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배우 남경주는 운이 좋았다. 뮤지컬에 관심 많은 형님, 교회에서 배운 피아노, 학교에서 체조와 조소를 배운 덕분에 뮤지컬 배우의 자질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그는 “충실한 일상이 일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일이 특별할 뿐 난 여전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했다.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중인 뮤지컬 ‘시카고’의 무대 뒤에서 만난 배우 남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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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 블랙셔츠가 잘 어울린다.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직업을 가져서일까?
남경주: (웃음) 역설적인 말이겠지만 배우는 일상에서 많이 가둬야 무대 위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송길영: 사람들은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남겨둘때 흥미를 느낀다. 하지만 배우는 적게 쌓였어도 많이 보여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지 않나?
남경주: 셔츠에 새긴 ‘절제의 미덕’이 그 대답일 것 같다.
송길영: 그것을 알기까지 시간이 꽤 필요한 것 아닌가?
남경주: 물리적인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송길영: 그 시간 동안 풍파(시련)를 겪기 마련이다. 문제는 풍파에 쓰러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남경주: 후배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누구에게나 풍파는 있으니 버티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고.
송길영: 일을 오래했다.
남경주: 일반적인 시각에선 오래한 셈이다. 84년 ‘포기 앤 베스’로 데뷔했으니 34년째다.
송길영: 당시 한국엔 뮤지컬 시장이 없었는데.
남경주: 어릴 때부터 내가 뮤지컬 배우가 되는 데 환경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들더라.
송길영: 1980년대 정동에서 처음 뮤지컬을 관람했다. 무대는 감동이었지만 무대설비나 음향 수준이 어설퍼서 ‘아직 준비가 덜 됐구나’란 생각을 했다. 당시는 (뮤지컬 배우가 되기에)열악한 환경 아니었나?
남경주: 형님 덕분이다. 형님이 뮤지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늘 집에 뮤지컬 음악이 흘렀다. 가족들이 교회에 다녔는데 형님은 중학교 때 성가대 지휘도 하고 성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했다. 나 역시 연극에 출연하면서 받은 교인들의 박수소리에 기뻤다. 또 교회에서 피아노를 배우면서 음악적 소양을 자연스럽게 갖추게 됐다.
송길영: 뮤지컬 배우로서의 각성을 도와주신 것 같다.
남경주: 적성을 찾을 수 있는 여러 방향을 제시해준 셈이다. 어린 시절 난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문경에서 서울로 전학을 왔는데 사투리가 심했고 구구단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아이들이 놀려서 숨어 지냈다. 그러다 학교 생활에 재미를 갖게 해준 것이 체조부였다. 철봉에 매달리고 뛰어놀다 보니 몸이 만들어졌다. 고등학교에 가선 물감이 묻어 있는 작업복이 멋지게 보여서 미술부에 들었다. 데생을 할 줄 몰라 조소를 배웠다. 흙을 빚어 붙여 생명력을 불어넣는 과정이 재미있었고 미적 감각도 가지게 됐다. 당시 조소를 가르쳐주신 분이 서울 광화문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을 만드신 김영원 선생님(전 홍익대 미대 조소과 교수)이다. 초중고 과정이 뮤지컬 배우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안내했다.
송길영: 말씀하신 내용이 무협지의 스토리 같다. 기골이 장대하지만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이 어느 날 벼랑에 떨어져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는 결정론 같은 내용이다. 이러한 경우는 모든 고난이 현재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됐다는 건데 최근엔 조금 다른 것 같다. 뮤지컬 전문학교에 가거나 오디션을 보고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려 내 목표에 점점 가까이 다가서려는 방식 등의 경우처럼.
남경주: 목표보단 과정이 재밌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송길영: 과정은 남 배우님의 경우처럼 계속해서 우연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건데 너무 어려운 확률 아닌가?
남경주: 지속성에 관한 이야기다. 예술은 뭔가 꾸준히 한다는 그 자체다. 그게 빠지면 특별한 결과물이 있을 수 없다. 체조부에선 매일 운동을 했다. 조소 작업도 꾸준히 하면서 물리적인 시간을 견뎠다.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하면서 버티는 게 중요하다.
송길영: 계속하는 힘. 그건 인내일까? 아니면 좋아하는 걸 찾은 덕분일까?
남경주: 수백 개 도자기를 구워도 한두 개 또는 하나도 남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를 통해 과정의 특별함을 배우게 되는 것처럼 무언가 하고 있으면 몸은 힘들더라도 평온하고 자신감, 희망이 생겨서 좋았다.
