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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수도사 출신 교황그레고리오의 인생을 ‘복기’해보면, 그는 하늘이 내고 훈련시킨 인물이었다. 572년께 30세 나이로 로마 시장이 됐다. 행정을 배웠다. 57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모든 재산을 ‘하느님 사업’에 내 놓았다. 시칠리아 섬에 있던 땅에 6개의 수도원을 만들었다. 로마에 있는 대저택도 수도원으로 개조하고 그 자신도 수도사가 됐다. 예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확신 속에서 그레고리오는 기도하고 명상하는 생활에 매진했다.교황이 된 다음에 그레고리오는 수도사로 지낸 3년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했다. 지나치게 잦은 단식 때문에 건강을 해쳤다. 평생 위통(胃痛) 때문에 고생했다. 그레고리오가 무병장수를 누리지 못한 원인 중 하나가 됐다. 13년 6개월 8일 동안 교황으로 일할 때에도 수도승처럼 살았다.수도사로서 관상(觀想)하는, 즉 “신(神)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랐던 그레고리오를 베네딕토 교황(재위 575~579)이 억지로 수도원 바깥 세상으로 불러냈다. 577년 그를 부제(副祭)로 임명했다. 개신교 용어로는 집사(執事)가 된 것이다. 그에게 관상 기도란 ‘하느님 안에서 쉬는 것’이었다. 더 이상 쉴 수 없게 됐다.578년 혹은 579년에는 교황 펠라지오 2세(재위 579~590)가 동로마 제국 황실이 있는 콘스탄티노플로 그레고리오를 대사로 보냈다. 황실을 무대로 그레고리오는 외교와 국제정치를 배웠다. 침체한 로마와 달리 콘스탄티노플은 화려했다. 그는 궁정 음모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 같이 콘스탄티노플로 떠난 수사들과 함께 수도승처럼 살았다. 원병(援兵)을 청하는 게 목표였던 그의 임무는 결국 실패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는 ‘제 코가 석자’였다. 황제는 동쪽의 페르시아와 북쪽의 아바르족·슬라브족과 대치하는 중이었다.585년 펠라지오 2세가 그레고리오를 로마로 불러 자신의 고문 겸 비서로 삼았다. 그레고리오는 특히 이탈리아 내 주교들을 다루는 문제를 맡았다. 590년 교황 펠라지오 2세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로마의 성직자·원로원·민중이 그레고리오를 만장일치로 교황으로 추대했다. 반강제적이었다. 도토리 키 재기 같은 아등바등한 경쟁은 없었다. 누가 봐도 결론은 그레고리오였다.최초의 수도사 출신 교황이었다. 교황이 되는 것은 결코 그레고리오가 바라던 결과가 아니었다. 그는 동로마 제국 황제 마우리키우스(재위 582~602년)에게 자신의 교황 선출에 동의하지 말아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숲 속에서 3일 동안 숨어 있었는데 신비스러운 빛이 그를 비추어 사람들이 그를 찾아냈다는 전설도 전한다.결국 교황이라는 자리에서 일하는 게 신(神)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일단 교황이 된 다음에는 맹렬하게 교황직을 수행했다. 그는 탁월한 행정가·경영인이었다. 준비된 교황이었다. 교회의 곳간을 열어 기아 문제를 해결했다. 수도사들을 거리로 내보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게 했고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빈민 구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안보·국방’이었다. 사실상 중부 이탈리아의 세속 군주인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장군들을 임명했고 병사들의 봉급을 챙겨줘야 했다. 592년 랑고바르드족이 침입하자 협상으로 물러나게 했다. 침략군에게 뇌물을 줬다. 교회의 재원으로 평화를 산 것이다. 침략군에게 잡혀간 포로들의 몸값을 내고 데려오는 것도 그레고리오가 이끄는 교회가 할 일이었다.임기 내내 그레고리오는 동로마 황제와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와 갈등 관계였다. 황제 입장에서 보면 랑고바르드·고트족 같은 게르만 민족은 패퇴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교황 입장에서는 개종 대상이었다. 그레고리오에게는 가톨릭 교회의 미래에 로마인뿐만 아니라 이들 게르만족도 포함될 것이라는 혜안이 있었다. 교황은 수도회·성당을 통해 이들에게도 로마 문화를 전수했다. 한편 콘스탄티노플 총대 주교는 동방에서 로마 교황과 대등한 수위권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그레고리오는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을 자처하며 맞섰다.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교황의 타이틀이다.생존 다음에는 팽창이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의 주요 업적으로 선교가 빠질 수 없다. 그는 영국·네덜란드·독일에 선교사를 보내 북부 유럽이 가톨릭 영역에 포함되게 하는 기틀을 마련했다. 교황이 되기 전에 자신이 직접 잉글랜드로 가려고 로마를 떠난 적이 있다. 그가 떠난다는 이야기가 민중의 귀에 들어가자 민중은 맹렬히 반대했다. 분노에 가까운 반대였다. 그레고리오는 떠난 지 3일만에 로마로 다시 붙들려왔다. 교황이 된 그는 596년께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출생 연대 불명~605년)와 40명의 수도사를 영국으로 파견했다. 그레고리오는 ‘영국의 사도’라 불린다.그레고리오는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다. (그가 원래는 영국으로 가기를 꺼렸다는 설도 있다. 로마로 되돌아갈 생각도 했다.) 오늘날의 제105대 캔터베리 대주교 저스틴 포털웰비는 성공회 소속이지만 그의 선배의 선배들의 선배들을 찾아 1400년을 올라가면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나온다.하지만 영국의 개종은 보다 장기적이고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기적 같이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또 베이징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한 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시 영국 사람들 또한 스스로 선교사를 로마 교회에 요청했다고 전한다.
