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양육환경을 조성하고 후계자의 인품을 기르는 것은 가족기업이 지속적으로 번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인성교육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실시해야 한다. 좋은 성품은 부모가 가정에서 보여주는 행동에 따라 학습된다.
▎글로벌 가족기업 연구협력체 STEP의 아시아·태평양지부를 맡고 있는 모하르 유소프 말레이시아 툰압둘라작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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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기업의 승계 문제는 한국 기업만의 고민거리가 아니다. 유럽연합(EU) 산하 유럽가족기업기구(EFB)는 전 세계에서 국가별로 70~95%의 기업이 가족기업이며, 최대 90%의 GDP를 창출하고 일자리 80%를 제공한다고 추산했다. 이 많은 가족기업을 어떻게 건강하게 유지해나갈지는 기업뿐 아니라 각국 정부 및 연구 단체의 주요 과제 중 하나다. 이를 위해 EU는 1997년 EFB를 발족하고 관련 정책을 연구하고 있다.민간 단체도 글로벌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가족기업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구가 ‘성공적인 세대 간 경영실천 프로젝트’(STEP)다. 2005년 미국 뱁슨 칼리지가 유럽 6개 연구기관과 함께 발족한 STEP는 성공적인 가족기업 경영 사례를 연구하고 더 나은 방안을 제시하려는 연구 프로젝트다. 오늘날 북미, 남미, 유럽, 아시아 33개 연구 단체의 공동 프로젝트로 자리매김했다. 일본 와세다대, 홍콩 중문대, 미국 유타대 등이 이 단체의 회원으로 가입돼 있다.포브스코리아는 STEP의 아시아·태평양지부를 총괄하는 모하르 유소프 말레이시아 툰압둘라작대 교수를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그의 아내인 레일라니 모흐드 노드 말레이시아 테일러스경영대 교수도 이 서면 인터뷰에 참여했다. 2008년부터 STEP에서 활동한 유소프와 모흐드 노드는 10년 이상 아시아 가족기업의 승계 문제를 연구해온 승계 전문가다.
전 세계적으로 가업승계의 성공확률은 어느 정도인가.어니스토 포자 선더버드경영대 교수의 2007년 연구에 따르면 전체 가족기업의 70%가 5년 안에 승계에 실패한다. 2세대로 이어진 나머지 30% 기업 가운데 3세대 승계가 이뤄지는 기업은 12%에 불과하며, 그중 오직 4%만 4세대 승계까지 성공한다고 설명했다. 승계에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세대 간 또는 세대 내 갈등이다.
성공하는 가업승계의 특징을 요약해달라.가업승계에 성공하는 선대 경영자는 한 발 앞서 승계를 계획한다. 그러나 다음 세대가 승계를 원할 거라고 예단해선 안 된다. 자녀의 뜻과 경영자 자신의 욕심을 구분해야 한다. 또 승계 과정에서 공정을 기한다는 이유로 사업을 모든 자녀에게 넘겨줘선 안 된다. 그럴 경우 가족 간 불화가 발생할 우려가 있다. 가족 구성원은 기업 규모에 따라 관리직부터 이사, 고문, 가족위원회 위원 등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적합한 능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을 후계자로 선정한다. 후계자 선정을 우연에 맡기면 안 된다. 승계에 앞서 오랜 기간에 걸쳐 가르치고 시험해야 한다. 만약 가족 내에 적합한 사람이 없다면 전문경영인을 데려오거나 아예 사업을 매각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족기업의 승계 과정에 유럽, 미국, 아시아 등 지역별로 차이가 있나.가족기업에 관한 연구와 교육훈련은 아시아보다 서구지역에서 더 오래 이어져왔다. 그러다 보니 미국과 유럽 등 서구 기업이 아시아 기업에 비해 가업승계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일에 익숙하다. 가업승계는 경영전략부터 금융, 인사, 부동산 등 온갖 사업 부문이 얽혀 있을 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의 감정 자산까지도 소요되는 지극히 복잡다단한 과정이다.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이 가족기업이지만 역사가 짧아 이제 2대 또는 3대째 승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이 적지 않게 일어나고 있고, 분쟁이 없더라도 선대의 경영 성과를 내지 못하는 곳이 많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대부분의 기업이 그런 어려움을 겪는다. 대표적인 난관은 선대 경영자가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거나 선대와 후대 사이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다. 이렇게 되면 세대 간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분쟁이 발생한다. 아시아에선 자녀가 승계를 당연한 권리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장남이 그렇다. 자녀 가운데 장남보다 후계자로 더 적합한 인물이 있을 경우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족 간 갈등은 승계를 실패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다.
