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이탈리아/피렌체(Firenze) 

‘오래된 다리’ 아래로 흐르는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피렌체 시가지를 관통하는 아르노강에 놓인 다리 폰테 벡키오(Ponte Vecchio)는 형태가 아주 독특하다. 즉, 단순히 강의 양안을 연결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가도 갖추고 있는 데다 ‘공중통로’가 동쪽 상가 위로 지나가는 복합기능 구조물이다. 다리 양쪽에 늘어선 상가는 현재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은방이다. 그래서 이 다리 위를 걸어가다 보면 다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게 된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다본 피렌체 시가지 전경. 대성당(오른쪽)과 팔랏쪼 벡키오(중간), 아르노강에 놓인 다리 폰테 벡키오(왼쪽)가 시선을 끈다. / 사진:정태남
아르노강 남쪽 언덕 위에 조성된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라서서 피렌체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시선은 두오모(원래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집중되다가 피렌체의 정청(政廳)이던 팔랏쪼 벡키오(Palazzo Vecchio)를 거쳐 폰테 벡키오로 옮겨진다. 황혼에 물든 아르노 강물 따라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O mio babbino caro)’의 감미롭고도 애틋한 선율이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듯하다. 이 선율만큼 피렌체의 분위기를 따뜻하고 부드럽고 정감 있게 가슴에 와닿게 하는 것이 있을까? 그런데 이 아리아의 선율만 그냥 들으면 마치 멀리 있는 아버지나 하늘나라로 떠난 아버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사실 이 아리아를 부르는 소프라노나 이를 듣는 청중은 으레 애틋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O mio babbino caro,
mi piace; e bello, bello;
vo‘ andare in Porta Rossa
a comperar l‘anello!
Si, si, ci voglio andare!
e se l‘amassi indarno,
andrei sul Ponte Vecchio,
ma per buttarmi in Arno!
Mi struggo e mi tormento!
O Dio, vorrei morir!
Babbo, pieta, pieta!


이것을 원어에 가깝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난 그이가 좋아요. 그이는 멋져요, 멋져.
난 포르타 로사 성문에 가고 싶어요.
(결혼) 반지 사러 말예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거기에 가고 싶어요!
만약 내가 그이를 헛되이 사랑하고 있다면
폰테 벡키오로 갈 거예요.
아르노 강물에 뛰어들려고 말예요!
난 초조하고 괴로워요!
오 하나님, 죽고 싶어요!
아버지, 제발, 제발!


가사 내용을 살펴보면 선율이 주는 애절한 느낌과 완전히 딴판이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라고는 한마디도 없고 멋진 그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되면 폰테 벡키오로 가서 아르노강에 몸을 던지겠다고 아버지에게 떼를 쓰며 ‘위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가사에 언급되는 폰테 벡키오는 어떤 다리일까?아르노강 남쪽 언덕 위에 조성된 미켈란젤로 광장에 올라서서 피렌체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시선은 두오모(원래 명칭은 ‘꽃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집중되다가 피렌체의 정청(政廳)이던 팔랏쪼 벡키오(Palazzo Vecchio)를 거쳐 폰테 벡키오로 옮겨진다. 황혼에 물든 아르노 강물 따라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O mio babbino caro)’의 감미롭고도 애틋한 선율이 다리 아래로 흘러가는 듯하다. 이 선율만큼 피렌체의 분위기를 따뜻하고 부드럽고 정감 있게 가슴에 와닿게 하는 것이 있을까? 그런데 이 아리아의 선율만 그냥 들으면 마치 멀리 있는 아버지나 하늘나라로 떠난 아버지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사실 이 아리아를 부르는 소프라노나 이를 듣는 청중은 으레 애틋한 표정을 짓는 경우가 많다.

이탈리아어 가사는 다음과 같다.

O mio babbino caro,
mi piace; e bello, bello;
vo‘ andare in Porta Rossa
a comperar l‘anello!
Si, si, ci voglio andare!
e se l‘amassi indarno,
andrei sul Ponte Vecchio,
ma per buttarmi in Arno!
Mi struggo e mi tormento!
O Dio, vorrei morir!
Babbo, pieta, pieta!


이것을 원어에 가깝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난 그이가 좋아요. 그이는 멋져요, 멋져.
난 포르타 로사 성문에 가고 싶어요.
(결혼) 반지 사러 말예요!
정말이에요, 정말로 거기에 가고 싶어요!
만약 내가 그이를 헛되이 사랑하고 있다면
폰테 벡키오로 갈 거예요.
아르노 강물에 뛰어들려고 말예요!
난 초조하고 괴로워요!
오 하나님, 죽고 싶어요!
아버지, 제발, 제발!


