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외곽의 하일리겐슈타트는 베토벤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는 곳으로 ‘전원 교향곡’은 바로 이곳에서 완성됐다. 옛날 이곳은 빈 시민들이 여름에 더위를 식히러 즐겨 찾아오던 마을이었다. 숲이 많은 이곳에는 개울이 흐르고 또 언덕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어서 지금도 전원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포도밭이 펼쳐진 하일리겐슈타트 주변의 전원적인 풍경.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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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Wien)은 라틴 및 이탈리아식 표기 비엔나(Vienna)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비엔나’라는 도시명에서는 뭔가 모르는 기품과 세련됨이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실이 있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리라. 이 도시의 기원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원보다 훨씬 이전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즉, 빈의 역사는 고대 로마인들이 도나우강 변에 세운 국경 도시인 빈도보나(Vindobona)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음악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어떨까? 빈은 무엇보다도 먼저 음악의 도시다. 지구상 어느 곳도 빈만큼 많은 음악 천재를 포용해 온 도시는 없다. 사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말러 등과 같은 대음악가들을 제외하고도 빈에서 활동한 음악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따라서 빈은 ‘음악의 성지’나 다름없다.
베토벤의 (교향곡 제6번 ‘전원’)또 하나의 ‘성지가 있다. 빈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약 6㎞ 외곽 지역에 있는 하일리겐슈타트(Heiligenstadt)가 그곳이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성인(聖人)의 도시’라는 뜻인데, 여기서 말하는 성인이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이라면 이곳에 악성(樂聖) 베토벤(L. van Beethoven: 1770~1827)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옛날 이곳은 빈 시민들이 여름에 더위를 식히러 즐겨 찾아오던 마을이었는데 1892년 빈에 편입됐다. 숲이 많은 이곳에는 개울이 흐르고 또 언덕에는 포도밭이 펼쳐져 있어서 지금도 전원적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진다.
바로 이러한 환경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6번 ‘전원’]이 탄생했다. 베토벤은 1806년에 [교향곡 5번 ‘운명’]을 작곡하던 중 이 교향곡을 구상하고는 1808년에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이를 모두 완성했다. 당시 그가 머물렀던 곳은 칼렌베르거 슈트라쎄(Kahlenberger Strasse) 26번지에 있는 집이었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의 제목을 [전원생활의 회상]이라고 붙였다. 베토벤의 유명한 곡들은 대부분 나중에 남들이 제목을 붙였거나, 그가 헌정한 인물들의 이름이 제목이 되었는데, 이 교향곡은 그가 직접 제목을 붙인 몇 개 되지 않는 작품 중 하나다. 그러니까 그의 작곡 의도가 확실하게 잘 드러나는 곡인 셈이다. 한편 베토벤의 자필 악보 원본과 초판 악보에는 ‘전원 교향곡’이란 뜻에서 이탈리아어로 [신포니아 파스토랄레](Sinfonia Pastorale)라고 되어 있다.
▎실개울이 흐르는 베토벤 산책로.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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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향곡은 좀 이례적이다. 교향곡은 보통 3~4악장으로 이워지는데 이 교향곡은 5악장으로 구성됐으니 말이다. 또 악장마다 다음과 같은 표제가 붙어 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공원에 세워진 산책하는 모습의 베토벤 석상.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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졔1악장: 전원에 도착했을 때 즐거운 감정의 깨어남졔2악장: 시냇가의 정경졔3악장: 시골사람들의 즐거운 모임졔4악장: 천둥, 폭풍우졔5악장: 목동들의 노래 - 폭풍우 뒤의 행복한 감사의 마음이것만 보면 비발디의 [사계]처럼 이 교향곡도 자연을 묘사한 음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베토벤은 이 곡에 대해 자연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연에 대한 묘사를 완전히 무시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곡 중에 시냇물 소리, 새소리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것은 음악적인 효과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어쨌든 이 교향곡에서는 삶의 기쁨과 희망이 듬뿍 느껴진다.