송길영: 남 배우님의 경우는 보상 또는 성공을 바라고 시작하지 않았지만 요즘은 성공의 수단으로 배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런 사람들은 과정의 인내를 힘들어하지 않나?
남경주: 과정의 인내가 없더라도 관객, 제작자들이 허용하는 경우가 있다는 게 슬프다. 굳이 그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그럴 겨를도 없는 것 같고….
송길영: 뮤지컬은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현장에서 보여지는 실행의 치열함이 있다. 배우의 입장에선 매일 다른 컨디션일 수 있으니 연습이 더 중요한 것 아닌가?
남경주: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관대하다. ‘아이 뭐, 이 정도 했으면’ 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 탐구, 통찰, 도전 이런 과정이 부족하다. 지금 하고 있는 뮤지컬 ‘시카고’에도 이런 대사가 나온다. “품위가 없어졌다.”
송길영: 배우는 입장에선 여전히 업계는 열악하다.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생각은?
남경주: 소위 뮤지컬 1세대로 불리는 난 금수저의 길을 걸었으니 쉽게 말할 자격은 없는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정규직으로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했으니까. 다만 난 내가 부족하고 모르는 게 창피해서 도서관에 다니며 책을 읽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내일 아침이 기다려졌다. 진짜 좋아하는 걸 찾는 게 우선이다.
송길영: 대학 때 수업 열심히 들었나?
▎사진:S.T.듀퐁클래식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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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경주: 지적 허영심에 책도 열심히 읽었다. 지금도 제자들에게 “지적 허영심으로라도 익숙해질 때까지 습관처럼 책을 읽으라”고 주문한다. 30년 중 20년은 겉멋이었지만 그게 버티는 힘 중에 하나였다.
송길영: 현재 뮤지컬은 과거와 달리 산업화됐다.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남경주: 배우들이 ‘난 어떤 악기가 되어야 하나?’란 고민을 하면 좋겠다. 진성관객이 바라보는 무대의 공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팬덤이 생기면서 준비되지 않은 배우들도 관객들이 허용하기 때문이다. 관객 앞에선 과시가 아닌 자기 컨트롤이 감동이란 걸 알게 되면 좋겠다.
송길영: 일본의 ‘사계’와 같은 극단이 우리나라에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작품의 퀄리티는 유지하면서 학교와 등용문의 역할도 하기에 부럽더라.
남경주: 무엇이 더 오래가는지 아직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 것같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을 아직 우리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송길영: 앞으로 ‘주 52시간 근무’가 시행되면 평일 저녁에도 뮤지컬 관객 수요는 더 늘어날 것 같은데 뮤지컬 업계에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나?
남경주: 양적으로는 지금도 넘친다. 질적인 부분이 약하다. 라이선스 뮤지컬이 들어와서 우리의 눈과 귀가 즐겁지만 엄밀히 따져 그건 우리의 기술은 아니다. 더 잘살게 됐지만 더 재미있어진 건 아니다.
송길영: 영국의 락밴드 프로콜 하럼(Procol Harum)은 1967년 발표한 노래 “A Whiter Shade of Pale”이 유명해져 알려졌고 그 후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 노래를 라이브로 부르고 있다. 한가지 일을 오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멋졌다. 과거의 성량, 기술은 아니더라도 그 사이 축적된 게 필요하단 생각이 들더라. 한 가지 일을 오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멋졌다. 과거의 성량, 기술은 아니더라도 그 사이 축적된 게 필요하단 생각이 들더라.
남경주: 관객은 그 사람의 세월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고 듣고 싶어한다고 믿는다. 안톤 체홉이 “예술은 자기 생각을 반영한다. 생각을 뒷받침하는 건 충실한 생활”이란 말을 했다. 우리는 특별한 일을 할 뿐인 일반적인 사람이다. 이 때문에 밀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일과 생활의 균형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송길영: 업에서 중요한 건 가르침일까, 타고나는 것일까?
남경주: 타고나면 더디 걸린다. 난 일찍 알려진 게 후회된다. 가로막힌 게 많았다. 내가 하는 일이 특별한데 내가 더 특별하다고 착각했다.
송길영: 제작에 관심을 가질 만한데 하지 않는 이유가 있나?
남경주: 자기 자리에서 노력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터뷰를 마치고 두 번의 공연이 있다.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다.- 대담 송길영 다음소프트 부사장 / 진행·정리 유부혁 기자 yoo.boohy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