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사회의 비정함과 사회에서 유린당한 가련한 여인의 사랑과 애절한 삶을 그리고 있다. 이 오페라는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꽃의 여인』을 각색한 것인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뒤마 피스가 실제로 사랑했던 여인이다. 두 사람의 묘소는 파리 몽마르트르 묘지에 있다. 이곳에는 음악가 베를리오즈, 화가 드가, 과학자 푸코, 작가 스탕달, 독일 시인 하이네 등 파리에서 활동했던 유명 인사들의 묘소도 있다.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내려다본 파리 시가지.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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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언덕에 올라서서 구름 낀 파리 시가지 풍경을 내려다본다. 눈 아래에 펼쳐진 크고 작은 수많은 건물과 길에는 파리에서 살다간 수많은 사람의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이때 어디선가 거리의 음악가들이 부르는 노래가 귓전을 울린다. 테너와 소프라노가 부르는 2중창인데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 중 ‘사랑이여, 우리 파리를 떠나…’(Parigi, o cara, noi lasceremo…)다. 이곳에서 이런 음악을 들으니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진다. 더군다나 이 오페라의 배경이 바로 19세기의 파리가 아닌가?
한편 이탈리아어 제목 [라 트라비아타]에서 라(La)는 여성형 정관사, 트라비아타(Traviata)는 ‘길을 벗어난 여인’이란 뜻이다. 막말로 ‘고급 창부’다. 이 오페라는 사회의 비정함과 사회에서 유린당한 가련한 여인의 사랑, 애절한 삶과 죽음을 그리고 있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도로에서 내려다본 공원과 같은 몽마르트르 묘지. 이곳은 원래 채석장이었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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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사교계의 여왕 주인공 비올레타는 폐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내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던 중 시골 청년 알프레도의 순수한 사랑에 마음이 이끌려서 그와 파리 교외에서 동거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알프레도는 그녀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파리에 있는 재산을 팔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파리에 돈을 구하러 가는데, 그 사이에 아버지 제르몽이 그녀를 찾아와 자기 아들과 헤어지면 좋겠다고 설득한다. 이에 비올레타는 사랑하는 연인과 그의 가족을 위해 다시 사교계로 돌아간다. 알프레도는 그녀가 돈 때문에 자신을 배신하고 떠난 것으로 오해하고는 사교장에서 도박을 하다가 다른 귀족 남자와 함께 등장한 그녀를 보더니 도박에서 딴 돈을 그녀 앞에 내던지며 모욕한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아버지 제르몽은 그녀에게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보낸다. 또 알프레도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비올레타에게 달려가 죽어가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파리를 떠나 다시 행복하게 살자고 한다. 이때 부르는 이중창이 바로 ‘사랑이여, 우리 파리를 떠나…’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비올레타는 자신의 작은 초상화가 달린 목걸이를 그의 손에 쥐여주면서 훗날 그를 사랑하게 될 다른 여인에게 선물하라고 말하고는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알프레도 앞에서 숨을 거둔다.
‘동백꽃의 여인’의 추억, 그리고 베르디
▎멀리 에펠탑이 보이는 길. 오른쪽 난간 아래에 몽마르트르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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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절한 이중창 선율을 마음에 되새기면서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몽마르트르 묘지를 향해 서쪽으로 멀리 에펠탑을 바라보면서 발걸음을 옮긴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거리를 따라 한참 내려가니 도로면 아래에 공원처럼 꾸며 놓은 묘지가 보인다. 이 묘지가 도로면보다 상당히 낮은 곳에 있는 이유는 원래 이곳이 옛날에는 채석장이었기 때문이다. 파리시는 1818년부터 1824년까지 몽마르트르 지역을 재정비하면서 11만㎡ 넓이에 달하는 이 공동묘지를 새롭게 조성했던 것이다.묘지 입구에 들어서자 경비실 안쪽 벽에 걸린 한 여인의 초상화가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공동묘지 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죽은 자들을 위한 도시 안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도시라고 해서 음산한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은 자들의 도시’, 즉 공동묘지를 로마제국 시대 초기 크리스트교 신자들은 코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했는데 ‘잠자는 곳’이란 뜻의 그리스어 코이메테리온(koimeterion)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탈리아어 cimitero(치미테로), 프랑스어 cimetière(시므티에르), 영어의 cemetery(세메터리)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했다.