성직자들의 부패와 복지부동과 싸우다당시 서부 유럽의 종교 지도를 살펴보면 네 종류의 신앙인이 있었다. 가톨릭 교회 소속의 그리스도교인, 특히 게르만족이 많이 포함된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인, 유대인, 그리고 ‘아브라함의 종교’와 전혀 무관한 이교도였다. 그레고리오는 아리우스파 같은 ‘이단’과 유대인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었다. 특히 유대인들을 탄압하지 않았으며 강제로 개종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교화·설득을 통한 개종을 유도했다. 이교도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했다.두말하면 잔소리다. 외치(外治)가 잘 되려면 우선 내치(內治)가 잘 되야 한다. 교회를 중앙집권화하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오는 성직자들의 부패와 복지부동과 싸웠다. 무자격자 성직자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독신제도 강화했다. 시리치오 교황(재위 384~399) 때 이미 주교·사제·부제의 독신이 의무 사항이 됐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 독신제는 ‘교리’가 아니라 규율이다.)그레고리오는 전례(典禮) 개혁을 단행했다. 전례는 “교회가 단체로 하느님과 그리스도, 또는 성인, 복자들에게 하는 공식적인 경배 행위”다. 전례 개혁은 우선 전례서(典禮書), 즉 “전례에 대하여 교황이 공인한 책”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레고리오는 미사에서 읽을 성경 구절을 결정했고 일부 기도문은 직접 집필했다. 그가 확정한 전례서는 1300여 년 동안 사용됐다.그레고리오는 암브로시우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 예로니모와 더불어 ‘4대 라틴 교부(敎父)’ 중 한 명이다. 여기서 교부란 “고대 교회에서 교의와 교회의 발달에 큰 공헌을 한, 종교상의 훌륭한 스승과 저술가들을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그레고리오는 독창적인 철학자나 이론가는 아니었다. 그는 주로 신앙 생활의 실용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그가 한 일은 교부들의 신앙을 한 권의 교과서처럼 정리한 것이다. 그의 저작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욥기 주해』다. 578년에 착수 595년에 완성했다. 강론 60편과 14권으로 편찬된 854개의 편지가 남아 있다. 주교의 의무와 자질에 대해 다룬 『사목지침서』 (591년께)도 남겼다. 이 책에서 주교들에게 “영혼의 의사”가 될 것을 요구했다. 이 책은 또 모든 사람은 유일하며 저마다 신으로부터 각기 다른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레고리오 성가와 그레고리오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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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오 대교황의 말 중에서 음미할만한 몇 가지 명상의 최고 경지에 이르려면 행동이라는 발걸음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성경이란 흐르는 물과 같다. 코끼리가 헤엄칠 수 있고 양은 그 속에서 빠지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물이다. 여러분의 겸손함이 나약함이 되거나 여러분의 권위 행사가 가혹함이 되지 않게 행동하라. 우리는 개념을 우상화하지만 지혜는 경외감에서 탄생한다. 우주는 정직한 한 사람의 투표를 살 만큼 부자가 아니다. 자신의 재산과 헤어지는 것은 어쩌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자신과 헤어지는 것은 틀림없이 가장 어렵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경이로움이 사라질 것이다. 신앙을 이성이 증명할 수 있다면 가치가 사라질 것이다.
김환영 - 중앙일보 심의실장 겸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