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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 - 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7) 찰스 디킨스 

여왕에서 노동자까지 모두가 사랑한 디킨스 

김환영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흙수저·금수저, 헬조선이 운위되는 이 시대에 찰스 디킨스는 CEO들에게 시대의 아픔과 고민과 함께할 것을 촉구한다.

서구의 진정한 역사적 거물들을 판별하는 간단한 기준이 있을까. 그들은 성(姓)만으로도 식별된다. 프로이트·마르크스·셰익스피어라고 하면 된다. 굳이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윌리엄 셰익스피어라고 할 필요가 없다. 또한 세계사급 ‘셀럽’들은 그들의 성에서 ‘Freudian·Marxist·Shakespearian’ 같은 형용사가 파생했다.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70)도 그런 경우다. 그는 셰익스피어(1564~1616)와 더불어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양대 거봉(巨峯)이다. ‘디킨스적(的)’이나 ‘디킨스스러운’으로 옮길 수 있는 영어 단어 ‘Dickensian(디켄지언)’은 ‘끔찍하게 가난한’, ‘기괴하게 우스꽝스러운’, ‘유쾌한’ 같은 뜻을 담고 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발명한 디킨스


왜 그럴까. 우선 ‘끔찍하게 가난한’부터 따져보자. 근대적인 의미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한 통계에 따르면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 1859)』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다)라 할 수 있는 디킨스는 15개에 달하는 소설, 5개 중편, 수백 개 단편을 집필해 산업혁명 시대의 가난, 아동노동, 아동학대, 가정폭력과 같은 사회악에 독자와 국가와 사회의 관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했다.

미국에 패권(hegemony)을 넘겨준 선배 패권국가(hegemon) 영국은 당시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리며 강력한 경제력·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였다. 하지만 패권국가 영국에도 그늘이 있었고 신음하는 국민이 있었다. 디킨스의 문학은 사회 개혁 운동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그는 노예제에도 반대했다. 마르크스는 “정치인·언론인·모럴리스트들을 모두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많게 디킨스 혼자 정치적·사회적 진리를 세계에 내놓았다”며 디킨스를 극찬했다. 가난한 사람들, 노동자들은 돈을 아껴 그의 소설을 사 보았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디킨스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괴하게 우스꽝스러운’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그가 그리는 악당들은 ‘잔인하면서도 웃기는’ 사람들이었다. 디킨스가 혁명가였다면 그들을 순전히 잔혹하게만 그렸을지도 모른다. 혁명에는 순도 높은 분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킨스는 일종의 ‘개량주의자’였다. 그는 시대의 잔인함에는 상냥함·친절로 맞서야 한다고 봤다. 부자가 베풀어야 한다고 봤다. 그는 또 유쾌함·즐거움의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디킨스는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발명해 세계에 선사했다. 세계 곳곳···.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도 크리스마스는 ‘명절’이 됐다. 디킨스는 크리스마스를 화려하게 복원했다. 어찌된 일일까.

콤플렉스와 트라우마를 필력의 원천으로


▎식구들이 모두 모여 선물을 나누고 식사하는 정겨운 모습,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크리스마스는 모두 디킨스의 발명품이다.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를 적대시했다. 그들은 대부분 칼뱅주의자들이었다.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에 남아 있는 가톨릭의 ‘잔재’들을 제거하려고 했다. 청교도들의 ‘가톨릭 청산’ 구상에는 크리스마스가 포함됐다. 크리스마스라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이다. 그들은 크리스마스가 이교도들의 풍습과 그리스도교의 있어서는 안 되는 혼합물이라고 생각했다. 청교도(Puritan)이라는 말 자체가 ‘오염되지 않은 깨끗함(purity)’에서 나왔다. 그들은 불순물을 혐오했다. 영국내전(1642~ 1651)에서 승리한 세력의 한 축을 이룬 청교도들은 1647년 크리스마스를 금지시켰다. 영국에서 크리스마스가 부활한 것은 1660년이다. 청교도들의 입김이 셌던 미국에서도 크리스마스는 1659~79년 기간에 불법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크리스마스는 디킨스의 발명품이다. 크리스마스 트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식구들이 모두 모여 선물을 나누고 식사하는 정겨운 모습,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는 크리스마스는 디킨스의 중편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1843)>에 나오는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캐럴>은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유행시켰다. 디킨스는 급전(急錢)이 필요해서 쓴 <크리스마스 캐럴>을 6주 만에 쓰면서 “울다가 웃다가 다시 울었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셰익스피어에게 매료됐듯이, 빅토리아 여왕(1819~1901)도 디킨스의 애독자였다. (디킨스와 셰익스피어의 삶을 ‘평행 이론’으로 풀어볼 수도 있겠다.) 빅토리아 여왕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어떤 때는 자정까지 디킨스 작품에 대해 사람들과 토론했다. 셰익스피어와 디킨스의 공통점은 ‘가방 끈이 짧았다’는 점이다. 어쩌면 천재들에게 정규 교육은 별 의미가 없다. 하지만 디킨스보다 한 세기 전에 태어난, 『영어 사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 새뮤얼 존슨(1709~1784)만 해도 옥스퍼드대를 중퇴했다. (『영어 사전』을 집필한 공을 인정해 옥스퍼드대는 존슨에게 석사학위를 수여했다.) 하지만 가문이나 교육 배경에서 ‘흙수저’ 출신인 디킨스는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한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서 여왕 못지않게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디킨스는 별명이 ‘흉내 낼 수 없는 자(The Inimitable)’였다. 그의 성공 비법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그의 집필 방식과 삶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