가사 내용을 살펴보면 선율이 주는 애절한 느낌과 완전히 딴판이다.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내용이라고는 한마디도 없고 멋진 그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게 되면 폰테 벡키오로 가서 아르노강에 몸을 던지겠다고 아버지에게 떼를 쓰며 ‘위협’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가사에 언급되는 폰테 벡키오는 어떤 다리일까?

유서 깊은 다리 폰테 벡키오와 폰테 산타 트리니타


폰테 벡키오는 ‘오래된(vecchio) 다리(ponte)’라는 뜻으로, 굳이 한자로 표기한다면 ‘구교(舊橋)’고, 이것을 ‘벡키오 다리’라고 번역하면 아주 우스꽝스럽다. 마치 ‘하얀 산’이란 뜻을 지닌 몽블랑을 ‘블랑 산’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쨌든 피렌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다리는 형태가 아주 독특하다. 즉, 단순히 강의 양안을 연결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가도 갖추고 있는 데다 구름다리 같은 통로가 동쪽 상가 위로 지나가는 복합기능 구조물이다. 다리 양쪽에 늘어선 상가는 현재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금은방이다. 금은방 진열장을 바라보며 걸어가다 보면 다리 위에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게 된다. 그럼 도대체 얼마나 오래되었으면 ‘오래된 다리’라고 하는 걸까? 이 다리의 기원은 2000여 년 전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중세에 여러 번 증축, 개축된 다음 조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1511~1574)의 설계에 따라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 다리 한가운데에는 아르노강을 조망할 수 있도록 동쪽과 서쪽으로 시야가 트여 있다. 이 다리 아래로 흐르는 아르노강은 마치 잔잔한 호수 같아서 다리가 강물 위에 거울처럼 비친다. 다리 한가운데 아르노강의 서쪽을 조망하는 곳에는 후기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1571)의 흉상이 이 다리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세워져 있다. 피렌체 태생이었던 그는 조각가이자 금세공 예술가로 이름을 크게 떨쳤던 인물이었으니 금은 보석상이 늘어선 이곳의 분위기가 한층 더 격조 높게 보인다.

벤베누토 첼리니가 말년에 쓴 자서전에 따르면 ‘피렌체’라는 도시 이름은 기원전 1세기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영어식으로는 줄리어스 시저)가 붙였다고 한다. 로마군의 병영이 있던 아르노강 변에 꽃이 만발했기 때문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곳을 ‘꽃피는 곳’이란 뜻으로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작명했다는 게 역사적으로 근거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플로렌티아는 프랑스어와 영어로 Florence로 표기되며 각각 ‘플로랑스’, ‘플로렌스’라고 발음한다. 한편, 현대 이탈리아어로는 ‘Firenze’로 표기하고 ‘피렌쩨’에 가깝게 발음한다.

한편 벤베누토 첼리니 흉상 뒤로 보이는 다리의 이름은 폰테 산타 트리니타(Ponte santa trinita), 즉 ‘성 삼위일체 다리’라는 뜻이다. 이 다리는 단테의 애절한 사랑의 추억이 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단테는 9살 때 아버지를 따라 포르티나리 가문에서 열리는 축제에 갔다가 포르티나리의 8살 난 딸 베아트리체를 처음 보고 마음을 빼앗겼는데, 10년 후 이 다리 입구에서 그녀와 다시 마주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베아트리체는 부유한 은행가 바르디 가문의 남자와 결혼했고, 단테도 부유한 도나티 가문의 규수 젬마와 결혼했다. 게다가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이승에서 다시 만날 운명도 아니었다. 베아트리체가 출산하다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절명하고 말았으니….

단테의 『신곡』과 오페라가 된 사기꾼 이야기


▎특이한 형태의 다리인 폰테 벡키오 외관. / 사진:정태남
피렌체는 12세기 초반에 도시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세력을 크게 확장했고 13세기에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면서 앞으로 문화의 중심지가 될 바탕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피렌체는 교황 지지파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지파로 분열되었고, 주도권을 잡은 교황파는 다시 내분에 휩싸였다. 황제파였던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오랜 유랑 생활 끝에 라벤나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유배지에서 베아트리체를 추억하면서 쓴 방대한 서사시는 후세에 『신곡』이라고 불리게 된다. 『신곡』은 라틴어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읽기 쉽도록 피렌체 방언으로 쓰였기 때문에 피렌체 방언이 이탈리아 표준어로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한편 단테는 반대파 중에서 정치가, 성직자, 악명 높은 범죄자들을 모두 『신곡』의 [지옥 편]에 던져 넣어버렸다. [지옥 편]에서 쟌니 스킥키(Gianni Schicchi)에 관해 몇 줄 언급했는데, 그는 남의 유산을 교묘하게 모두 가로챈 희대의 사기꾼이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후세에 [쟌니 스킥키]라는 단막 오페라로 탄생했다. 이 오페라는 비극적인 오페라만 작곡했던 풋치니가 쓴 유일한 희극 오페라로, 음악과 극의 짜임새가 아주 뛰어나다. 이 오페라의 핵심을 이루는 아리아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가사의 내용이 어떻든 간에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아리아 중 하나로 손꼽힌다. 그런데 이 오페라는 공연 시간이 1시간 정도로 짧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기 때문에 무대에 올리기 쉬울 것 같지만, 사실 그리 만만한 작품은 아니다. 이 오페라는 성격이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을 얼마나 독특하게 부각시키느냐에 따라 맛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연출가의 뛰어난 역량과 감각이 요구되며, 또 기본적으로 당시 피렌체의 풍습과 역사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품위 있는 다리로 개축된 폰테 벡키오


