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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17) 

위초야우 UOB(대화은행) 명예 회장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위초야우 회장은 동남아의 미니국가를 경제 선진국으로 키운 수많은 싱가포르 기업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항상 도전하고 새로운 일에 목말라했던 그의 기업가 정신은 오늘날에도 새롭다.

▎사진:위키피디아
싱가포르 경영인 위초야우(Wee Cho Yaw·黄祖耀·중국 표준어론 황쥐야오·89) UOB(United Overseas Bank, 大華銀行) 명예 회장은 이 나라의 경제발전 역사를 상징하는 아시아 경영인이다. 현재 재산 66억 달러로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의 2018년 ‘세계 부호 명단’ 251위, 싱가포르 50대 부자 명단 6위에 각각 올랐다. 블룸버그 통신은 그의 재산을 88억7000만 달러로 보고 세계 170위에 올려놓았다.

UOB는 싱가포르는 물론 전 세계 19개 나라에 500여개 지점을 두고 영업하는 글로벌 은행이다. 자산 기준으로 싱가포르 3위 은행이다. 2017년 12월 말 기준으로 예금이 2730억 싱가포르달러(미화 약 2040억 달러)에 이르며, 자산은 3590억 싱가포르달러로(미화 약 2680억 달러)에 이른다. 위초야우는 현재 이 은행의 최대 주주이자 명예 회장이다. 그는 이 은행에 60년간 근속하며 작은 로컬 은행을 싱가포르는 물론 동남아 굴지의 글로벌 은행으로 키워놓았다.

UOB는 위 명예 회장의 선친인 위컹창(Wee Kheng Chiang·黃慶昌·중국 표준어론 황칭창, 1890~1978) 회장이 1935년 창업했다. 창업 당시에는 UCB(United Chinese Bank)라는 이름이었다. 위 명예 회장은 1958년 UOB의 전신인 UCB에 입사해 60년간 재직했다.

위초야우 아버지 위컹창, 1935년 UOB 창업

위 명예 회장은 싱가포르에서 공샹 소학교에 이어 남양화교중학(南洋華僑中學)에 다녔다. 당시 중학은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쳐놓은 과정이다. 현재도 운영되는 남양화교중학의 교훈은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베이징 칭화(淸華)대의 교훈과 똑같다. 『주역(周易)』 64궤 중 첫 괘인 ‘건괘(乾卦)’에 나오는 ‘천행건군자이자강불식(天行健君子以自强不息)’, 즉 ‘하늘의 운행이 튼튼한 것처럼 군자는 이를 본받아 스스로 강하고 쉬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 따왔다. ‘일평생 쉬지 않고 자신의 업(또는 학문)을 닦아라’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의 학업은 계속되지 못하고 1942년 갑자기 중단됐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부터 영국 식민지인 싱가포르와 말라야(현재 말레이시아의 말레이반도 지역의 대부분)를 침공하면서다. 이듬해 2월 15일까지 계속된 싱가포르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고 싱가포르와 말라야 식민지는 일본에 함락됐다. 위 명예 회장은 또다시 전쟁을 겪어야 했다.

일본은 환희에 빠졌지만 일본에 점령된 싱가포르는 대혼란에 빠졌다. 전투가 끝나도 안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싱가포르에 입성한 일본군은 인도 출신 포로들을 처형한 것은 물론 화교 학살 등 민간인 잔학행위도 일삼았다. 싱가포르 대학살이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뤄진 난징(南京) 대학살은 잘 알려졌지만 싱가포르 대학살은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다.

위 명예 회장과 가족은 삶의 근거지인 싱가포르가 이렇게 대혼란에 빠지고 화교들에게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싱가포르에서 서남쪽으로 40㎞쯤 떨어진 인도네시아 카리문섬으로 피난 가서 지냈다. 두 차례나 난민 생활을 한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싱가포르에 돌아온 위 명예 회장은 학업을 재개해 1936년 설립된 중정중학(中正中学)에 다녔다. 중정(中正)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주석을 지낸 장제스(蔣介石, 1887~1975년)의 호다.