베토벤 하우스
▎하일리겐슈타트의 중심 광장. 왼쪽은 베토벤이 머물렀던 집들 중 하나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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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일리겐슈타트에 체류했던 집들 중에서 방문객이 가장 많은 집은 프로부스가쎄(Probusgasse) 6번지의 베토벤 하우스(Beethoven-Haus)다. 한편 프로부스가쎄는 ‘프로부스의 길’이란 뜻인데, 프로부스(Probus)는 로마제국 말기인 서기 276년에서 282년까지 재위한 황제다. 이 길에 그의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가 재위할 때 이 지역에서 포도 경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지역에서는 로마제국 시대 건축물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도나우강 국경을 지키던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는 뜻이다.
베토벤 하우스에 들어서면 중정을 중심으로 베토벤의 아파트와 맞은편 위층에 자리한 베토벤 기념관을 볼 수 있다. 베토벤이 살았다고 하는 아파트 안에는 그와 관련된 자료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로 전시되어 있어서 베토벤의 모습을 제대로 연상하는 데 오히려 좀 방해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베토벤은 정리 정돈과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다고 전해지니 말이다. 그런데 베토벤이 과연 이곳에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옛날 빈 사람들이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집 안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기 때문에 베토벤도 이런 주거 공간에서 지냈음에 틀림없다.
▎포도밭 언덕이 뒤에 보이는 고요한 하일리겐슈타트. 오른쪽 도로명 에로이카가쎄(Eroicagasse)는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에로이카(영웅)’]에서 따왔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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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와 삶의 기쁨
▎베 토벤 하우스의 안뜰. 왼쪽은 재현된 베토벤의 아파트고 오른쪽 계단 위는 베토벤 기념관이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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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들 중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베토벤의 데드마스크가 매우 강렬한 인상을 던져준다. 평온 속에 잠자는 듯한 그의 얼굴에는 험난했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만 같다. 사실 베토벤은 전원 교향곡을 구상하기 4년 전만 하더라도 자살하려고 유서까지 썼을 정도로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다.
베토벤의 데드마스크에 이어 그가 쓴 유서에 눈길이 멈췄다. 그가 이 유서를 쓴 것이 1802년 10월 6일이니 당시 31세의 혈기 왕성한 젊은이였는데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그는 20대 후반에 청력이상 때문에 은밀히 치료를 받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의사의 조언으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하일리겐슈타트에 집을 얻어 안식을 찾았다. 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서 받은 상처와 음악가에게는 치명적인 귓병이 더욱 악화되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히 쇠약해졌다. 암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중 낙엽이 흩어지는 가을이 다가오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는 겨울이 가기 전에 죽음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동생 앞으로 비장의 유서를 작성하고는 자기가 죽기 전에는 절대 개봉하지 말라고 썼다. 그런데 이 유서는 25년이 지난 1827년 그가 56세 일기로 숨을 거둔 다음 날인 3월 27일에야 발견됐다. 유서는 그의 서류와 종이 뭉치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그는 이 유서를 평생토록 몰래 간직하고 있으면서 아무에게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프로부스가쎄 6번지의 베토벤 하우스.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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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당시 베토벤은 유서를 써놓고 나서는 다시 생각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러니까 최악의 순간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섰던 것이다. 그는 신(神)이 남들이 누리는 행복을 자기에게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남들이 다다를 수 없는 드높은 예술의 경지로 자기를 인도하고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전원 교향곡’은 유서를 쓰던 때와 달리 하일리겐슈타트의 숲길을 산책하면서 신(神)이 준 삶에 감사하는 마음 상태에서 창조되었으리라. 그러고 보니 이 교향곡의 다섯 악장 중에서 특히 ‘제4악장: 천둥, 폭풍우’에 이어 ‘제5악장: 목동들의 노래 - 폭풍우 뒤의 행복한 감사의 마음’이 던져주는 의미를 더 깊게 음미할 수 있겠다.
▎베토벤이 비장한 마음으로 쓴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 / 사진:정태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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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