폐 ‘콩(개당 100원)’을 기부하는 기부형 크라우드 펀딩 방식으로만 운영됐다. 이 콩은 사용자가 살 수도 있고 후원 기업들이 네이버 블로그나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지급하기도 한다.네이버의 사회공헌팀으로 출발한 해피빈재단은 11년 동안 1260만 명으로부터 538억원을 모아 6000여 개 단체에 기부했다. 최 대표는 “사람들이 기부를 특별한 행위로 여기지 않고 일상적으로 기부하는 문화를 만든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온라인 기부 포털은 네이버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모델이다. 말 그대로 사람들은 이곳에서 다양한 기부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돈을 모아 특정한 단체를 돕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용자가 6000여 개 단체 중 기부할 곳을 골라 후원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후원 분야는 제도 개선, 문화·예술 지원, 결식 아동 돕기, 환경 보호, 해외 의료 지원, 여성 인권 신장, 다문화 지원, 노숙인 자립 지원 등으로 무궁무진하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은 ‘나눔기부’로 개인이 콩을 사서 원하는 단체를 후원한다. 최 대표는 “개인의 주머니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간 노력으로 최근 기업의 참여가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해 모은 기금 87억원 가운데 51억원이 기업 기부금이었다.기업이 해피빈을 이용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후원형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하는 것. 사용자가 일정 액수를 후원하면 해당 프로젝트나 업체와 관련한 제품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의류업체 데상트코리아는 해피빈 펀딩에서 남극 펭귄을 보호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용자는 시중가보다 10% 할인된 펭귄 티셔츠를 구매하고 그 수익금은 유엔 환경계획 한국위원회에 기부된다. 현재 목표금액 500만원의 465%인 2300만원을 모았다. 또 다른 방법은 해피빈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마케팅을 벌이는 것이다. 주방가전기업 휴롬은 ‘대한민국 가족건강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올바른 식습관 정보를 제공하고 건강퀴즈도 풀어보는 콘텐트를 제공해 재미와 정보를 준다. 사용자가 콘텐트를 보거나 이벤트에 참여하면 콩을 지급해 기부하게 하는 방식이다. 물론 따로 콩을 구매해 프로젝트를 후원할 수도 있다. 최 대표는 “홍보와 사회 공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어 기업들이 줄을 선다”고 말했다. 현재 200여 개 기업이 해피빈에 참여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아동 비만 예방 캠페인도 해피빈에서는 기부가 된다. 사용자의 표준체중보다 넘치는 몸무게를 1kg당 콩 한 개로 바꿔 기부할 수 있게 했다. 이 캠페인으로 4800만원이 모금됐다.
남극 살리기, 비만 캠페인도 기부로 변신최 대표는 “기업과 개인, 공익단체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콘텐트를 더 활발하게 이용, 사용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겠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해피빈은 공익 콘텐트를 유통하는 장이다. 그런 면에서 기부 포털 역시 인터넷 서비스다. 최 대표는 “사람들이 공익 콘텐트를 보려고 매일 사이트에 들어오진 않는다”며 “긴 시간 동안 사용자와 콘텐트 제공자를 끌어들여 판을 키우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네이버의 유통력을 큰 역할을 했다. 네이버의 첫 화면 곳곳에 공익 콘텐트가 숨어 있다. 뉴스, 연예가 소식, 육아 정보 등 다양한 네이버의 콘텐트에 해피빈의 이야기를 함께 노출해 기부로 연결할 수 있게 했다. 지난 5 월에는 네이버 모바일 주제판인 뉴스·연예·쇼핑·푸드 등에 기부 관련 이야기를 볼 수 있는 ‘함께N’을 추가했다. 이 메뉴를 모바일 첫 화면에 보이게 한 사용자가 한 달 만에 100만 명을 넘었다.이제까지 한 일들 중 가장 뿌듯했던 경험을 묻자 최 대표는 “공익 단체들이 온라인 모금을 위해 많은 비용과 노력을 들이는데 해피빈이 모든 인프라를 무상으로 제공해 사용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늘렸다”고 답했다. 