늦깎이 중학생 시절 그는 반식민주의 정치 운동에 가담했다가 영국 당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한 셈이다. 일본군이 떠난 뒤 독립을 얻는 대신 식민주의자들이 다시 돌아오자 당시 동남아시아에는 반식민주의 물결이 일었으며 각급 학교는 그 중심지가 됐다. 그런 가운데 싱가포르와 말라야 식민지는 새로운 혼란에 휩싸였다. 1948년 말라야 식민지에서 공산당 산하 무장단체인 말라야 민족해방군(MNLA)이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말라야 비상사태(Malayan Energency)’다. 게릴라전은 1960년까지 계속됐다. 그 사이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식민지는 말라카 해협의 또 다른 영국 식민지인 페낭과 말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이란 이름으로 독립했다. 말라야 연방은 1963년 싱가포르와 보르네오섬 북부의 영국 식민지였던 북보르네오와 사라와크 등을 통합해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했다. 싱가포르는 종교와 민족 분규를 겪으면서 1965년 리콴유 주도로 말레시아에서 분리돼 화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로 새 출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위 명예 회장은 부친의 뜻에 따라 학교를 그만두고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 덕분에 정치에 휩쓸리는 것을 면했다. 위 명예 회장은 1949년 고무·후추·사고(야자에서 추출한 녹말가루) 등을 거래하던 가족 소유 기업 컹러옹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부친을 따라다니며 비즈니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종류의 계약과 인간관계를 배웠다. 가족 도제식 경영 수업이었던 셈이다. 형제들과 치열한 능력 경쟁 끝에 위 명예 회장은 1958년 UOB의 전신인 UCB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는 UOB 입행 직후 부친의 지시로 수개월간 영국 런던의 은행에 파견 가서 현장을 익히고 경영기법을 연수한 다음에야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업을 물려주지 않았다. 능력과 자질이 증명돼야만 했다. 능력을 보인 위 명예 회장은 입사 2년 뒤 이사를 맡을 수 있었다.

1960년 부친이 UCB의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장만 맡으면서 위 명예 회장은 그해 7월 1일부터 대표이사를 맡았다. 위 명예 회장이 그 자리에 오르면서 은행은 비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싱가포르에서만 영업하던 로컬 은행 UCB의 국제 금융 영업 추진이다. 오늘날 굴지의 금융회사 UCB가 있을 수 있게 한 글로벌화의 시작이다. 우선 외환 매매와 무역 융자에 나서기 시작했다. UCB는 1964년 홍콩에 처음으로 국외 지점을 내고 해외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였고, 홍콩은 영국 식민지로 동남아시아의 금융 중심지였다. 홍콩 진출을 계기로 1965년 1월 1일부터 은행의 영문 이름을 UOB(United Overseas Bank)로 바꿨다. 홍콩에 UCB라는 이름의 은행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충돌을 피할 목적이었다.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로 학업 대신 사업 선택


▎싱가포르 다운타운에 있는 대화은행 플라자. 지상 66층 규모의 건물이다. / 사진:위키피디아
위 명예 회장은 지난 60년 동안 싱가포르 경제발전과 금융산업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위 명예 회장은 자신이 은행을 경영하는 동안 무역 융자를 전보다 100배나 불렸으며 자산도 9배로 확대했다. 부친이 창업한 로컬 은행을 누구보다도 앞서 글로벌 금융회사로 진화시킨 것이다. 싱가포르는 물론 해외 지점도 공격적으로 늘렸을 뿐 아니라 활동 분야도 금융업에 국한하지 않고 자산관리·보험·부동산·신탁·유언집행·리스금융에 환어음과 사채 발행을 담당하는 종합금융 업무로 확대했다. 창업은 부친인 위컹창 회장이 했지만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것은 아들인 위 명예 회장이었다. 수성을 넘어선 제2의 창업이었다. UOB는 1970년 상장했으며 위 명예 회장은 1년 뒤 대표이사 부회장에 올랐다. 1971년은 그의 경영 능력이 빛을 발한 시기였다. 충키아우 은행(崇僑銀行)의 지분 49.8%를 인수해 합병함으로써 자산을 두 배로 늘린 것이다. 합병 규모가 2200만 싱가포르달러로 당시까지 싱가포르 최대 규모로 기록됐다. 과감한 결단이었다. 이로써 UOB는 자산과 지점 규모에서 당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통틀어 2위 규모의 대형 은행이 됐다. 합병으로 충키아우 은행이 보유한 싱가포르·말레이시아·홍콩의 지점을 손에 넣음으로써 아시아 지역에 대한 영업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위 명예 회장은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준 금융산업의 혁신 경영인’으로 싱가포르 모든 언론의 지면에 얼굴을 실을 수 있었다. 금융산업을 하려면 규모의 경제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신념 덕분이었고 이는 변화하는 글로벌 금융 환경에 들어맞았다. 1974년 부친이 은퇴하면서 위 명예 회장은 부친이 맡았던 회장 자리에 올랐다.

