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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철 에스텍파마 대표 

해외에서 인정받는 API(원료의약품) 제조 기업 창업가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사진 장진영 기자
이노비즈협회가 추천한 한국의 혁신강소기업 여섯 번째 주자는 수입에 의존하던 원료의약품의 국산화를 성공시킨 바이오기업 에스텍파마다. 김재철 대표는 “올해 신약 도전과 CMO 확장으로 제2의 창업을 준비 중”이라고 강조했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 에스텍파마 본사에서 만난 김재철 대표는 “내가 임직원에게 강조하는 것은 건강이다”며 웃었다. 김 대표는 사내 야구동호회에서 투수로 활동하고 있고, 에스텍파마 임직원들이 수영을 배운다면 모든 비용을 회사에서 처리해주고 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제약사 연구원 생활을 그만두고 독립을 한 지 7년 만이다. 경기도 안산에 303㎡(약 1000평) 규모의 공장을 에스텍파마의 이름으로 매입을 했다. 처음으로 공장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동안 선·후배 연구실을 전전하면서 연구하면서 사업했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몇 년 동안 100평 규모의 공장에 더부살이 하면서 제품을 생산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1992년 많은 이들이 반대했지만, 단지 ‘원 없이 연구하고 싶어서’ 독립을 결심했다. 겁 없이 도전했고, 앞뒤 생각하지 않고 창업에 뛰어들었기에 해외에서 인정받는 API(원료의약품, 의약 완제품 전 단계 의약품을 말함) 제조기업 에스텍파마를 키워낼 수 있었다. 김재철(56) 에스텍파마 대표는 “뒤돌아보면 겁 없이 도전한 것이 좋은 선택이었다”며 웃었다.

자본금 1000만원으로 시작한 창업


1992년 가지고 있던 돈 500만원과 은행에서 빌린 500만원, 총 1000만원으로 15평짜리 사무실을 빌려 직원 두 명을 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자본도 없는 연구원이 원료의약품 독자 개발에 뛰어든다고 했을 때 어느 누구도 믿어주지 않았다. 가족들이 걱정했던 것처럼 현실은 냉혹했다. 3년 동안은 집에 가져다 줄 월급이 거의 없었다. 외부 연구소에서 자문 역할을 해주고, 그 연구소 시설을 빌려서 밤에는 혼자서 연구를 해야만 했다. 공공기관에 다니던 아내가 그나마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혼자서 연구하면서 위염치료제 원료의약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그런 노력 끝에 1996년, 100평 규모 공장의 월세를 내면서 직접 원료 의약품을 만들게 됐다. “비록 임대공장이지만, 이때부터 제조를 할 수 있게 됐다”면서 회사 창립일이 1996년 6월 1일인 이유를 설명했다.

에스텍파마는 제약업계에서 신뢰를 받는 API 제조 전문 기업이다. 원료의약품은 제너릭이나 신약 개발에 쓰이는 원료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완제품이 아닌 완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를 생산하는 것. 원료의약품도 완제품에 준하는 등록·허가를 받아야하는 의약품이다. API를 만들어내는 것은 신약을 만드는 것처럼 시간과 개발비가 드는 어려운 작업이다. “1개의 원료의약품을 만들려면 1년 반에서 2년 정도 걸린다.”

IMF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였다. 환율이 폭등하면서 수입 원료의약품 가격이 치솟은 것. 에스텍파마가 국산화에 성공한 원료의약품 판매가 상승하기 시작했다. 매출을 올리기 시작했고, 번 돈은 모두 설비투자와 연구개발에 쏟아 부었다. IMF로 많은 기업이 어려워했던 1999년, 김 대표는 경기도 안산에 1000평 규모의 공장을 매입했다. “처음으로 우리 회사 이름의 공장이 생긴 것이었다”고 김 대표는 회고했다. 2008년에는 8000평 부지가 마련되어 있는 화성에 국제 수준의 제조 라인을 가지고 있는 공장을 신축해 업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세계 바이어들이 화성 공장에 오면 다들 놀랄 정도로 시설이 잘 갖춰져 있다”고 자랑했다. 월세 공장에서 시작해 국제 수준의 공장까지 보유한 사업가로 성공 스토리를 쓰고 있는 것이다.

에스텍파마가 한국의 제약업계에서 원료의약품 제조업체로 우뚝 선 것은 이유가 있다. 그동안 한국 제약회사는 완제품 제조를 위해 필요한 원료의약품을 수입해서 사용했다. 원료의약품 개발에 상당한 시간과 자본이 필요하다. 신약 개발보다 제너릭 시장에 집중하는 제약업계의 분위기는 원료의약품 개발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기업도 하지 않은 일을 제약회사 연구원 출신의 창업가가 해낸 것이다. “에스텍파마가 인정받는 것은 수입에 의존한 원료의약품을 국산화에 성공시킨 것”이라고 자랑하는 이유다.

