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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대한민국 셀러브리티(5)] 셀럽의 ‘선한 영향력’ 

파워 셀럽은 ‘개념 셀럽’이어야 한다 

조지선 연세대 인간행동연구소 전문연구원(심리학 박사)
대중에 미치는 셀럽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알게 모르게 구매행위를 조정하며 병원에서 어떤 검사를 받을지 결정할 때 친구처럼 조언하고, 심지어 대통령을 선택하는 데도 개입한다.

▎테니스 국가대표 정현은 지난 1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호주오픈 단식에서 4강에 진출했다. 한국 팬들은 그에게서 ‘승리의 대리 경험’을 선물 받았다.
“자신만만한 그에게… 억눌렸던 청춘들이 열광했다.”

테니스 선수 정현이 호주오픈 4강에 진출한 직후 한 일간지에 실린 기사다. “취업난에 좌절했던 청춘들이 정현을 보면서 긍정에너지를 분출하고 있다.” “박찬호나 박세리 같은 스타를 왜 ‘국민영웅’이라고 불렀는지 알 거 같아요. 서양선수들을 상대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자신감이 생겨요.” 독자들의 반응이다.

쿨한 요즘 세상, 일부 네티즌은 ‘국뽕’이라며 질색하지만 대한민국 스물한 살 청년의 깜짝 승리에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한국 축구가 홍명보의 승부차기 결정골로 월드컵 4강에 진출했을 때, 김연아가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마지막 점프를 완벽하게 마무리한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겼다!” 승리감이 뜨겁게 올라왔다. 정신 차리고 보면 흥분할 이유가 없다. 그들의 승리일 뿐 내 인생은 새끼손가락의 점 하나만큼도 달라지지 않으니까. 그런데 누적된 경험을 들여다보면 스포츠 스타의 승리가 그저 남의 일로 냉정하게 분리된 적이 있나 싶다.

스타들이 주는 ‘승리의 대리 경험’

정현이 국민에게 선물한 것은 현실에서 개인적 성취로 맛볼 수 없었던 승리감, 더 정확히 ‘승리의 대리 경험’이다. 그 심리학적 실체를 심리학자 로버트 치알디니는 ‘반사된 영광 누리기(Basking in Reflected Glory)’로 설명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나와 연관된 누군가의 영광은 곧 나의 영광이고 그 순간 내 자존감이 상승한다. 멜버른의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 울리는 한국어 승리 소감을 듣는 순간 정현은 더는 낯선 이가 아니다. 그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로 전환되고 그날은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인 듯싶다.

“다 갖추고도 자신감이 없어 늘 초조했던 내게 그의 플레이가 경종을 울렸다.” “어디서나 기죽지 않는 당당함을 되찾고 싶다.” 이런 청춘들의 반응에서 스포츠 스타가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 정체를 드러낸다. 삶의 의욕과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승리의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이다. 정현이 승리하는 순간 경기를 지켜보는 국민의 테스토스테론도 함께 올라간다. 심리학자 폴 베른하트의 연구를 보면 승리한 팀을 응원한 팬들의 테스토스테론 수준은 경기 전보다 높아진 반면 패배한 팀을 응원한 팬들의 호르몬 수준은 낮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타가 승리할 때, 나도 승리할 동력을 얻는다. 이것이 스포츠 셀러브리티의 힘이다.

셀럽의 영향은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광범위하게 녹아 있는데 그중 대표를 꼽으라면 소비다. 인터넷, TV, 신문, 잡지 등 눈을 어디에 두든 셀럽 중 누군가는 항상 뭔가를 팔고 있다. 이게 꼴 보기 싫다면 세상과 단절해야 한다. 글로벌 시장분석업체 밀워드브라운의 보고서에 따르면 셀럽이 등장하는 광고의 비율은 2000년대 초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최근 줄어드는 추세지만 한국, 중국, 일본에서는 40%를 차지할 만큼 압도적이다. 동네 허름한 식당까지 깊숙이 진출한 셀럽 마케팅을 보면 스타와 소비 사이에 형성된 연결고리가 얼마나 견고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나도 셀럽 사인을 걸어야 하나?” 식당을 운영하는 사장이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것이다.

100년 가까이 지속된 셀럽 광고의 메커니즘은 단순하다. ‘자극 간의 연합’이다.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 형성에서 중성자극인 종소리를 무조건자극인 맛있는 음식과 함께 반복적으로 개에게 제공하면 조건화가 일어나고 나중엔 종소리만 들어도 개는 침을 흘리게 된다. 광고전문가로 변신한 초기 행동주의학자 존 왓슨은 연합학습을 이용한 광고로 교수 시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맥스웰 커피를 마시면 꿈이 펼쳐집니다.” 1920년대 맥스웰 커피 광고의 핵심은 커피와 상류사회 이미지의 연합이다.