위 명예 회장은 지치지 않고 인수합병을 계속했다. 1972년 홍콩증시에 상장했으며 1973년에는 리화은행을 인수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지역 영업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 1984년에는 파이스턴 은행을, 1999년에는 필리핀의 웨스트몬트 은행과 태국의 라다나신은행을 흡수했다. 2001년에는 무려 100억 싱가포르달러를 들여 OUB(Overseas Union Bank Limited)를 인수했다. 2002년에는 마침내 대망의 중국 시장에 진출해 상하이와 베이징에 지점을 냈다.

2007년 UOB의 65차 주주총회에서 위 명예 회장은 최고경영자(CEO)에서 내려왔다. 그 자리는 아들인 위이청이 맡았다. 위이청은 현재 이 은행의 부회장 겸 CEO로 일한다. 위 명예 회장은 CEO는 내려놓았지만 회장 자리는 당분간 유지하다 2013년에 그 자리에서도 물러났으며 올해 4월 이사 자리에서도 떠나며 은퇴했다. 이때까지 그는 UOB를 지점 500개 이상을 거느린, 시가총액 기준 싱가포르 최대 은행으로 키워놓았다.

2016년 UOB에 위기가 닥쳤다. 저유가 등으로 석유와 가스 부문을 중심으로 부실채권이 발생하면서 매출이 전년도에 비해 22억 싱가포르달러, 비율로 3.5%가 떨어졌다. 하지만 급박한 시장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해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UOB는 여전히 능력 있는 글로벌 은행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위 명예 회장은 자산은 물론 재능기부 활동도 열정적으로 해왔다. 특히 교육 부문에선 시간과 정열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1970년 싱가포르의 난양(南洋)대학 이사장을 맡았다. 1956년 설립된 이 대학은 공대로 유명한 난양이공(南洋理工)대학과 다른 교육기관이다. 당시 난양대는 싱가포르에서 유일하게 중국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하지만 싱가포르의 중등학교는 대부분의 과목을 영어로 가르쳤다. 이에 따라 리콴유 총리는 난양대에 5년 내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가르치도록 했다. 위 명예 회장은 이사장으로서 대학 커리큘럼을 개혁하고 영어 수업 전환 과정을 지휘했다. 이 학교는 1980년 싱가포르대학과 합병해 싱가포르 국립대학(NUS)이 됐다. 2004년에는 난양이공대학의 부이사장을 맡아 싱가포르의 두 개 공립대학을 모두 감독해본 경영인이 됐다. 싱가포르의 오늘이 있게 한 과학기술과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표시한 셈이다.

사실 싱가포르에서 교육은 국가와 경제 발전의 기본 바탕이다. 산업 성장의 모든 동력은 교육에서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원이 아닌 인재가 발전을 주도한다. 싱가포르는 국제교육 허브다. 모국어 교육을 제외하곤 모든 과목을 영어로 강의한다. 이 도시에는 8만 명이 넘는 외국인 학생이 유학 중이다. 이웃 말레이시아의 국경도시 조호르에서 매일 국경을 넘어 싱가포르의 학교로 통학하는 학생 5000명은 제외한 숫자다.

UCB 대표이사 맡으며 글로벌 진출 시작

싱가포르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 20% 이상은 외국 유학생이다. 주로 동남아와 중국, 인도 출신이다. 정책적으로 해외 유명대학 캠퍼스 유치사업을 벌여 2009년 12곳에서 18곳 이상으로 늘었다. 눈여겨볼 점은 싱가포르의 중국 공직자 연수다. 중국 정부는 싱가포르의 난양(南洋)이공대학에 1992년부터 매년 500~600명씩 공직자를 위탁연수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1만3000명 이상이 연수했으며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만 1200명이 넘는다. 이처럼 싱가포르의 주요 공공 사업인 교육에 그가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위 명예 회장은 다양한 명예를 얻었다. 1990년과 2001년 ‘올해의 싱가포르 비즈니스맨’으로 선정됐으며 1971년에는 공공 활동 공로로 정부 메달도 받았다. 부인 촹용엉(Chuang Yong Eng)과의 사이에 5남 2녀를 뒀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지난 6월 12일 정상회의를 하면서 국내외의 관심 대상이 된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경제성적표가 가장 좋은 나라다. 홍콩과 더불어 대표적인 자유무역항인 싱가포르는 개방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자랑한다. 인구 560만 명의 이 도시국가는 201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전망치가 명목금액 기준으로 6만1766달러에 이른다. 룩셈부르크·스위스·노르웨이·아일랜드·아이슬란드·카타르·미국에 이어 세계 8위다. 구매력 기준(PPP)으로는 9만8014달러로, 인구 260만 명(12%만 국민)의 중동 산유국 카타르(12만4927달러)와 인구 60만 명의 유럽 미니국가 룩셈부르크(10만9192달러)에 이어 세계 3위다.

※ 채인택은…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201807호 (201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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