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인 박웅현 TBWA CCO는 저녁 8시가 되면 전화기를 꺼 놓는다. 직업이 광고인인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날 것 같지만 중요한 PT외엔 낯선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다고 했다.
디지털 시대가 젊은 후배들이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빼앗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무엇보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 지금 행복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니 지금 행복해야 한다.” |
|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이 내려다 보이는 박웅현 TBWA CCO(Chief Creative Officer)의 집무실. 송길영 부사장과 기자, 사진작가 등 6명이 들어서니 집무실이 비좁았다. 그 흔한 회의용 테이블이나 의자도 없었다. “회의를 오래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서서 핵심만 이야기하고 싶어 (테이블과 의자를) 갖추지 않았죠.” 대신 캠핑용 의자로 쓰면 좋을 법한 의자 두 개가 놓여있었다. 박 CCO 책상엔 유발하라리의『사피엔스』가 놓여있었다. “『사피엔스』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좋은 책이죠. 잘 읽히고.. 발칙한 생각이 좋았어요.” 책과 관련해 몇 마디를 주고받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았다. 고려대 후배 송 부사장은 같은 학교 출신인 박웅현 CCO를 ‘선배님’이라 불렀다.
송길영(이하 송 ): 지난해 고려대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축사하신 걸 들었다.
박웅현(이하 박 ): 내 대학생활을 돌이켜 보니 공부가 재미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이제 학교 들어왔으니 쉬자는 생각을 경계했으면 하는 바램. 또 친구들인데 경쟁자로 삼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야기했다.
송: 2015년엔 내가 입학식 축사를 했기에 더욱 느낌이 달랐다. 최근 의대 재학생들에게 한 강연에서 학생들에게 ‘엄마로부터 벗어나라’고 이 야기했다. 그랬더니 한 남학생이 손을 들 고는 ‘어떻게 벗어날 수 있냐?’고 묻더라.
박: 그렇다. 아이들이 엄마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놓아주질 않는다. 원래 사람을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날개를 달아주는 것이고 잃는 방법은 손에 꼭 쥐는 것인데.
송: 자주는 아니라도 이따금씩 강연을 하시는 것 같다.
박: 이달 25일 세종사이버대학 졸업식에서도 강연이 예정돼 있다. 제목은 ‘찔레꽃에 대한 예의’다. 소리꾼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이기도 한데. 사람들은 장미만 꽃이라고 한다. 찔레꽃이나 안개꽃도 꽃이고 나름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각자의 개성을 찾아내라는 메시지를 전할 생각이다.
장미만 꽃이냐 찔레꽃도 꽃이다!
▎지식은 바깥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우러나온다. 나를 들여다 볼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 일상은 시간이 너무 없다. |
|
‘망치’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진행하고 있다. 타인의 다른 점을 인정해주는 게 이 사회가 해 야할 일이다. 창의성은 내가 잘 하는 일로 이루는 것이지 결코 남이 하는 걸 잘 따라는 게 아니다.(‘망치’는 박웅현 CCO를 비롯한 TBWA의 크리에이터 집단의 멘토링을 거친 대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스피치 하는 창의력 발굴 프로젝트다.)
송: 존재의 의미를 말씀하신 것 같다. 다름과 패자를 배려하는 사회가 돼야 한다는.
박: 실패하면 회복 불가능한 시대로 가고 있다. 그러니 안정적인 직업, 평생 연금이 나오는 직업을 찾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인생에서 피가 끓는 순간을 놓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청춘의 아름다움은 피가 끓고 펑펑 울고 실패도 경험하는 것이다. 기존 인력이 빠지지 않고선 신입사원을 뽑기 힘든 회사가 많다. 좋은 친구들이 많은데 뽑지 못하니 마음이 안 좋다. 하지만 3년~5년 후에 보면 어찌어찌 해서 살아남아 자기 길을 가고 있더라. 그런 친구들 보면 참 예쁘다. 장사익 선생님의 노래 ‘찔레꽃’이 생각난다.한편으론 후배들에 아쉬움도 있다. 체격은 과거 우리 세대에 비해 좋아졌는데 생각하는 체력은 떨어진 것 같다. 그들의 머릿속 풍경이 별로다. 스펙 좋은 친구라도 한달 동안 툭툭 찔러보면 퍽퍽 들어간다. 보이는 모습에 치중하다 보니 내부에 단단한 근육이 없는 탓이다. 사회 생활은 잠깐의 장기 자랑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송: 다음소프트에선 3개월 정도 인턴십을 하면 그들의 생각과 자질이 어느 정도인지 보이더라. TBWA는 어떤가?
