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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NOVATIVE COMPANY (7) KOREEL] 오현규 코릴 대표 

26년 한 우물, 한국 대표 '릴' 전문기업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사진 김경록 기자
이노비즈협회가 추천하는 이달의 혁신강소기업은 ‘릴’ 전문기업 코릴이다. 릴은 전기청소기부터 주유소, 카센터부터 항만, 공항, 건설현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제품이다.

▎릴은 크기도 사용처도 다양하다. 오현규 대표는 “산업용 제품을 만드는 글로벌 기업에서 우리의 제품을 많이 이용한다”고 자랑했다.
“회사를 만든다고? 회사 차리는 거 쉽지 않아.” 이 한 마디가 ‘릴’ 하나로 한국과 해외 시장을 누비는 강소혁신기업 ‘코릴’을 탄생시키게 했다. 꾸준하게 한 우물을 파지 못하고 이런 일 저런 일을 전전하던 샐러리맨이 번듯한 기업가로 탈바꿈하게 만든 것은 자존심이었다. 오현규(59) 코릴 대표는 “그동안 이것저것 하느라 자리를 찾지 못했는데, 이 한마디가 나의 자존심을 건들었다. 한번 해보자고 마음을 먹은 계기였다”고 회고했다.

코릴은 한국을 대표하는 릴 제조 기업이다. 릴은 전기선이나 에어호스를 감아두는 것을 말한다. 릴을 쉽게 이해하려면 전기청소기의 선을 이해하면 된다. 과거 릴이 없을 때에는 전기선을 청소기 하단부나 옆에 감아뒀다. 지금은 버튼을 누르면 전기선이 휘리릭 소리를 내면서 청소기 안으로 들어간다. 릴 덕분이다.

주유소부터 대형 크레인까지… 릴이 필수

자동차 정비소에서도 릴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천장에 달려있는 릴에서 줄을 내려 바퀴에 바람을 넣거나 엔진 오일을 자동차에 주입한다. 이후에 조금 당긴 후에 줄을 놓으면 릴에 바로 감기게 된다. “릴을 만드는 게 쉬워보이지만, 상당한 노하우가 필요하다. 지금 코릴과 경쟁하는 국내 기업은 거의 없다”고 자랑했다. “우리처럼 꾸준히 기술개발에 투자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고 덧붙였다.

릴은 학교나 주유소부터 항만, 공항, 병원, 건설 현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공항에서는 항공기에 기름을 넣는 특수차량이나 비행기에 전원을 공급할 때도 릴이 사용된다. 심지어 항만에서 하역작업을 할 때도 릴이 필수적이다. “대형 크레인을 가동하는데 전기가 필요하다. 높은 곳에 있는 크레인이나 이동하는 크레인에 전기나 유압을 공급할 때 릴이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외에도 해저 탐사용 선박이나, 원유나 가스 전달 용 선박 등에도 릴이 필수적이다. 대형 산업용 릴에는 릴과 필수적으로 컨트롤러도 필요하다. 전기와 유압을 조절해야 하는 컨트롤러가 없으면 릴은 무용지물이다.

코릴은 전문적인 산업용 릴을 만들면서 컨트롤러도 제작하는 몇 안 되는 기업으로 꼽힌다. 전기충전차 및 전기굴착기용 릴을 한국에서 처음 출시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다른 기업이 도전하지 않는 특수한 릴 제작에 뛰어들면서 10여 개의 특허와 20여 개의 실용신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런 대형 장비에 들어가는 릴의 무게는 수십 kg에서 수십 톤이 넘는 것까지 다양한다. 기술력이 없으면 제작이 불가능한 제품들도 많다. 현대중공업 외 1만6000여 기업이 코릴의 제품을 쓰고, 호주 및 독일 등 43개국에서 코릴의 릴을 찾는 이유다.