첫째, 디킨스는 콤플렉스나 트라우마를 필력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는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해군 경리부의 하급 관리였는데 돈에 대한 관념이 없었기에 채무자 감옥(debtor’s prison)에 갇히기까지 했다. 그 바람에 디킨스는 12세 때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약 공장에서 4개월 동안 하루 10시간 견습공 일을 해야 했다. 노동자 계급으로 추락하는 충격 속에 가난을 배웠다. 사실 그가 가난을 겪지 않았다면 <데이비드 카퍼필드(1850)>, <올리버 트위스트(1838)> 같은 작품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문학 작품은 <아라비안 나이트>로 알려졌다.)

디킨스에게서 발견되는 불편한 양면성


▎디킨스 인생 말기는 가장 죄스럽고도 ‘행복한’기간이었다. 디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중시된 가정의 가치를 표상했지만 조강지처와 별거하고 연극 배우 엘런 터넌(사진)과 내연관계를 맺는다.
15세부터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일했다. 속기술을 배워 법정 속기사가 된 그는 20세 때 기자가 됐다. 1년 간의 약혼 기간을 거친 후 1836년 캐서린 호가스와 결혼하면서부터 성공가도를 달렸다. <‘보즈’의 스케치 집(Sketches by ‘Boz’, 1836)>, <픽윅 클럽의 기록(The Pickwick Papers, (1837)>의 출간으로 25세에 불과한 그는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가 됐다. 그의 확고한 위상은 죽을 때까지 유지됐다. 무명시절 무료로 기사를 쓰기도 했던 디킨스가 말이다. 디킨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숨겼다. 디킨스 사후 6년 후에야 그에 대한 전기가 출간되면서 그의 어린 시절의 윤곽이 밝혀졌다. 하지만 그는 1860년 초 자신의 사신(私信)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디킨스 삶의 전모는 기본적으로 미궁에 빠졌다.

둘째, 디킨스는 부지런한 관찰자였다. 게다가 타고난 기억력까지 겸비했다. 디킨스는 셰익스피어처럼 수많은 인물을 창조했다. 그의 작품에는 989명의 인물이 나온다. 아버지나 첫사랑을 포함해 지인을 모델로 삼기도 했지만, 런던 거리를 누비며 인물들을 관찰했다. 그는 매일 15~25km씩 걸었다.

셋째, 디킨스는 최초로 독자들과 본격적으로 소통한 저자였다. <올리버 트위스트> 등 그의 작품들은 다수가 매월·매주 연재물로 집필됐다. 디킨스는 매회 출간 이후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다음 회에 반영했다. 『오래된 골동품 상점(The Old Curiosity Shop, 1840)』을 연재할 때는 주인공 넬(Nell)을 죽이지 말라고 호소하는 독자 편지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미국 팬들은 영국에서 온 배가 항구로 들어올 때 “넬이 죽었나요?”라고 선원들에게 외쳤다.

넷째, 디킨스가 기자 생활을 거쳤다는 점도 한 몫 크게 성공에 작용했다. 기자들은 글을 빨리, 또 마감 시간에 맞춰 쓰는 훈련을 받는다. 기자 경력은 디킨스에게 인물과 사회에 대한 냉정한 관찰력을 선사했다.

다섯째, 디킨스는 야심가였다. 성공하려면 무작정 일에 몰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야심·야망을 불사르는 것도 필요하다. 디킨스는 어려서부터 자신이 무엇으로 유명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성공한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때 배우가 되려고 생각했다. 사실 배우가 될 뻔한 적도 있었다. 작가가 된 다음에는 배우의 꿈을 다른 방식으로 구현했다. 소설 집필 중에 거울 앞에서 극중 인물처럼 연기했다.

