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남의 TRAVEL & CULTURE] 콜롬비아 카르타헤나(Cartagena de Indias) 

불구의 영웅이 피로 지켜낸 ‘카리브해의 진주’ 

글·사진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남아메리카의 관문 카르타헤나는 금과 은 같은 보물을 쿠바를 거쳐 본국 스페인으로 보내던 곳이었으며 아프리카 노예 교역의 주요 항구였다. 카르타헤나가 카리브해의 부유한 도시로 발전하자, 카리브해의 해적들이 이곳에 눈독을 들였고 영국 함대는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 성 위에 휘날리는 콜롬비아 국기. 그 너머로 카르타헤나 시가지와 카리브해가 보인다. / 사진:정태남
먼지 한 점 없는 청명한 남국의 하늘. 카리브해 바닷바람 결에 커다란 콜롬비아 국기가 펄럭인다. 콜롬비아 국기는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이 수평으로 펼쳐진 삼색기다. 그럼 이 세 가지 색은 무엇을 상징할까? 다름 아닌 금, 바다, 피다. 콜롬비아는 예로부터 금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다. 또 국토의 북서쪽은 태평양, 북쪽은 카리브해에 면해 있으니 바다의 나라이다. 빨간색은 콜롬비아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또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흘린 피를 상징하리라. 그 의미를 더 확장한다면 한국전쟁 때 콜롬비아 군인들이 먼 이국땅에서 흘린 피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카리브해 해적들이 노려본 남아메리카의 관문


▎안달루시아풍의 집들이 늘어선 카르타헤나 거리. / 사진:정태남
휘날리는 국기 아래에는 백인, 흑인, 원주민, 혼혈 등 여러 인종의 사람들이 쏟아 내는 스페인어가 귓전에 쨍쨍하게 울린다. 스페인어는 스페인 본토 사람들을 포함하여 전 세계에서 자그마치 4억7000만 명이 모국어로 쓰는 언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머리에 떠오른다.


콜롬비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북쪽에 있으니 비행기가 없던 시대에 유럽 사람들에게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관문이었다. 카리브해에 있는 카르타헤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관문 중의 관문으로 스페인 정복자들이 남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자국을 내디디던 곳이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시가지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아름다운 발코니가 있는 안달루시아풍의 집들과 바로크 시대의 성당들, 또 1811년 콜롬비아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다음에 세워진 ‘공화국 양식’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서 1984년에는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카르타헤나는 한마디로 ‘카리브해의 진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매력이 넘치는 도시로 명실공히 콜롬비아 제1의 관광도시다.

카르타헤나는 스페인의 젊은 사령관 페드로 데 에레디아(Pedro de Heredia)가 1533년에 세웠다. 도시명은 스페인 남동해안의 항구도시 카르타헤나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는데, 그 이유는 에레디아의 부하 대부분이 그곳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카르타헤나는 스페인의 카르타헤나와 구분하기 위해 카르타헤나 데 인디아스(Cartagena de Indias)라고도 한다. 여기서 ‘인디아스’는 서인도제도 지역을 말한다.


▎해적과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도시 성벽. / 사진:정태남
이처럼 지리적 요충지에 자리한 카르타헤나는 금과 은 같은 보물을 쿠바를 거쳐 본국 스페인으로 보내던 곳이었으며, 멕시코의 베라크루스와 함께 아프리카 노예 교역의 주요 항구였다. 카르타헤나가 카리브해의 부유한 항구로 발전하자, 카리브해 해적들이 이곳에 눈독을 들였고 영국 함대도 군침을 흘렸다.

해적과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카르타헤나를 방어하기 위해 시가지를 감싸는 11km의 굳건한 성벽이 세워졌고, 도시 외곽 요충지에는 크고 작은 요새들이 세워졌다. 그중에는 카르타헤나 시가지 외곽 동쪽 해발 40m 언덕 위에 세운 요새인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 성(Castillo San Felipe de Barajas)은 라틴아메리카 최대 규모의 요새로 카르타고 구시가지와 함께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남아메리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카르타헤나 전투


▎카르타고 전투 중 치열했던 공방전을 상기시키는 대포. / 사진:정태남
거대한 벙커 같은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 성 위로 올라가는데 곳곳에 좁은 터널 같은 입구가 보인다. 요새 안은 미로 같은 통로로 교묘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적이 접근하는 소리를 위에서도 파악할 수 있고, 만약 적이 통로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감쪽같이 살해할 수도 있다. 요새 위에 올라서니 시야가 탁 트이고 눈부신 남국의 태양 아래 성벽으로 둘러싸인 카르타헤나 구시가지와 그 너머에 있는 카리브해가 보인다. 이 요새 위에는 콜롬비아 국기가 휘날린다. 국기의 빨간색은 1741년 봄, 67일 동안 이곳을 온통 붉은 피로 물들였던 ‘카르타헤나 전투’를 생각나게 한다.