이 연합은 광고 밖 세상에서 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한다. 걸그룹의 출근 패션, 유명 래퍼가 사는 아파트, 배우의 자녀가 다니는 사립초등학교.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집에 살며 아이를 어느 학교에 보낼지, 사소한 선택부터 비중 있는 결정까지 셀럽의 영향은 광고에서 때로는 뻔뻔하게, 때로는 은밀하게 힘을 발휘한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엄중한 선택은 어떨까? 졸리 이펙트(Jolie Effect)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2013년 배우 앤젤리나 졸리는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전했다. “저는 BRCA1 변형유전자를 물려받았어요.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87%랍니다. 고민 끝에 예방적 유방절제술을 받았습니다.” 과잉대응이냐, 현명한 조치냐를 두고 논란인 가운데 한 연구팀이 영국 전역의 30개 암센터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그녀의 고백 직후 유방암 관련 검사 의뢰 건은 1981건에서 4847건으로 2.5배 증가했고, BRCA1 관련 검사를 요구하고 유방절제술을 문의하는 여성들도 두 배로 늘었다.

가장 크게 마음이 흔들린 집단은 아마 유방암 가족력이 있는 여성들 아닐까?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학자 카미코센코가 발견한 더 강력한 변인은 정서적 연결이었다. 가족력이 없어도 졸리를 마치 자매나 친구처럼 여기는 여성들은 가족력이 있으나 졸리와 유대감이 없는 여성들보다 검사에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내친 김에 이번엔 오프라 이펙트(Oprah Effect)로 가보자. 대통령이 되려면 메가 셀러브리티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 결정적일까?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2008년 미 대선에서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경제학자 가스웨이트와 무어는 윈프리의 지지로 오바마가 대선에서 약 백만 표를 더 확보한 것으로 결론 내렸다. 박빙의 선거였던 점을 고려할 때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자기다운 개념’ 장착한 셀럽 기대


▎방탄소년단 랩 몬스터는 유럽여행에서 착용한 가방 덕분에 ‘개념돌’로 평가받았다. 사회적기업 모어댄이 자동차 폐차 과정에서 수거한 가죽을 활용해 만든 제품으로 알려졌다.
“애들이나 좋아하지. 연예인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성인들은 셀럽에게 받는 영향을 과소평가한다. 심리학자 수전 분의 연구에 따르면 청소년들조차 셀럽의 영향을 부인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도덕관과 직업윤리, 개인적 가치까지 셀럽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셀럽은 승전보로 자신감을 선물하기도 하고, 알게 모르게 구매행위를 조정하며 어떤 검사를 받을지 결정할 때 친구처럼 조언하고 심지어 대통령을 선택하는 데도 개입한다.

이 엄청난 영향력이 기분 좋게 발휘된 사례는 방탄소년단의 랩 몬스터가 유럽여행 중 소셜미디어에 올린 사진에서도 보인다. 그가 메고 있는 가방이 자동차 폐차 과정에서 수거한 가죽을 활용해 만든 사회적기업 제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흐뭇한 품절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개념 있는 월드클래스 아이돌이 자기 돈을 주고 가방을 사서 메고 다녔을 뿐이다. 그런데 촘촘히 기획된 공헌활동보다 더 세련되고 강력한 ‘사회적 기여 스토리’가 완성됐다.

좋든 싫든 셀럽에겐 힘이 주어지고 대중은 셀럽의 영향을 받는다. 부담에 눌려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셀럽, 힘을 이용해 이기심만 채우는 셀럽, 파워를 자기만의 선 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셀럽. 그들의 옳은 선택이 절실하다. 파워 셀럽은 ‘개념 셀럽’이어야 한다. ‘개념’은 자신이 가진 사회적 힘의 본질과 규모를 이해하고 사회적 가치의 의미를 아는 능력을 뜻한다. 쉽지 않지만 방탄의 랩 몬스터처럼 하면 된다. ‘자기다운 개념’을 장착하고 가수·배우·선수답게 살면 되는 거다.

유난히 엄격한 한국 사회의 대중이 할 일도 있다. 좀 못마땅해도 기다려주면 어떨까? 너무 무서운 대중에 기가 눌린 셀럽은 좋은 일을 하고 싶어도 눈치를 보게 된다. 개그우먼 이성미에게 얼마 전 이런 말을 들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 참 좋아요. 이 선한 영향력이요.” 그녀의 신념대로 대한민국의 셀렙 파워가 훌륭한 결실을 맺길 대중은 기대한다.

※ 조지선 전문연구원은…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타임워너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연세대에서 사회심리학, 인간행동과 사회적 뇌, 사회와 인간행동을 강의하고 있다.

201804호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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