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포브스는 2019년 유럽 최고 여행지로 부다페스트를 꼽았다. 사실 부다페스트는 예로부터 ‘도나우강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매력적인 도시다. 그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하는 여러 요소 중에는 부다 언덕 위에 세워진 마탸슈 성당과 어부의 요새가 반드시 포함된다.
▎부다페스트를 관통하는 도나우강. 의사당이 보이는 왼쪽이 페스트(페슈트) 지역이고 오른쪽이 부다(부더) 지역이다. 언덕 정상부 오른쪽에 마탸슈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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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는 도나우강 서쪽의 부다(부더), 동쪽의 페스트(페슈트), 부다의 북쪽 오부다(오부더)가 1873년에 통합되어 이루어진 도시다. 헝가리에서는 이를 ‘부더페슈트’라고 발음한다. 부다페스트는 예로부터 ‘도나우강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매력적인 도시다. 강의 아름다움은 자연환경뿐 아니라 강에 세워지는 다리와 강변에 세워진 건축물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도나우강을 내려다보는 부다 언덕 위에는 고딕 양식 성당의 높은 첨탑이 멀리서도 시선을 끈다. 이 성당의 이름은 독일식으로는 마티아스(Matthias) 성당, 헝가리식으로는 마탸슈(Mátyás) 성당이다. ‘도나우강의 진주’ 부다페스트의 매력을 한층 더 돋보이게 여러 요소 중에 이 성당과 어부의 요새는 반드시 포함된다.
마탸슈 성당은 가까이 가서 보면 웅장한 규모는 아니다. 하지만 80m 높이의 첨탑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첨탑들, 예쁜 색깔의 타일로 장식된 지붕, 화려하고 정교하게 장식된 내부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마치 하나의 커다란 보석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성당은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고풍스러움이나 연륜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 화려함 뒤에는 영욕의 헝가리 역사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마탸슈 성당의 화려하고 세련된 첨탑들과 지붕. 오른쪽 첨탑 위에 반지를 입에 문 까마귀가 보인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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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르네상스 왕을 기념하는 성당
▎부다(부더) 언덕 정상부에 세워진 마탸슈 성당과 어부의 요새.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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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은 11세기 초반에 성 이슈트반 1세가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 기원이라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성당은 1241년 몽골의 침입으로 파괴되었고 14세기 후반에 그 자리에 고딕 양식의 성당이 새롭게 세워졌다. 이 성당은 19세기 말에 헝가리 건축가 프리제슈 슐렉이 대대적으로 복원했다.그럼 이 성당의 헝가리식 이름에서 ‘마탸슈’는 누구인가? (이를 ‘마차시’라고 표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름 아닌 1458년부터 1490년까지 헝가리를 통치한 왕이다. 헝가리에서는 우리처럼 성(姓)을 이름 앞에 써서 후녀디 마탸슈(Hunyadi Mátyás)라고 한다. 독일식으로 바꾸면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다.
이 성당의 본래 명칭은 ‘성모 마리아 성당’이지만, 본명 대신에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것은 이 성당이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성당을 증축했고, 또 바로 이 성당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두 번 올렸으며, 그가 죽은 후 이 성당의 남쪽 탑에 그의 머리카락이 성체처럼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남쪽 첨탑 꼭대기에 결혼반지를 물고 있는 까마귀가 앉아 있다. 왜 까마귀일까? 그 이유는 라틴어로 코르비누스(corvinus)는 ‘작은 까마귀’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탸슈 성당과 성 이슈트반 1세의 기마상.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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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탸슈 왕은 ‘헝가리의 세종대왕’으로 여겨지는데 그가 통치할 때 헝가리는 국력이 막강했을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했다. 사실 그가 이탈리아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헝가리는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먼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받아들였다. 게다가 그가 두 번째 왕비로 맞이한 나폴리 왕국의 공주 베아트리체 다라곤(Beatrice d’Aragon)은 그와 뜻이 맞아 이탈리아 인문주의자들과 예술가들을 대거 궁중으로 불러들였고 이를 계기로 헝가리 땅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가 더욱더 깊게 뿌리내렸다.
