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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초야우 아버지 위컹창, 1935년 UOB 창업위 명예 회장은 싱가포르에서 공샹 소학교에 이어 남양화교중학(南洋華僑中學)에 다녔다. 당시 중학은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쳐놓은 과정이다. 현재도 운영되는 남양화교중학의 교훈은 자강불식(自强不息)이다. 베이징 칭화(淸華)대의 교훈과 똑같다. 『주역(周易)』 64궤 중 첫 괘인 ‘건괘(乾卦)’에 나오는 ‘천행건군자이자강불식(天行健君子以自强不息)’, 즉 ‘하늘의 운행이 튼튼한 것처럼 군자는 이를 본받아 스스로 강하고 쉬지 말아야 한다’는 말에서 따왔다. ‘일평생 쉬지 않고 자신의 업(또는 학문)을 닦아라’라는 뜻이다.하지만 그의 학업은 계속되지 못하고 1942년 갑자기 중단됐다. 일본이 1941년 12월 8일부터 영국 식민지인 싱가포르와 말라야(현재 말레이시아의 말레이반도 지역의 대부분)를 침공하면서다. 이듬해 2월 15일까지 계속된 싱가포르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고 싱가포르와 말라야 식민지는 일본에 함락됐다. 위 명예 회장은 또다시 전쟁을 겪어야 했다.일본은 환희에 빠졌지만 일본에 점령된 싱가포르는 대혼란에 빠졌다. 전투가 끝나도 안정을 회복하지 못했다. 싱가포르에 입성한 일본군은 인도 출신 포로들을 처형한 것은 물론 화교 학살 등 민간인 잔학행위도 일삼았다. 싱가포르 대학살이다. 1937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2월까지 이뤄진 난징(南京) 대학살은 잘 알려졌지만 싱가포르 대학살은 비교적 덜 알려진 편이다.위 명예 회장과 가족은 삶의 근거지인 싱가포르가 이렇게 대혼란에 빠지고 화교들에게 살벌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싱가포르에서 서남쪽으로 40㎞쯤 떨어진 인도네시아 카리문섬으로 피난 가서 지냈다. 두 차례나 난민 생활을 한 셈이다. 전쟁이 끝나고 싱가포르에 돌아온 위 명예 회장은 학업을 재개해 1936년 설립된 중정중학(中正中学)에 다녔다. 중정(中正)은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주석을 지낸 장제스(蔣介石, 1887~1975년)의 호다.늦깎이 중학생 시절 그는 반식민주의 정치 운동에 가담했다가 영국 당국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독립운동을 한 셈이다. 일본군이 떠난 뒤 독립을 얻는 대신 식민주의자들이 다시 돌아오자 당시 동남아시아에는 반식민주의 물결이 일었으며 각급 학교는 그 중심지가 됐다. 그런 가운데 싱가포르와 말라야 식민지는 새로운 혼란에 휩싸였다. 1948년 말라야 식민지에서 공산당 산하 무장단체인 말라야 민족해방군(MNLA)이 독립을 요구하며 무장 게릴라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말라야 비상사태(Malayan Energency)’다. 게릴라전은 1960년까지 계속됐다. 그 사이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식민지는 말라카 해협의 또 다른 영국 식민지인 페낭과 말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이란 이름으로 독립했다. 말라야 연방은 1963년 싱가포르와 보르네오섬 북부의 영국 식민지였던 북보르네오와 사라와크 등을 통합해 ‘말레이시아 연방’을 구성했다. 싱가포르는 종교와 민족 분규를 겪으면서 1965년 리콴유 주도로 말레시아에서 분리돼 화교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다민족 국가로 새 출발했다.이런 분위기에서 위 명예 회장은 부친의 뜻에 따라 학교를 그만두고 비즈니스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 덕분에 정치에 휩쓸리는 것을 면했다. 위 명예 회장은 1949년 고무·후추·사고(야자에서 추출한 녹말가루) 등을 거래하던 가족 소유 기업 컹러옹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는 부친을 따라다니며 비즈니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종류의 계약과 인간관계를 배웠다. 가족 도제식 경영 수업이었던 셈이다. 형제들과 치열한 능력 경쟁 끝에 위 명예 회장은 1958년 UOB의 전신인 UCB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는 UOB 입행 직후 부친의 지시로 수개월간 영국 런던의 은행에 파견 가서 현장을 익히고 경영기법을 연수한 다음에야 업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업을 물려주지 않았다. 능력과 자질이 증명돼야만 했다. 능력을 보인 위 명예 회장은 입사 2년 뒤 이사를 맡을 수 있었다.1960년 부친이 UCB의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나고 회장만 맡으면서 위 명예 회장은 그해 7월 1일부터 대표이사를 맡았다. 위 명예 회장이 그 자리에 오르면서 은행은 비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싱가포르에서만 영업하던 로컬 은행 UCB의 국제 금융 영업 추진이다. 오늘날 굴지의 금융회사 UCB가 있을 수 있게 한 글로벌화의 시작이다. 우선 외환 매매와 무역 융자에 나서기 시작했다. UCB는 1964년 홍콩에 처음으로 국외 지점을 내고 해외 영업을 시작했다. 당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의 일부였고, 홍콩은 영국 식민지로 동남아시아의 금융 중심지였다. 홍콩 진출을 계기로 1965년 1월 1일부터 은행의 영문 이름을 UOB(United Overseas Bank)로 바꿨다. 홍콩에 UCB라는 이름의 은행이 이미 있었기 때문에 충돌을 피할 목적이었다.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로 학업 대신 사업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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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B 대표이사 맡으며 글로벌 진출 시작싱가포르의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 20% 이상은 외국 유학생이다. 주로 동남아와 중국, 인도 출신이다. 정책적으로 해외 유명대학 캠퍼스 유치사업을 벌여 2009년 12곳에서 18곳 이상으로 늘었다. 눈여겨볼 점은 싱가포르의 중국 공직자 연수다. 중국 정부는 싱가포르의 난양(南洋)이공대학에 1992년부터 매년 500~600명씩 공직자를 위탁연수 보내고 있다. 지금까지 1만3000명 이상이 연수했으며 석사학위를 받은 사람만 1200명이 넘는다. 이처럼 싱가포르의 주요 공공 사업인 교육에 그가 뛰어들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그동안 위 명예 회장은 다양한 명예를 얻었다. 1990년과 2001년 ‘올해의 싱가포르 비즈니스맨’으로 선정됐으며 1971년에는 공공 활동 공로로 정부 메달도 받았다. 부인 촹용엉(Chuang Yong Eng)과의 사이에 5남 2녀를 뒀다.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지난 6월 12일 정상회의를 하면서 국내외의 관심 대상이 된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경제성적표가 가장 좋은 나라다. 홍콩과 더불어 대표적인 자유무역항인 싱가포르는 개방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적 번영을 자랑한다. 인구 560만 명의 이 도시국가는 2018년 국제통화기금(IMF)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 전망치가 명목금액 기준으로 6만1766달러에 이른다. 룩셈부르크·스위스·노르웨이·아일랜드·아이슬란드·카타르·미국에 이어 세계 8위다. 구매력 기준(PPP)으로는 9만8014달러로, 인구 260만 명(12%만 국민)의 중동 산유국 카타르(12만4927달러)와 인구 60만 명의 유럽 미니국가 룩셈부르크(10만9192달러)에 이어 세계 3위다.
※ 채인택은…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 논설위원을 거쳐 국제전문기자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