또 6000여 개에 달하는 공익단체의 활동과 기부금 사용 내역을 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 역시 해피빈의 큰 자산이다.해피빈 서비스를 처음 개발한 이는 권혁일 해피빈재단 이사장이다. 그는 네이버 창업 멤버로 초기 검색엔진을 개발하는데 주요 역할을 했다. 검색 서비스가 자리잡기까지 7년 동안 일에만 매달린 권 이사장은 과중한 업무에 지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마침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기였다. 권 이사장은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의논해 2004년 네이버 사회공헌팀을 꾸렸다. 네이버 포털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다 이듬해 해피빈 서비스를 선보였다. 최 대표는 “당시 나도 합류하고 싶어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후 경영지원서비스 임원 등을 지내다 올 1월 다시 자원해 해피빈에서 일하게 됐다. 네이버의 광고 담당 이사도 겸하고 있다. 그는 “해피빈에서 기업 CSR 마케팅 사업을 하다 보면 기업의 니즈(needs)를 알게 돼 광고 업무에 도움이 되고, 광고 지식을 CSR 마케팅에 이용해 두 업무가 상승효과를 낸다”고 말했다.
모바일 기능, 네이버 페이 이용해 편리성 높여그가 해피빈재단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핵심 사업들을 두고 왜 사회공헌사업에 자원했느냐는 질문에 “네이버에서 사회공헌사업은 무척 큰 비중을 차지한다”며 “한가하게 일하는 곳이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해피빈의 장수 비결을 알 수 있다. 인터뷰에 동석한 해피빈 조성아 팀장은 “페이스북의 ‘코즈(Causes)’나 야후의 ‘네트워크 포 굿(Network for good)’처럼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과 연계된 온라인 기부 사이트도 오랜 기간 활발하게 운영되지는 못했다”며 “형식적으로 기부 포털을 만들어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10년 넘게 계속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실험하고 모델을 바꿔가며 이용자 만족도를 높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최 대표는 “한국적인 기부 정서에 맞는 설계가 또 다른 성공 요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미국·유럽과 다르게 자신의 기부금이 후원단체의 운영비로 쓰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해피빈 모금함은 개인 후원금이 70~8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네이버와 기업들이 후원한 콩들로 채워진다. 이 콩들이 운영비로 쓰여 개인의 소액 기부는 순수하게 후원사업에 쓸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해피빈재단은 기업 마케팅 수수료 등으로 수익을 내는데 흑자가 나면 전액 기부한다. 지난해부터 이익이 늘고 있다. 최 대표는 “네이버에게도 해피빈은 이미지를 제고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며 “다양한 공익 콘텐트를 유통하면서 사용자의 반응을 살피고 그곳에서 또 다른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모바일 시장이 커진 것 역시 해피빈의 성공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해피빈은 지난해 3월 모바일 서비스를 선보였다. “컴퓨터 앞에서 여유 있는 시간은 한정적이지만 모바일은 수시로 들여다볼 수 있으니까요.” 지난 4월에는 간편한 결제를 위해 네이버 페이도 연동했다. “쇼핑은 과정이 복잡해도 끝까지 결제하는데 기부는 불편하면 포기해버려요.” ‘정기적금’ 메뉴도 새롭게 만들었다. 콩을 모아뒀다가 좋은 사연을 발견했을 때 꺼내서 기부할 수 있는 서비스다.최 대표는 스스로를 해피빈의 열혈 사용자라고 불렀다. 매일 해피빈을 사용하고 수시로 기부한다. 그는 “교회에 다니면서 기부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기부를 하고 나면 착해지는 것 같아 멈출 수가 없다”며 기부 예찬론을 폈다. 그는 “해피빈에서 기부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큰 재능기부가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글 최은경 기자·사진 전민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