하지만 마탸슈 왕 다음 세기에 헝가리는 엄청난 시련을 맞았다. 강력한 오스만 세력이 동유럽을 침공해오자 헝가리는 수도 부다를 포함하여 영토 상당 부분을 빼앗기고 말았다. 오스만 세력이 1541년부터 145년 동안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 성당은 이슬람 사원으로 완전히 탈바꿈했고, 내부에 있던 옛 프레스코 벽화들은 모두 회칠로 덮였다.
▎마탸슈 성당의 화려한 내부.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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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당은 ‘성모 마리아의 기적’이 있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손잡고 오스만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1686년에 부다를 포위하고는 포격을 가했다. 이 포격으로 성당 한쪽 벽이 무너졌는데, 벽 속에 숨겨져 있던 마리아상이 나타났다. 당시 이곳에서 기도하던 이슬람 신도들은 이를 보고 기겁했다고 한다. 바로 이날, 부다가 탈환되었고, 이어서 오스만 세력의 헝가리 지배도 끝났다. 그 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됐다. 오스트리아 지배 당시 이탈리아로부터 전해진 바로크 양식은 남부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이 성당도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됐다.
헝가리 민족 역사를 이야기하는 어부의 요새
▎공산주의 시대에 세워진 힐튼 호텔 외관과 대조를 이르는 원추형 지붕 탑.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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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에는 헝가리 태생의 대음악가 리스트가 작곡하고 지휘하는 [대관식 미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이 성립되어 헝가리 왕을 겸하게 된 합스부르크 왕조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헝가리 왕 대관식이 바로 이곳에서 거행됐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 군복을 입었고, 왕비 엘리자베트는 헝가리 전통의상을 입어 헝가리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후 헝가리 건국 1000주년이 되는 1896년을 앞두고 민족주의가 대두되면서, 건축가 슐렉은 이 성당을 원래 14세기 양식인 고딕풍으로 복원했다. 이를테면 네오고딕 양식이다. 하지만 이 성당은 제2차 세계대전 때 크게 파괴되는 바람에 1950년에서 1970년 사이에 다시 한번 복원됐다.
마탸슈 성당의 정면은 서쪽을 향하고, 후면은 도나우강을 향하고 있다. 후면 쪽에는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아기자기한 어부의 요새가 이 성당을 두르며 보호하듯 좌우로 길게 세워져 있는데 이곳에서는 도나우강과 페스트 지역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어부의 요새는 말이 요새지 방어를 목적으로 세운 것은 아니다. 건축가 슐렉이 마탸슈 성당을 재건축하면서 이 성당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고 도나우강을 잘 조망하기 위한 의도에서 장식처럼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 주변에는 어부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어째서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이 이름은 중세에 어부들의 조합이 도시 성벽의 이쪽 부분을 방어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도나우강을 조망할 수 있는 어부의 요새.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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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요새는 일곱 개 원추형 지붕의 둥근 탑과 계단, 테라스, 아치 회랑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기자기한 형태에서 헝가리 민족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일곱 개 원추형 지붕의 탑은 896년에 도나우강 지역으로 이주해온 마쟈르의 일곱 부족을 상징하는데, 이는 부족들의 천막을 형상화한 것이다. 양식적으로 구분해보면 이 요새는 중세 후기 중부유럽에 널리 퍼져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요소를 19세기 후반에 다시 새롭게 차용하여 디자인한 것이니 이를테면 네오-로마네스크 양식과 네오-고딕 양식이 혼재된 양식이다. 그런데 바로 옆에는 1970년대 공산주의 치하 때 세워진,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힐튼 호텔이 굳건하게 들어서 있다. 호텔 외관은 마탸슈 성당이나 어부의 요새에서 느끼는 분위기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만 그런대로 서로 강한 대비를 이루며 공존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헝가리 역사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마탸슈 성당과 어부의 요새 사이 광장에 세워진 성 이슈트반 1세의 기마상.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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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어부의 요새와 마탸슈 성당과 사이에 있는 광장 한가운데에는 성 이슈트반 1세의 청동기마상이 있다. 그는 헝가리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왕이자 헝가리에 기독교를 들여온 주역으로 후세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데 매력과 낭만이 깃든 분위기에 휩싸여서인지 어부의 요새뿐 아니라 성 이슈트반 기마상도 마탸슈 성당과 함께 헝가리의 역사를 증언해준다기보다는 옛이야기를 들려줄 것만 같다.
-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