30여 종의 원료의약품 세계에 수출

에스텍파마가 개발하고 판매 허가를 받은 API는 천식 치료제, 소염진통제, 당뇨치료제 등 50여 종에 이른다. 이중 30여 제품이 일본과 중국, 미국 등으로 수출되고 있다. 에스텍파마의 매출액 중 60~65%가 해외 수출에서 나올 정도로, 수출 위주의 기업이다. 특히 일본 제약업계에서 에스텍파마는 상당히 신뢰받는 기업이다. 수출액 중 90% 정도가 일본에서 발생하고 있다. 김 대표는 “세계 의약품 시장에서 일본은 북미 시장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고 설명했다.

2013년 조사기관 IMS가 발표한 ‘Health Market’ 자료에 따르면 북미 의약품 시장 규모는 3490억 달러이고 일본이 단일 국가로는 가장 많은 1105억 달러를 차지한다. 당연히 일본 의약품시장 경쟁은 치열하다. “일본의 제약 회사 30여 곳에서 우리가 생산한 원료의약품을 사용하고 있다”고 김 대표는 자랑했다.

김 대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수출에 전력투구하기 시작했다.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는 말처럼, 한국의 조그마한 원료의약품 제조 기업을 믿어줄 제약 회사는 없었다. 특히 일본 제약업계는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계약을 할 때 1을 요구하지만, 제품 개발 과정에서는 기준이 2나 3으로 계속 높아지기 때문이다. 완벽함을 요구하는 일본 제약업계 특성을 해결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본이라는 험난한 시장에 진입한 것은 아낌없는 연구개발 투자와 신뢰였다. 신뢰는 에스텍파마의 성공 스토리 키워드다.

10년 전 일본의 한 제약사가 파킨슨병 치료제에 들어가는 원료의약품을 찾았다. 일본에 있는 원료의약품 제조 기업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수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연구원의 노력과 다른 벤처업계의 도움을 받아서 파키슨병 치료제의 원료의약품을 만들 수 있었다”고 김 대표는 회고했다. 새로운 제조 방법으로 품질과 가격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 일을 계기로 일본에서 우리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고 회고했다. 일본의 제약업계가 에스텍파마에 관심이 기울이기 시작했다. 천식 알레르기 치료제에 들어가는 원료의약품의 경우는 손해를 보면서도 일본에 수출해 시장을 선점했다. 시장 진입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숙제는 미국이나 유럽 시장으로 수출을 다각화해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매출액 대비 7~8%를 R&D에 투자

해외 제약업계에 에스텍파마 브랜드를 알릴 수 있던 것은 연구개발에 집중하면서 기술력을 높였기 때문이다. 161명의 임직원 중 연구원은 40여 명이나 된다. 중국에는 연구소도 설립했다. R&D에 투자하는 금액은 매출액 대비 7~8% 정도. “R&D는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이라고 김 대표는 말했다.

어느덧 한국 제약업계에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지만, 1000억원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신약 개발이다. 에스텍파마는 2014년 12월 신약개발 전문 바이오벤처기업 비보존의 지분 15.6%를 20억원에 사들였다. 현재 에스텍파마는 비보존과 함께 비마약 성 통증치료제 신약(VVZ-149)를 개발 중이다. 한국 세브란스병원과 미국 하버드대 부속병원에서 임상 2상이 진행되고 있고, 올 연말이면 임상이 완료될 것으로 예상된다. 김 대표는 “진통제 시장은 80조원 규모의 항암제 시장 다음으로 규모가 크다. 비마약성 진통제가 임상이 끝나면 매출로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자랑했다. 최근에는 미국 바이오벤처기업이 개발한 루게릭병 신약의 핵심 중간제를 에스텍파마가 공급하고 있다. 아주대학교의 모 교수와 함께 임상을 마무리하고 있는 간염치료제 신약의 시판도 내년이면 가시화 될 것으로 보인다.

신약 개발과 함께 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 계약제조업체) 분야에도 집중하고 있다. 글로벌 제약사와 함께 공동개발과 공동마케팅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공장의 시설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글로벌 제약사와 함께 폐암치료제, C형간염, 루게릭병, 급성골수성백혈병 등의 다양한 CMO를 진행 중”이라고 강조했다.

올해 매출 목표는 500억원. 2012년 586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지만, 일본의 환율에 영향을 받아 매출액이 2013년 422억원까지 줄어들었다. 이를 다시 500억원으로 끌어올리는 게 급한 숙제다. “2~3년 안에 1000억원 매출을 올리고 싶다. 벤처 정신을 그대로 살려서 리스크가 있어도 도전해야 할 게 생기면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김 대표는 말했다.

1983년 고려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화장품 업계에서 일하고 싶어서 태평양화학에 입사했지만, 그는 제약 사업부에 배치됐다. 제약사업부에 입사하기로 했던 신입직원이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후 태평양제약은 그룹으로부터 분리 독립했다.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제약 업계에 발을 디딘 것. 연구원으로 일할 때 그의 목표는 수입에 의존하는 원료의약품의 국산화였다. 하지만 회사는 개발이 아닌 영업에 신경을 썼다. 연구소 투자가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원 없이 연구를 해보고 싶어서 독립했다”고 김 대표가 말하는 이유다. 창업을 꿈꾸는 이들에게 김 대표는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하면 성공할 것이다. 어려움이 있어도 견뎌야만 한다”고 조언했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사진 장진영 기자

201609호 (201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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