릴은 사용되는 곳도 다양하고, 모양이나 크기도 천차만별이다. 표준화된 제품도 있지만, 비표준화 제품의 경우는 주문제작이 필수다. 코릴은 이런 주문제작에 강점을 보이고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을 할 수 있다는 게 코릴의 경쟁력이다. 주문형 제품을 코릴에 의뢰하는 곳은 국내에서 6000여 개에 이른다. 오 대표는 “주문형 제품은 특수한 시설에 많이 사용된다. 예를 들면 건설장비나 소방차, 사다리차, 제철소 등에서 사용되기 때문에 미리 주문을 받아서 제작을 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주문제작형 릴은 언제 어디에서 문제가 발생할지 모른다. 표준화된 제품은 릴 구입처에서 수리도 가능하겠지만, 특수 주문제작형 릴의 경우 코릴이 직접 수리를 하는 게 대부분이다. A/S 때문에 다양한 에피소드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오 대표는 미국과 중국을 오가는 선박에 설치한 릴이 고장 난 것을 예로 들었다. “보고를 받고 해외 항만에 정박해 있는 선박으로 급히 갔는데, 항만에서는 수리 중에 발생하는 용접 불꽃이 금지되어 있어서 아주 난감했다”고 회고했다.

코릴이 선택한 방법은 배가 항구에 들어올 때에 맞춰서 운항 준비를 하는 잠깐 동안의 시간에 수리를 하는 것. “3명이 가서 LA 항에서 수리를 했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이후에 상해항에 간다고 해서 상해로 가서 기다렸는데 배 위에서 수리가 불가능했다”고 기억했다. 상해항을 떠나 중국 영파항으로 간다고 해서 영파항에 가서 수리를 마친 경우도 있다. “코릴은 그렇게 제품을 끝까지 책임지기 때문에 해외에서 우리에게 주문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B2C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캠핑용 릴 제작


얼마 전에는 코릴을 모르는 일반인을 위해 캠핑용 전선 릴도 제작했다. “코릴의 제품을 일반인에게 알리고 싶어서 만들어봤다(웃음). 야간 조명용 LED 램프도 있고, 누전차단기가 부착된 콘센트도 장착했다”고 자랑했다. “수십 톤 무게의 릴을 만드는 곳에서 일반인을 위한 캠핑용 릴을 만드는 게 어울리지 않지만, B2C 시장에 진출을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2015년 코릴의 매출액은 202억3600만원. 2016년 8월 현재 임직원은 89명이다. 인천 가좌동에 있는 본사와 제 1공장 외에도 2010년에는 전북 군산에 제 2공장을 준공했다. 2012년에는 연구소를 오픈해 기술개발에 더욱 매진하고 있다. “처음 릴 사업을 시작할 때는 경쟁사가 많았지만, 지금은 코릴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남았다. 매년 매출액의 5~8%를 R&D에 투자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았다”고 오 대표는 강조했다.

오 대표는 1991년 1월 코릴 설립 이후 26년 동안 릴이라는 한 우물을 파고 있다. “우연히 릴을 알게 됐고, 릴의 매력에 빠지면서 한 우물을 파게 됐다. 릴을 알기 전에는 되는 일 하나 없이 여러 일을 전전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며 그는 웃었다.

그는 업계에서 자수성가형 CEO로 꼽힌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전북 남원 수지면에서 태어났다. 남원고를 졸업한 후 대학 입학시험에서 떨어진 후부터 그의 이력은 다양한 경력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릴을 만나기 전에는 정말 어떤 일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말할 정도다.

대학 입시에 떨어진 후 그가 들어간 곳은 전북 이리공고 내 공업기술원이었다. “집에서 기술이라도 배우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해서 들어갔다.” 이곳에서 기계, 제도, 전기, 용접 등을 배웠다. “공고 내에 있는 기술원이라서 그런지 나랑 같이 배우는 애들이 후배였다. 조금 창피하기는 했지만, 이때 배운 것이 릴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며 웃었다.