▎보석상 거리가 있는 폰테 벡키오. 다리라기보다 마치 길을 연장한 듯한 모습이다. / 사진:정태남
오페라 [쟌니 스킥키]의 공간적 배경이 바로 피렌체고 시간적 배경은 단테가 살던 시대다. 더 정확히 말하면 1299년 9월 1일이다. 새로운 세기가 열리는 1300년대를 3개월 앞둔 시기니까 중세를 마감하고 곧 다가올 르네상스 시대를 기다리는 시점인 셈이다. 연대를 따져보면, 메디치 가문이 역사 전면에 등장하기 약 100년 전의 일이고 폰테 벡키오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모습으로 개축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단테가 살던 시대에는 이 다리의 모습이 단순했고 다리의 폭은 지금보다 훨씬 좁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다리는 1333년 대홍수 때 완전히 유실된 후 1345년 아치 세 개가 있는 구조로 보강되었고 다리 연변에 상가를 세우면서 다리 한가운데에서 아르노강 풍경을 조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당시 상가는 대부분 푸줏간, 생선가게, 피혁점 등이었기 때문에 다리 한가운데에 마련된 조망대는 강을 조망한다기보다는 썩은 생선이나 고기 뼈다귀 등과 같은 쓰레기나 오물을 강에 내던지는 곳으로 주로 사용됐다. 또 아르노강 상류 성벽 바로 앞에 있는 형장에서 처형된 사형수의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 떠내려오기도 했으니 이 다리 주변은 오늘날과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할 만한 환경은 분명히 아니었다. 게다가 피혁점 작업장에서는 말의 오줌을 사용하여 가죽을 가공했으니 이곳에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찔렀을 것이다.

그러다가 메디치 가문의 군주 코지모 1세(1519~1574)가 바자리에게 새로운 행정관청인 우피찌 궁(Palazzo Uffizi)을 세우게 하면서 정청(政廳)과 우피찌 궁을 새로 구입한 관저인 핏티 궁(Palazzo Pitti)과 직접 연결하는 긴 통로를 동편 상가 위에 만들도록 했다. 길이가 약 1km에 달하는 이 ‘공중통로’가 1565년에 완공된 다음부터 메디치 가문의 귀하신 몸들은 길거리로 내려와 구역질 나는 폰테 벡키오를 거칠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암살 위험으로부터도 신변이 훨씬 안전해졌다. 그러고는 통로 아래로 보이는 지저분한 광경을 더는 참지 못했는지 기존 세입자들을 모두 내보내고 이곳을 품위 있는 보석상 거리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의 분위기는 한결 격상되었을 뿐 아니라, 보석상에서 거두어들이는 세입도 곱절로 늘어났으니 꿩 먹고 알 먹는 셈이 되었던 것이다. 이 보석상 거리는 지금도 그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면서 폰테 벡키오를 피렌체의 명소로 만들고 있다. 이 명소에서 성 삼위일체 다리를 바라보며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선율에 귀를 기울이면 피렌체의 분위기는 또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필자 요청에 따라 이탈리아어 한글 표기는 가능한 현지 발음을 따랐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가이며 금세공 예술가 벤베누토 첼리니의 흉상. 그 뒤로 폰테 산타 트리니타(성 삼위일체 다리)가 보인다. / 사진:정태남



▎400여 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다리 위의 보석 가게들 / 사진:정태남



▎팔랏쪼 벡키오 및 우피찌 궁과 새로운 관저인 핏티 궁을 잇는 ‘공중통로’ / 사진:정태남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우피찌 궁에서 내려다본 폰테 벡키오와 ‘공중통로’. / 사진:정태남



▎아르노강과 폰테 벡키오. 오른쪽 건물이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우피찌 궁이다. / 사진:정태남
※ 정태남은…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901호 (2018.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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