영국은 스페인이 장악하고 있던 카리브해의 해상권을 탈취하기 위해, 제독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경을 카리브해로 보냈다. 그는 먼저 파나마의 포르토벨로(Portobelo) 항구를 단숨에 점령한 다음 그 여세를 몰아 카르타헤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먼저 그는 이곳의 지형과 방어능력을 정탐하기 위해 1740년 3월에 제1차로 소규모 공격을 감행했고 그해 5월에는 전함 13척으로 제2차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741년 3월 13일에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카르타헤나 앞바다에 포진했는데, 전쟁사에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전에 그렇게 많은 함대가 집결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영국의 전력은 전함과 수송선 186척, 병력 2만8000명, 거기에 미국 초대 대통령이 될 조지 워싱턴의 형인 로렌스 워싱턴(Lawrence Washington)이 별도로 이끌고 온 병력까지 포함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대군이었다. 반면에 카르타헤나의 전력은 정규군과 원주민 및 아프리카 노예 후예들로 구성된 비정규군을 합친 3600명과 전함 6척이 전부였다. 영국 제독 버논 경은 개전하기도 전에 압도적인 승리를 확신하여 일찌감치 본국에 승전보부터 보냈다. 이에 영국 의회는 카르타헤나 함락 기념 메달까지 주조했다. 하지만 자만과 방심은 금물이다. 영국은 카르타헤나에 ‘스페인의 이순신 장군’ 블라스 데 레소(Blas de Lezo)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 출신인 그는 불과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해군에 들어간 이래 평생을 전투와 전투 속에서 살아온 인물로, 15세 때 왼쪽 다리를 잃었고, 18세 때는 왼쪽 눈을 잃었으며, 25세 때는 오른쪽 팔을 잃은 ‘반쪽짜리 사나이’였다. 그는 이런 불구의 몸으로 카르타헤나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된 지 4년 만에 10배에 달하는 막강한 적을 맞이했지만 기고만장하던 버논 경에게 엄청난 치욕을 안겨주었다.


▎거대한 벙커 같은 요새인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 성 정상부. / 사진:정태남


영국군은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 요새를 공격하다가 블라스데 레소 장군의 전술에 휘말려 엄청난 희생을 치른 데다가 황열병까지 번져 사망자가 1만 명에 달했고 7500명이 부상당했으며 대포 1500문을 잃었고 수많은 전함과 수송선이 침몰당하거나 파손됐다. 반면에 스페인 측은 800명이 목숨을 잃었고 1200명이 부상당했으며 대포 395문과 전함 6척을 잃었다. 불구의 몸으로 영국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놓은 블라스 데 레소 장군은 전투 중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몇 달 후 5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불굴의 의지로 카르타헤나를 방어한 덕택에 스페인은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지킬 수 있었고, 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영어가 아닌 스페인어가 공용어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산 펠리페 데 바라하스 성 앞에 세워진 블라스 데 레소 장군 동상. / 사진:정태남


그 후 270여 년이 지난 2014년 11월, 영국 찰스 황태자가 콜롬비아를 방문했다. 그와 카르타헤나 시장은 블라스 데 레소 장군 동상이 있는 이 성의 입구에 영국군 희생자 추모비를 제막했다. 하지만 이 추모비는 시민들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1주일 만에 철거되고 말았다. 시민들은 침략자를 맞아 카르타헤나를 피로 지킨 영웅들을 조금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요새 안에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 통로 / 사진:정태남


※ 정태남은… 이탈리아 공인건축사 정태남은 서울대 졸업 후 이탈리아 정부장학생으로 유학, 로마대학교에서 건축부문 학위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건축 외에 음악· 미술·언어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30년 이상 로마에서 지낸 필자는 이탈리아의 고건축복원전문 건축가들과 협력하면서 역사에 깊이 빠지게 되었고, 유럽의 역사와 문화 전반에 심취하게 되었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대기업·대학·미술관·문화원·방송 등에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역사, 건축, 미술, 클래식 음악 등에 대해 강연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 년 로마』,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201904호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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