디킨스의 첫사랑은 20살인 1832년에 만난 마리아 비드넬이라는 여성이었다. 출신이 신통치 않고 미래도 불투명한 디킨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비드넬의 부모는 마리아를 파리로 유학 보내버렸다. 디킨스는 성공·출세해야 한다는 의지를 더욱 강렬히 불태우게 된다.

여섯째, 인력(人力)으로 어찌할 수 없는 업보나 신(神)의 섭리, 우연도 중요하다. 디킨스는 인생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비중을 중시한 듯하다. 그 자신이 여러 번 체험했으니까. 그의 작품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비평가들이 즐겨 혹평하는, 스토리 전개가 확 바뀌는 우연이 자주 발견된다. 그의 작품은 연극이나 영화화되기 쉬운 구성으로 돼 있다. 디킨스가 연극배우를 꿈꿨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연극은 영화의 어버이다. 디킨스의 모든 작품을 런던 내 모든 극장이 연극으로 상연할 때도 있었다. 영화 시대의 개막은 디킨스 작품의 입지를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디킨스 인생 말기는 가장 죄스럽고도 ‘행복한’ 기간이었다. 디킨스는 빅토리아 시대에서 중시된 가정의 가치를 표상했다. 하지만 아들 일곱, 딸 둘을 낳은 조강지처 캐서린과 1858년 별거에 들어간다. 당시 분위기에서 디킨스 같은 사회 명사가 이혼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별거마저도 사회에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 일면 ‘야비’하게도 디킨스는 성격 차이로 결혼 생활이 불행했으며 캐서린이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둘러댔다. 디킨스 자신보다 27살 어린 연극 배우 엘런 터넌과 내연 관계를 맺었다. 디킨스가 45세, 터넌은 18세였다. 터넌은 디킨스의 막내딸과 동갑이었다. 디킨스는 터넌에게 돈 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의 유산을 남겼다. 터넌은 디킨스 사후에 과거를 감추고 옥스퍼드대를 졸업생과 결혼해 사립학교를 운영했다. 터넌의 아들은 어머니와 디킨스의 관계를 어머니 사후에 알고 깜짝 놀랐다.

자선모임 연설자로 약방의 감초

모든 사람, 모든 위인들이 다 그렇듯, 디킨스에게도 불편한 양면성이 발견된다. 디킨스는 마술 묘기를 할 줄 알았고, 폴카 춤을 즐겨줬다. 그는 자선가였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자였다. 친구들에게는 의리가 있었다.

디킨스는 어렸을 때부터 그 집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살고 싶어했던 집을 1856년에 구매한다. 많은 소원을 이뤘으나 굉장히 불안하고 불행한 사람이기도 했다. 좀 까다롭고 괴팍스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여행 중에는 호텔 방 가구를 친숙하게 배치한 다음에야 잠들 수 있었다. 집에서는 독재자 기질이 있었다. 아들들이 평범해 실망한 디킨스는 아들 중 둘만 영국에 남게 하고 나머지는 해외 식민지로 보냈다. 딸 케이티는 자신이 아버지를 헤아릴 수 없이 사랑했지만, 아버지는 “사악한 인간”이라고 술회했다. 케이티에 따르면 말년에 사랑에 눈이 먼 디킨스는 ‘미친 사람’처럼 돼 자식들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디킨스는 유명하게 된 다음에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 했다. 가난했던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가 작용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는 거둬야 할 식솔과 친구들, 손 벌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만찮은 돈이 들어갔다. 그래서 그는 돈벌이가 잘 되는 낭독회를 자주 개최했다.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재주가 많은 것도 탈이다. 그의 재주를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그는 20년간 잡지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한 번에 두 개의 작품을 동시 작업하는 경우가 흔했다. 디킨스는 각종 위원회나 자선 모임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꼭 있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는 또 탁월한 만찬 연설가였다. 디킨스는 어렸을 때부터 시가를 즐겼다. 50즈음에 그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그는 결국 환갑에도 이르지 못한 58세 나이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최고경영자여! 어렸을 적에 읽은 <올리버 트위스트>가 기억 나는가. 여왕에서 노동자까지 모두가 사랑한 디킨스가 오늘의 CEO인 그대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뭘까.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에는 그늘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산업화, 산업화 4.0은 풍요를 낳는다. 하지만 세계화·신자유주의의 폐해가 누적된 것도 사실이다. 흙수저·금수저, 헬조선이 운위되는 이 시대는 CEO들에게 시대의 아픔과 고민과 함께할 것을 촉구한다. 세계명작집에서 어린이용으로 읽었던 <올리버 트위스트>를 성인용 버전으로 한번 읽어 보시는 게 고민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등이 있다

201609호 (201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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