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에 시작된 국제비엔날레의 열풍이 이젠 세계적으로 아트페어로 전환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예전에 컬렉터들이 열정과 안목을 가지고 세계 구석구석을 다니며 좋은 전시를 감상하고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는 시대가 다소 ‘슬프게도’ 지나가고, 주요 작가들은 중요한 브랜드와 같이 유명해졌고, 관객들은 좀 더 편하게 한 장소에서 작품을 만나는 아트페어를 찾는 경향이 짙어졌다. 모두가 더욱 많은 정보를 갖게 되고 분주한 삶이 되어가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닌가 한다. 아트부산 2018 특별전에서 만난 박은선 작가의 조각을 소개한다.
▎지난 4월 아트부산 2018 특별전에서 광장에 설치된 박은선 작가의 카라라 대리석 조각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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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국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미술의 국제화에 한몫하고 아주 중요한 미술계의 행사로 자리 잡은 광주비엔날레와 부산비엔날레를 설립했다. 중요한 국제적 담론에 발맞추어 중요한 전시들을 진행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작가들도 중요한 큐레이터 미술관 디렉터와 만나면서 점차 국제화되었다. 또 이러한 환경은 한국 작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더욱 좋은 작가가 나올 수 있는 맥락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러한 단순한 몇 가지 이유만은 아니지만, 한국의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미술관의 쳬계화, 상업 화랑들의 전문화 등으로 이제 많은 한국 작가의 활동을 국제 미술계에서 자주 접할 수 있게 됐다.사실, 필자도 지난 5년간 한국에 들어와 일을 하면서도 2012년에 시작한 아트부산(ART BUSAN) 페어를 이번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서울의 KIAF도 최근 들어 많은 변화를 모색해가지만, 아트부산은 여러 가지 맥락에서 매우 큰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사실 페어가 열리는 곳은 단지 미술시장 이외의 다른 요소들이 필요하다. 부산은 그러 면에서 바다와 음식, 또 최근에 더욱 부상한 휼륭한 호텔들이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었다. 사단 법인이 운영하는 페어와 지역 유지들이 조직위원으로 참여한, 매우 흥미로운 구조의 행사였다. 갤러리 전시들이 열리는 각각의 부스도 매우 세련돼, 함께 만난 외국 지인은 홍콩 바젤의 느낌이 난다고도 했다. 이러한 요소가 약 6만 명이라는 관람객을 유치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사실, 이번 페어는 각 부스들의 예술성이나 작지만 좋은 전시를 만들려는 갤러리들의 여러 가지 노력이 보인다는 점이 매우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에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는 한국 작가인 박은선 작가의 특별전이 주목할 만한 전시였다. 미술관 전시도 아닌 페어에서 대형 대리석 조각 8개를 광장에 설치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결정은 아니다. 작품은 언제나 그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박은선 작가의 설치작품. 2016 피렌체 미켈란젤로광장. / 사진:ⓒ더페이지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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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 먼저 주목받은 조각가
▎2016 피렌체 미켈란젤로광장. / 사진:ⓒ더페이지 갤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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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우리가 조금은 전통적이라고 말하는 석조각을 이렇게 볼 수 있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 현대미술이 매우 다양한 매체 중심과 대형 설치로 변해가는 시점에서, 지난 30년간 이탈리아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온 박은선 작가는 이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가로도 인정받는다. 필자가 3년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북촌에 올라가는 길에 처음 설치했던 작품이 박은선의 조각이었다. 또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 출장을 다니면서 한국 큐레이터라고 하면, 자주 물어보는 한국 작가의 이름이 그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지난 10여 년간 언제나 작품으로만 만나던 작가를 처음으로 대면하는 기회도 매우 의미 있었다.
▎2014 프랑스 라바울(La Baul) 도시야외조각전. / 사진:ⓒ박은선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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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선 작가는 경희대 조소과, 이탈리아 카라라 국립미술원 졸업 후 이탈리아 중서부 해안가 피에트라산타(Pietrasanta)에서 20년 넘게 거주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피에트라산타는 작은 도시지만 카라라산에서 질 좋은 대리석을 구할 수 있기로 유명해 세계 각지에서 뛰어난 조각가와 석공들이 몰려드는 ‘조각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카라라 대리석이 유명한 이유는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 ‘다비드상’이 카라라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 최근에 데미안 허스트의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에서 나온 고대 조각들도 모두 여기서 제작되었다고 한다. 질 좋은 이 대리석은 이미 로마 시대 때부터 예술가들이 알아보았다. 박은선 작가 역시 이탈리아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대리석이라는 재료에 매료되었고, 생활고로 모든 것을 포기하려던 순간에도 작업을 향한 열정은 쉽게 잠재울 수 없었다고 한다.
