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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과 열정] 서정선 한국바이오협회 회장 & 박한수 지놈앤컴퍼니 최고기술경영자 

학문적 전우애로 22년의 시간을 잇다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서정선 한국바이오협회 회장은 1997년 유전체 분석 서비스 기업 마크로젠을 설립, 국내 바이오 벤처 1호 상장 기록을 세웠다. 창업 후 20년간 ‘한국인 표준 유전체 지도’를 완성하는 등 굵직굵직한 성과 뒤엔 그의 동지가 있었다. 20여 년 전 제자로 만난 박한수 지놈앤컴퍼니 최고기술경영자(CTO)다.

▎서정선 한국바이오협회 회장(왼쪽)이 세운 마크로젠이 인간 유전체 지도를 그린다면, 박한수 지놈앤컴퍼니 CTO(오른쪽)는 미생물의 유전정보를 연구해 신약을 개발한다.
“교수님. 마크로젠에 합류하고 싶습니다.”
-박한수 지놈앤컴퍼니 최고기술경영자(CTO)

“당장 회사 일에 뛰어들기보다 학업을 더 이어가게. 하버드대 박사후과정에서 더 큰 걸 배우고 합류해도 늦지 않아.”
-서정선 한국바이오협회 회장

1999년 서울대 의대 연구실 한켠에서 한 스승이 제자의 고민을 들어주고 있었다. 마크로젠(Macrogen)이 회사라는 걸 알 수 있는 건 연구실 구석 벽에 붙어 있는 현판이 전부인 시절이었다. 서정선(66) 한국바이오협회 회장은 그 길로 한국의 바이오벤처 1세대로 가는 길을 묵묵히 걸었고, 박한수(44) 지놈앤컴퍼니(Genome & Company) 최고기술경영자(이하 소장)는 8년이란 세월의 유학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서 회장이 세운 마크로젠은 세계 153개국 1만8000여 개 연구기관을 주 고객으로 하는 한국 대표 유전공학 기업이 됐고, 박 소장도 2세대 바이오벤처 창업 대열에 뛰어들었다. 대학 스승과 제자에서 업계 선후배로 만난 것이다. 마크로젠이 인간의 유전체 지도를 그리는 역할을 맡는다면 지놈앤컴퍼니는 인간의 몸속에 공존하고 있는 미생물의 유전정보 전체를 일컫는 마이크로바이옴(microbiome)을 연구하고 관련 신약을 개발하는 회사다. 유전체 분석의 대상은 다르지만, 미래 헬스케어 산업의 핵심인 정밀의료를 지향한다는 점에선 궤를 같이한다.

같은 길을 걸어도 이 둘을 사이엔 22년이란 시차가 존재한다. 두 사람은 서울대 의대 동문인데, 서 회장은 1976년에, 박 소장은 1998년에 졸업했다. 우정이라고 엮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서 회장이 ‘우정과 열정’을 논할 사람으로 박 소장을 꼽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학문적 동지, 아니 전우애 같은 느낌이죠.”

우정이란 단어를 꺼내자 서 회장은 박 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으레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면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를 생각한다”며 “그만큼 의대를 나와 기초의학을 전공하겠다는 사람이 드물어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겉으론 걱정은 해줬지만 내심 정말 반가웠다”고 고백했다.

기초의학을 연구하는 길은 그만큼 고되다. 눈에 띄는 보상 없이 연구에 몰두해야 하고, 그 과정도 수년이 걸리는 게 예사다. 연구비 따내기도 쉽지 않다. 세계적인 과학 학술지 네이처지에 논문 한 편이라도 게재하려면 전 세계 바이오 학계를 상대로 경쟁해야 한다. 특히 생명공학 분야라면 학문적 수월성에서 세계 유수대학·기업 산하 연구진을 압도해야 한다.

그래서일까. 서 회장은 연구에 있서 완벽주의자였다. 언제나 스승으로서 박 소장에게 연구의 가치를 재차 강조했고, 목표치도 100%가 아닌 120%를 요구했다. 박 소장도 유학 가기 전 연구실 생활을 떠올렸다.

“교수님은 100번의 실험을 거친 결과에도 만족하지 못하셨죠.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라는 생각이 수없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연구 과정은 점점 더 혹독해졌습니다. 우리가 하는 분야는 ‘전쟁터’나 다름없다고 늘 강조하셨죠.”

실제 서 회장은 창업 후 20년간 마크로젠을 중견기업으로 일구면서 네이처지에 논문을 꾸준히 실었다. 평생 생명과학 분야에 종사해도 논문 한 편 내기가 쉽지 않지만, 그가 게재한 논문 수만 12편에 달한다. 박 소장도 네이처지에 논문을 냈다. 서 회장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스승의 학구적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셈이다.