박: 주니어보드 프로그램으로 ‘망치’란 게 있다. 서너 달 동안 정기적으로 만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는 이야기를 한다. 마치 용광로 같다. 발표도 시키는데 후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듣기 아깝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신뢰가 쌓이려면 축적의 시간이 필요송: 가끔 내게 ‘나도 강연자가 되고 싶다’고 문의하는 친구들이 있다. 하지만 그런 직업은 없다고 이야기해 준다. 선배님은 광고인으로 우뚝 섰으니 신뢰가 쌓인 덕분에 신뢰한다. 결국 신뢰는 축적의 시간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 같다.
박: 축적도 필요하다. 난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을 잘 들여다 보면 소설이 나온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이야기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송: 이상은 발명이 아닌 발견이라고 했다. 밖이 아닌 나를 들여다 보란 말에 공감한다.
박: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빼앗는다. 아리아나 허핑턴은 ‘자신과 연결된 것들을 끊어라’고 했다. 참 좋은 말이다. 지식은 바깥에서 들어오지만 지혜는 안에서 우러나온다. 나만이 가질 수 있는 무언가 나와야 한다. 그러려면 나를 들여다 볼 시간이 필요한데 우리 일상은 시간이 너무 없다.
송: 자끄 라깡이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는데 한 사람의 일상에 타인이 너무 많다.
박: 너무 표피적이다. 인스타그램엔 온통 ‘행복해 보이는 장면’만 올린다. 정작 자신이 행복한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나는 보여준다. 고로 존재한다’가 됐다.
송: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 선배님은 커뮤니케이션 일을 오래 하셨으니. ‘미화시키는 것이냐 전달이냐’ 등 광고업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우리를 포장해 주세요’라는 요구를 받다보면 자괴감은 없나?
박: 망치가 그 예다. 장점과 단점을 가진 친구가 온다. 다들 단점을 보고 그 친구가 가진 장점을 못 보는 경우가 많다. 완벽할 순 없다. 기업체도 마찬가지다. 거짓말하는 광고는 없다. 안 한다. 진실의 한 측면. 조망되지 않은 측면을 이야기해 준다. 고객사 SK텔레콤의 ‘사람을 향한다’는 광고의 경우 모든 기업이 사람을 향하는데 어떤 기업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일 뿐이다. 광고는 포장이 아닌 발견의 과정이라고 본다. 아니면 의미 부여의 역할. 이른 아침 힘들게 일하는 야구르트 아주머니를 ‘사람들에게 건강한 습관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송: 바깥을 향한 이야기지만 출발점은 내부에서 먼저 공감하고 각성해야 하는 일을 하고 계신 것 같다.
박: 대림 e편한세상의 ‘진심이 짓는다’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외부에 이야기하기 위해 일을 하지만 내부에 대한 메시지가 되더라. 구성원들이 ‘정말 우리가 진심을 다하고 있는 걸까?’라고 묻고. ‘사람을 향한다’는 카피를 쓰고는 ‘우리가 정말 사람을 향하고 있는 일을 하는 거야?’라고 되묻더라.
송: 기업 입장에선 철학이 있어야 성사되는 일인 것 같다.
박: 어떤 기업이든 철학은 있다. 문제는 너무 명문화 돼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사업 보국을 실천하고’처럼 말이다. 너무 뻔하다. 사람의 피는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끓는다. 우리 업이 이런 철학을 문학화 하는 것이다. 기업을 바꾸는 방법은 구성원을 바꿔야 한다. 그게 어려우니 구성원의 마음을 바꿔야 한다.