▎몽마르트르 묘지 입구 관리사무실. 벽에 알폰신 플레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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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마르트르 묘지 안을 둘러보는데 작은 신전 같은 묘소 안에 누운 남자의 형상이 눈에 띈다. 마치 젊은 날 사랑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채 잠든 것 같다. 그의 이름은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Alexandre Dumas fils). 피스(fils)는 ‘아들’이란 뜻이다. 그의 대표작은 『동백꽃의 여인』(La Dame aux Camélias)이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삼총사』,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으로 유명한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인데, 프랑스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였다. 뒤마 피스는 그의 정식 아들이 아닌 사생아였기에 어머니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며 자랐고, 또 자신은 비천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주위의 냉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인지 나중에 작가가 된 그는 불우한 계층과 약자에게 관심을 쏟았다.뒤마 피스의 묘소에서 약 100m 떨어진 묘소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묘소는 다른 묘소들과 뒤섞여 있어서 눈에 쉽게 띄지 않고 규모도 작고 단순한 편이다. 이 묘소 측면에는 ‘이곳에 알폰신 플레시(1824~1847)가 쉬고 있다’는 비문이 있고, 앞면에는 하얀 동백꽃을 가슴에 안고 있는 그녀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입구 관리사무실 벽에 걸린 바로 그 초상화인데 그녀가 바로 ‘동백꽃의 여인’이다.그녀는 노르망디 지방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15세 때 파리로 무작정 상경하여 세탁소, 모자가게 등을 전전하며 일했다. 그러다가 부유한 상인의 애첩이 된 다음부터는 화려한 생활에 젖게 되었고, 더 나아가 파리 사교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사교장에 갈 때는 항상 동백꽃을 가슴에 꽂았다. 어느 날 뒤마 피스는 그녀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졌으며 두 연인의 관계는 1844년 9월부터 약 1년 동안 지속됐다. 그 후 그녀는 부유하고 권세 있는 귀족과 두 번 결혼까지 했고,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귀족스럽게 보이도록 ‘마리 뒤플레시(Marie Duplessis)’로 바꾸었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그녀에게 가혹했다. 1847년 2월 7일 불과 23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절명하고 말았다.
▎붉은 꽃이 놓인 작은 신전 형태의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묘소.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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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나중에 접한 뒤마 피스가 비통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그녀와의 사랑을 추억하며 쓴 것이 바로 『동백꽃의 여인』이다. 이 자전적 소설에서 그녀는 ‘마르그리트 고티에’, 그는 ‘아르망 뒤발’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베르디는 이 소설을 바탕으로 [라 트라비아타]를 만들면서 두 주인공 이름을 이탈리아식으로 ‘비올레타’와 ‘알프레도’로 바꾸었다.한편 베르디는 이 오페라에 자신의 이야기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듯 느꼈을 것이다. 그는 어렸을 때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도시 부세토의 유지 바레치의 후원으로 공부했고, 성장해서는 그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했다. 하지만 마르게리타가 일찍 죽자, 파리에서 이탈리아 여인 스트렙포니를 만나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는 한때 밀라노 스칼라 극장에서 이름을 날리던 소프라노 가수였으나 남자관계가 매우 복잡했고 또 목소리가 나빠진 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사람들을 피해 파리로 이주했던 것이다. 베르디가 그녀와 함께 부세토에서 살림을 차리자 사람들은 이들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으며 그녀에게 온갖 험담을 쏟아냈다. 하지만 바레치는 그녀를 딸처럼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그러니까 제르몽은 바레치와 흡사했고, 비올레타는 스트렙포니의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사랑이여, 우리 파리를 떠나
▎여러 묘소 사이에 보이는 흰색 묘소가 알폰신 플레시의 것이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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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신과 약속이라도 한 듯 알폰신과 뒤마 피스 두 사람은 같은 해(1824년)에 태어났고 같은 장소에 묻혔다. 게다가 몽마르트르 묘지는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이 태어난 해에 완공되었으니 운명의 신이 이들을 위해 준비한 영원한 안식처였던 것일까?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알폰신과 달리 뒤마 피스는 그녀보다 거의 50년을 더 살면서 두 번 결혼하여 딸도 둘 낳았으니, 운명의 신은 그에게는 너그러웠던 것일까?
▎알폰신 묘소에 있는 그녀의 초상화. 흰 동백꽃을 가슴에 달았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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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련한 ‘동백꽃의 여인’의 영원한 안식처 위에 낙엽 한 잎이 소리 없이 떨어진다. ‘사랑이여, 우리 파리를 떠나…’의 애절한 이중창이 어디선가 다시 한번 들려오는 것만 같다.
사랑이여, 우리 파리를 떠나이별 없이 살아가리라.지난날 고통 다 사라지고그대 건강 다시 꽃피리라.그대는 내게 소망과 빛,행복한 앞날이 찾아오리라.-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