기술원 졸업 후 군에 입대를 했다. 군대에서 만난 후임들이 대학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후임들을 보면서 대학에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제대 후 대학 입시에 다시 도전했지만, 4년제 대학에 또 떨어졌다. “대학에는 꼭 가야할 것 같아서 광주에 있는 경상전문대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컸던 탓에 그는 전문대 졸업 이후 일본 이시카와 현의 농업기술원 연수를 받기도 했다. 이때 배워둔 일본어가 인생의 반전이 되는 무기가 됐다. 그는 회사를 운영하면서 인천대 경영대학원 MBA 경영학 석사를 마치면서 공부의 갈증을 해결했다.

IMF 때 카센터 늘어나면서 사업 확장

1984년 일본에서 돌아온 후 그는 낙농업에 도전했다. “농촌에서는 겨울이 할 일 없는 시기였는데, 축산을 하면 1년 내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일본에서 알게 됐다”고 이유를 말했다. 빚을 내서 젖소 4마리를 구입했다. 당시 고향과 가까운 전북 임실에 한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우유공장이 있다는 것도 낙농업에 도전한 이유다. 당시 남원에서 축산업을 하는 집은 몇 곳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유를 공급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온 가족이 붙어서 일을 했다. 2년 동안 젖소를 잘 키운 덕분에 대기업 우유공장에서 우유를 받았다.

하지만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의료보험이 없는 상황인데, 84년 결혼한 아내가 큰 병을 앓은 것. “농장에서 번 돈으로 감당이 안됐다. 빚이 500만원 정도 쌓이니까 새로운 일을 찾아야만 했다.”

젖소 사육은 동생에게 맡기고 1986년 아내의 고향인 부산으로 갔다. 이곳에서 콘도 분양 영업을 했다. 영업을 하던 중 고객의 제안으로 식당도 해봤다. 하지만 이마저도 1년 만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빚을 갚기 위해 취직을 결정했다. 1987년 자동절단기를 일본에서 수입해 국내에 판매하는 부산의 한 기업에 입사했다. 일본어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 그는 평생의 업이 된 릴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일본 기업 사장이 그 업체에 자주 왔는데, 일본어를 내가 할 줄 아니까 친하게 지냈다. 그 일본 기업이 릴도 만드는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일본 기업 사장은 일 잘하는 오 대표를 눈여겨 봤다. 그에게 한국에서 릴 영업을 직접 해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했던 것. 1991년 삼국산업(현 코릴)이라는 릴 제조업체를 설립했다. 당시 일하고 있던 곳에서는 창업을 한다는 그의 말에 “회사 만드는 게 쉽지 않다”라는 자존심 상하는 말을 했던 것. “그동안 온갖 일을 해왔지만, 내일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내 자존심을 건드는 이야기를 듣고 이를 악물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1200만원의 자본금으로 릴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그가 받은 첫 주문은 서울 청계천에서 에어호스 릴 OEM을 만들어달라는 것이다. “지금 본사는 인천 가좌동에 있지만, 그때는 인천 계양동 쪽에 쪽방을 만들어서 3명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그때 OEM 제품은 수작업이었다”며 웃었다.

운도 따라줬다. 1990년대에는 각 공장에서 정리정돈 운동이 불기 시작했다. “공장 내에서 전기나 호스를 릴만큼 정리정돈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대기업에서도 주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현대차를 시작으로 삼성자동차의 서비스센터에서도 코릴의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97년 IMF는 오히려 기회였다. “당시 자동차 회사에서 사람들이 밀려나오기 시작했고, 대부분 카센터를 차렸다. 우리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며 웃었다. “릴을 만나기 전에는 내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릴을 만난 후부터 어디를 가든지 릴만 보이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오 대표는 올해 매출액 목표를 300억원으로 잡았다.

- 최영진 기자 cyj73@joongang.co.kr·사진 김경록 기자

201610호 (201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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