가족 간 경영권 분쟁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나.가족 내 경영권 분쟁은 가족 구성원 간 의사소통을 강화하고 신뢰를 증진함으로써 예방할 수 있다. 가족 구성원 간 의사소통은 가족 관리체제(governance)로 구조화된다. 가족 관리체제는 가족의 비전, 사명, 가치, 정책을 명시한 가족 헌법과 이를 실행할 가족위원회 같은 가족기구로 구성된다. 다시 말해 가족기업 구성원은 서로의 감정과 관계를 관리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한국 기업 중에는 시스템상에서 경영권 승계 프로세스를 갖춘 곳이 거의 없다. 어떻게 이런 프로세스를 갖출 수 있나.우선 기업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사안이 뭔지 분석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떤 자원을 수집해야 하는지 파악한다. 다음으로 승계에 필요한 인적 자산을 점검한다. 경영승계와 교육훈련의 관점에서 주주, 이사진, 경영진 및 주요 직원들과의 관계를 재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단기, 중기, 장기로 나눠 지속 가능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마지막으로 승계 과정에서 정부나 규제 당국, 기타 협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도 알아본다.
한국의 기업 상속자 중엔 준비가 덜된 채 경영권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후계자 교육은 언제부터 어떤 계획을 갖고 실행해야 하나.한국뿐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기업이 다 그렇다. 가족기업은 승계 계획에서 저마다 다른 어려움을 맞이하기 때문에 한 가지로 정해진 후계자 교육 시기는 없다. 그러나 후계자 교육이 시작돼서 끝나기까지는 적어도 수년이 걸린다. 내가 봤던 성공 사례 중엔 창업주가 승계 15년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3명의 후계자 후보를 시험한 경우가 있다. 후보자들을 회사 내 서로 다른 부서로 보내고 비용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매출은 얼마나 늘렸는지, 어떤 혁신을 보였고 직원 관리는 어떻게 했는지 등을 점검한 것이다.
후계자의 자격이나 조건은 무엇인가.좋은 지도자가 가질 만한 덕목이라면 가족기업의 후계자도 마땅히 가져야 한다. 또 후계자에겐 추가로 청지기 정신(stewardship)이 요구된다. 청지기 정신이란 후계자가 기업과 가족 전체를 잘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뜻한다. 후계자는 가업을 물려받는 것을 자신의 권리가 아니라 책무로 여겨야 한다.
최근 한국에선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갑질논란’으로 후계자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가족기업에서 지도층의 행동은 일반기업보다 기업 브랜드나 이미지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가족기업 구성원의 잘못된 행동이 그 가족과 기업문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일 우려가 있다. 이 같은 오너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선 한 발 앞서 올바른 인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좋은 습관과 덕목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는다. 이 같은 인성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실시돼야 한다. 좋은 성품은 부모가 가정에서 보여주는 행동에 따라 학습되고 내면에 스며든다. 올바른 양육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가족기업이 지속적으로 번성하는 데 필수적이다.
인성이 후계자 선정에 중요한 요소인가.아시아 가족기업을 연구하면서 후대에게 좋은 덕목을 심어주는 것이 선대를 향한 신뢰와 존중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한국에선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방해공작을 하면서까지 승계 전쟁을 벌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인성교육을 통해 자신의 행동과 결정에 책임을 지는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성교육이란 겸손, 의지, 자립심, 인내, 용기 등 유용하거나 좋은 덕목을 기르는 교육을 말한다.
능력이 뛰어나지만 인성이 좋지 않은 사람은 어떤가.후계자의 경영 능력보다 인성이 승계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경영자의 인성이 곧 기업의 가치와 문화를 결정짓고, 이는 후대로 이어지며 선순환 혹은 악순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창업자들은 다음 세대 가족기업 리더의 인성을 교육하고 훈련할 때 자신이 겪었던 양육환경을 참고로 삼는다. 이 같은 교육훈련은 두 세대 가족 구성원 모두가 ‘능력이 좋고 인성이 덜된 사람보다 능력이 좀 부족하더라도 인성이 훌륭한 사람이 낫다’고 생각할 때 성공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인성교육은 어떤 식으로 실시하나.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자녀 세대의 인성교육에 아주 적합한 활동 가운데 하나다. 가족기업에선 기업과 가족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기 때문에 CSR 같은 기업 내 활동도 가정교육의 일환이 된다. 선대 경영자는 자녀가 선행을 실천하고 좋은 덕목을 함양하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 CSR은 가족기업과 구성원 모두가 같은 가치를 공유하도록 도와주는 활동이다.
후계자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 한국 기업인에게 조언한다면.지난 2009년 서울에서 열린 STEP 국제회의에 참석했을 때 2세·3세 경영자들을 만났는데 하나같이 매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후대 경영진은 일을 배우고 주주들과 좋은 관계를 새로 쌓기 위해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선대 경영진도 다음 세대를 교육하는 과정에서 인내심을 갖고 후계자들이 뭘 원하는지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또 후대 경영진에게 자기 방식을 지나치게 밀어붙이지 말고 후계자가 자신만의 성격을 기를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이기준 기자 lee.kij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