송: 선배님이 이야기하신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 흥미로왔다. 내 경우 다른 욕망보다도 이제는 진리와 진실에 대한 욕망이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젊은층에겐 먼 이야기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어떻게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박: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된다. 물신은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 안 된다. 그게 다가 아니고 점점 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하면 된다.
송: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공부와 깨달음의 즐거움을 알려주려면?
박: 한 번 소름이 돋아보는 게 중요하다. 경험하면 달라진다. 그걸 경험한 사람은 그 짜릿함을 잊지 않고 유지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 사람이 설득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게 책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책을 추천하는 건 위험하다.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도록 그 사람의 입장에서 재미있을 만한 책을 추천해야 한다.
송: 마침 오늘 책을 한 권 가져왔는데 그런 생각을 못했다.
박: 부사장이 추천하는 책이니 흥미롭다.
송: 『원더랜드』란 책이다. 진지하지 않은 흥미로 인간사가 변했다는 내용이다. 『사피엔스』와 마찬가지로 발칙함이 있다. 한가지 공부를 오래 한 사람들도 카르텔을 의식해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밝히는걸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두 책의 저자는 그런 두려움 없이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한다.
박: 동질문화라서 그런가? 내가 예전에 쓴 칼럼이 ‘여자는 여자답게 걸어야 하는가?’이다. 우리나라엔 20대, 30대, 40대가 들어가 살아야 하는 상자가 따로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이다. 상자 밖의 삶은 주변에서 걱정을 하는 것 같다.
송: 난 그 상자를 ‘정답’이라고 표현한다. 정답이 아니라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우뚝 설 확률이 높아진다. 누군가의 (자취를) 따라가는 순간 일가를 이룰 확률은 떨어진다.
박: 동의한다. 존 레논은 ‘즐기면서 낭비하는 시간은 낭비되는 게 아니다’고 이야기했다. 얼마 전 장사익 선생님을 만났다. 그분 역시 노래가 좋아서 했다. 자동차 세차장부터 시작해 직업이 열 가지가 넘었다고 하더라. 그 와중에 시간이 나면 태평소를 부르러 다녔다는 거다. 왜 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좋았다. 힘든 생활을 위로하면서 좋아하는 걸 놓지 않았다”고 하더라. 한 사람의 성공을 이야기 하면서 ‘너도 그렇게’라고 말하는 건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참고했으면 좋겠다.
남의 말을 잘 듣는게 힘이다송: 좋아하는 것 못지않게 자질도 중요한 것 같다. 변화가 빠른 광고업에선 누가 남고 누가 없어졌나.
박: 생각의 기초체력이 있는 사람. 자신을 성찰해 본 사람. 타인과의 대화에서 가치와 본질을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 남는다. 입사가 지상목표인 사람은 3년 이면 나가떨어진다. 뭐가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나에게 능력이 없음을 걱정해라’는 말이 있다. 딸에게 자주하는 말이다. 내 생각과 실력을 고민해야 한다. 기회는 분명히 온다.
송: 젊은 후배들 말고 기업인들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박: 듣는힘.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건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인 것 같다. 나이가 어린 사람, 나보다 약한 사람들의 말을 듣는 건 ‘힘’이다.
송: 사업적으로도 성공한 분들은 잘 듣는 분들이더라. 어디서 기회가 올지 모르니 듣는다고 한다.
박: 마찬가지로 진짜 성공은 괜찮은 인격이 되는 것이다. 재산이 10억에서 30억이 된 게 성공이 아니다. 10년 전엔 날카로왔던 사람이 지금은 잘 듣고 이해해주는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 달라이 라마가 호텔에 묵으면 호텔리어 대부분이 달라이 라마 팬이 된다고 한다. 넬슨 만델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공통점은 만나는 어디서든 누구든 주변 사람에게 집중하고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 사람들에 큰 반향을 일으킨 것도 결국 권위를 내세워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은 덕분이다.
송: 셔츠에 새긴 ‘일상이 성사다’는 어떤 의미인가?
박: 지금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대단한 일이 따로 있나. 지금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지금 순간이 행복해야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이유다.- 대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정리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