이탈리아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에 공공미술 전시
▎2014 로마 포리 임페리알리 거리(Museo dei Pori Imperiali)의 트라야누스 시장. / 사진:ⓒ박은선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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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묵묵히 조각가의 길을 걸어온 박은선 작가의 작품을 사람들이 알아보기 시작한 건 1990년대 말이었다. 그의 작품을 수집하겠다고 나타난 수집가가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고, 1997년 피에트라산타시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열게 되면서 비로소 이탈리아 미술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최근 전시 중 매우 놀랄 만한 멋진 전시는 2016년 이탈리아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에 설치한 공공미술 작품이다. 이탈리아에서 이 광장의 의미는 르네상스 이후 가장 중요한 작가들을 소개하는 곳이기도 하다. 특히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으로 둘러싸인 이 역사적인 공간들은 그의 작품에 더욱 새로운 공간성과 시간성을 부여한다고나 할까. 그렇기에, 화이트 큐브의 미술관보다 이러한 역사적 유적이 남아 있는, 역사적 맥락이 많은 곳에 놓인 그의 작품은 더욱 그 시대적 새로움의 조각언어를 더해주는 듯하다. 사실 작가들에게는 이렇게 중요한 유물들이 있는 건축과 작품들 옆에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한다는 것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2015-2017 이탈리아 피사 국제공항 (갈릴레오 갈릴레이 국제공항, G.Galilei Airport) 설치됐던 작품. / 사진:ⓒ박은선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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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르네상스의 본거지인 이탈리아 최고의 마스터 작가들이 다룬 같은 재료로, 그 장소에서 작품을 내보이는 것은 일련의 소리 없는 혁명이기도 하다. 사실, 재료비나 몸으로 해야 하는 작업의 양이 어마어마한 석조각은 이미 이탈리아에서도 많이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전통 미디엄을 통한 현대적 추상조각의 맥락을 계속 추구해가며 작업해왔다. 다른 추상조각을 작업한 많은 작가가 시도한 다양한 재료(나무, 석고, 실, 철 등의 미디엄)가 아닌, 이 카라라 대리석으로 할 수 있는 매우 다양한 실험과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도 그의 특징이다.20세기 초 서양 여성 조각가인 바버라 헵워스는 조각의 재료가 되는 물질 사이를 통과하는 구멍 공간을 만들면서, 추상조각 안에서의 재현되는 공간과 시간성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이러한 미니멀한 추상조각 안에서의 공간은 작품의 균형과 미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박은선 작가의 기둥들은 그러한 면이 더욱 극대화되었다. 사실, 이렇게 무거운 재료인 대리석으로 5~10m에 이르는 작품을 만드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균형과 조각이 위치하는 외부의 다양한 요소에 대한 고려는 거의 과학자와도 같은 수준의 계산과 측량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만들어진, 이 긴장감 있는 조각의 균열들은 그의 미니멀한 조각에 또 다른 보이지 않는 물질성을 가져다준다. 그 공간으로 들어오는 빛, 공기, 소리들이 그 조각을 만드는 중요한 요소들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유럽의 전통의 조각이나 아주 동양의 선적이고 단아한 미니멀한 예술성을 만들어낸 것으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그러한 추상적 표현이 기하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원, 면, 큐브, 기둥 등 기본적인 구조로 나타나기에, 그 어떤 장식적인 조각과 함께 전시되어도 단단하게 설 수 있는 미학적 기준을 만들었다.
▎박은선 작가 / 사진:ⓒ박은선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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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련의 전시는 대부분 이탈리아의 중요한 공공장소에서 열렸다. 이탈리아 피사에 있는 국제공항(갈릴레오 갈릴레이 국제공항), 프랑스 라바울과 스위스 루가노의 도시야외조각전, 룩셈부르크의 ‘La commune de Hesperange’ 공원 등 세계적인 관광명소에서 유례없는 대규모 전시를 하였다.발굴작업이 완성된, 예전 로마제국의 영화를 느낄 수 있는 포로 로마노와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한국 작가인 박은선의 조각은 매우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 이지윤은…20년간 런던에서 거주하며 미술사학박사/미술경영학석사를 취득하고, 국제 현대미술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큐레이터다. 2014년 귀국하여 DDP 개관전 [자하 하디드 360도]을 기획하였고, 3년간 경복궁 옆에 새로 개관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첫 운영부장(Managing Director)을 역임했다. 현재 2003년 런던에서 설립한 현대미술기획사무소 숨 프로젝트 대표로서, 기업 컬렉션 자문 및 아트 엔젤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