20년 학문적 동지애로 쌓은 열정


▎“유전공학은 장사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기술적 진보 그 자체죠.” 서 회장의 말이다. 두 사람의 신념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서 회장은 2017년 서울대 의대 유전체의학연구소 소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했지만, 연구 열정만은 47년 전 처음 교수직을 맡았던 때 그대로다. 박 소장도 지놈앤커퍼니를 꾸려가는 데 전력투구한다면서도 광주과학기술원(GIST) 의생명공학과 교수로서 연구팀에 쏟는 학구적 열정도 못지않았다. 이렇게 그들은 학자와 기업가, 두 역할의 균형을 잡으며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학문적 동지애로 쌓은 열정은 과학계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토대가 된다. 이른바 ‘아시안 게놈 로드’ 프로젝트다. 2009년 7월 서 회장은 교수로 다시 한번 네이처지에 등판한다. 30대 한국인 남성의 게놈 전체를 해독한 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이를 위해 서 회장은 2003년부터 몽골을 제집 드나들 듯 했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박 소장도 잠시 공부를 중단하면서까지 뛰어들었다. 한국인 유전체 분석의 진일보한 발전을 위해선 몽골의 고립 부족 유전체 분석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일종의 ‘뿌리 찾기’다.

물론 몽골 연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현지인과도 동떨어져 생활하는 고립 부족을 설득하기 쉽지 않았고, 당장 몽골에 간 연구원들의 기본적인 생활도 제대로 이뤄질 리 없었다. 서 회장은 “일 년에 강수량이 600㎜가 채 되지 않아 연구원들 먹을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다”며 “몽골 정부 관계자의 협조가 절실했기에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기 1년 전인 2002년부터 현지 관청 문턱이 닳도록 오갔다”고 말했다.

서 회장이 회사 일로 자리를 비울 때면 총책임자 역할은 어김없이 박 소장 몫이었다. 그는 “1년에 6개월은 몽골에서 살았다”며 “미신을 믿는 고립 부족이라 주삿 바늘 하나 몸에 닿는 것을 꺼렸다. 특히 연구팀이 무슨 일을 하는지 설득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2년을 예상했던 연구기간은 7년으로 늘어났지만, 한국인 DNA의 특성이 명확해졌고, 아시아인용 맞춤 의약의 토대도 마련했다. 실제 서 회장이 발표한 논문 이후 다국적 제약사들의 아시아 임상시험을 크게 늘렸다. 그 덕분에 아스트라제네카는 1996년 개발한 폐암 치료제 ‘이레사’가 서양인보다 아시아인에게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노바티스는 고혈압 치료제 ‘디오반’으로 아시아인 대상 임상시험에서 뇌졸중 예방효과를 입증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유전분석학의 틀과 기교는 물론이고, 때로는 기업가로서의 태도와 철학까지도 닮아갔다. 1997년서 회장이 낡은 가죽 가방을 들고 엔젤투자(자금이 부족한 신생 벤처기업에 자본을 투자) 유치에 나설 때도 그의 곁엔 항상 박 소장이 있었다. 당시 박 소장은 “엔젤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쏘나타3에 몸을 싣고, 서울 방방곡곡을 누비며 투자유치 경쟁에서 스타트업이었던 네이버에 밀리지 않으려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02년 네이처지에 조그만 광고가 실린다.

“Just send $5.”(5달러만 보내세요)

마크로젠이 유전자 분석 서비스를 단돈 5달러에 제공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20달러대였던 서비스 비용의 4분의 1을 제시해 전 세계 유전자 연구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약을 개발하는 제약사에서부터 곤충학자, 식물학자까지 유전자를 연구하는 곳 모두가 마크로젠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국제 특송 우편으로 유전자 정보 분석을 의뢰했다.

서 회장은 이 과정에서 얻은 각종 유전체 관련 데이터를 국제 암 협회와 거리낌없이 공유한다. 전 세계 생명공학 석학과도 공동 연구에 나선다. 언제든 관련 연구를 하는 벤처기업의 요청이 있으면 연구결과를 공유한다. 서 회장의 철학은 분명했다.

“유전공학은 장사가 아닙니다. 인류 역사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기술적 진보 그 자체죠. 단순히 주식 시장에서 말하는 ‘바이오 테마’가 아닙니다. 이 시장과 산업을 독식할 생각도 없습니다. 관련 연구개발에 뜻을 같이할 생태계가 필요합니다.”

박 소장이 주축이 돼 창업한 지놈앤컴퍼니도 이런 서 회장식 생태계 철학의 산물이다. 지놈앤컴퍼니도 당장은 돈이 되진 않지만, 인간에게 필요한 미생물의 유전체 정보를 분석하고 결과를 공유한다.

물론 최근 두 사람의 발걸음은 조금 다르다. 박 소장은 미생물을 활용한 연구를 강화해 각종 항암 면역치료제 개발에 전력 질주 중이다. 그의 설명이다.

“올해 미국 FDA에 임상실험 허가를 신청할 정도로 상당한 성과를 냈습니다.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마크로젠이 미국 존스홉킨스와 뇌 관련 연구를 진행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걸 보고 신약개발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었죠.”

앞을 향해 질주하는 제자를 격려하며 서 회장은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나섰다. 2017년 서 회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공우생명정보재단에서 100만원이 훌쩍 넘는 브라카 유전자 검사를 1000명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유방 절제술을 받은 할리우드 스타 앤젤리나 졸리가 받아 유명세를 치른 검사법이기도 하다. 그는 “세계적으로 유방암 관련 유전자 데이터를 확보해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연구해 논문으로 발표할 예정”이라고 포부도 밝혔다.

서정선 회장은 박한수 소장에게 당부하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유전체학이란 풍문을 확인하려고 이 분야에 발을 들인 게 벌써 48년째입니다. 긴 세월 버틴 힘은 주류가 건전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또 다른 퍼스트무버(선구자)가 될 힘도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 김영문 기자 ymk0806@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1803호 (201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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