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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 SK그룹 회장 인터뷰를 마치고 

‘리더십 체인저’로서의 역할을 기대하며 

다보스(스위스)=권오준 편집장
생각 하나로 세상이 바뀐다. 그냥 바뀌지는 않는다. 대의명분, 논리적 사고, 인내력, 추진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외로울 수 있지만, 오롯이 리더가 감당할 몫이다.

▎지난 2월 14일 최태원 회장이 서울 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최종현학술원 출범기념 한미중 컨퍼런스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 사진: SK그룹
WHY: 포브스코리아 취재팀이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만나기 위해 스위스 다보스까지 간 까닭은 하나다. 최 회장이 남들과 질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들’이란 한국 재계를 이끌어 온 기존 기업인들과 현재 경영자들이다. ‘다른 길’이란 추구하는 리더십이 다르다는 것인데, ‘남들’이 줄곧 경쟁, 고객, 혁신 등을 이야기할 때 그는 사회적 가치, 행복을 일관되게 강조해왔다. 일례로 그는 2019년 신년사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6차례나 언급했다. 경영진 평가 시스템에서 ‘사회적 가치 제고 활동’에 50% 비중을 둔 것도 ‘이익 추구’를 경영의 첫 번째 덕목으로 삼았던 한국 재계의 기존 관행에 비춰보면 파격적이고 이례적이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새로운 리더십의 등장’이라고 해도 되고 좀 더 나아가 ‘리더십의 세대교체’라고 해석해도 괜찮다는 판단이었다.

마침 한국 재계의 간판 얼굴들이 바뀌고 있는 시점이다.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진 1세대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이병철 삼성 선대 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뒤를 이어 한국 기업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등 2세대 대표 기업인들이 최근 몇 년 사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3세대 경영자들이 전면에 나서고 있다. 최 회장은 2.5세대 경영자로 나이는 젊지만 2세대의 한복판에서 경영활동을 한 데다, 3세대의 ‘맏형’으로서 한국 재계의 리더십을 주도해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런 그가 재계 리더십의 큰 물줄기를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방향으로 틀고 있으니, 그 행보와 파장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는 왜 새로운 길을 걸을까?’ 그 ‘새로운 길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다보스에서 최 회장을 만나 이 두 가지 궁금증을 풀고자 했다. 물론 기업가의 리더십은 경영 실적이 뒷받침돼야 신뢰가 쌓이고 지속된다. 아무리 좋은 철학을 가졌다 해도 이익이 나지 않는 기업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SK는 최근 몇 년간 글로벌 기업 M&A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흔히 말하는 ‘승자의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점도 관심사였다.

HARDSHIP: 우리는 최 회장과 두 번 만났다. 1월 23일 강경화 외무부 장관이 주최하는 리셉션에서 짧은 만남을 가졌고, 이튿날인 24일 오전 다보스 시내 한 오피스텔에서 공식 인터뷰를 진행했다. 첫 만남에서 그의 행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었다. 그의 차분한 표정을 보고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는 말했더니 그는 “산전수전 다 겪었는데, 이젠…”이라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가 선친인 최종현 회장을 대신해 그룹 회장에 오른 게 1998년이다. 회장에 취임하자마자 외환위기를 겪었고, 글로벌 사모펀드 소버린의 경영권 공격으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적도 있다. 20년이 훌쩍 지났고, 두 번에 걸쳐 영어의 생활을 감수했다. 그 와중에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하이닉스를 인수해 그룹의 급성장을 이끌었다. ‘고난은 선물이다’는 말이 있다. 고난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을 키우고, 인생의 허무함을 일깨운다. 밀려드는 허무함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허무함을 딛고 일어섰을 때 인생의 대의를 가다듬고, 새로운 가치에 눈뜨며, 열정으로 가득 찬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주관적인 견해지만 ‘입가의 엷은 미소’에서 그가 고난을 선물로 받아들인 것으로 이해했다.

FATHER: 감성으로 동기를 얻고 이성으로 실행한다. ‘사회적 가치 추구를 통한 행복’이라는 최 회장의 기업 철학은 선친인 최종현 회장의 철학이 대들보였다. 그 대들보 위에 최 회장이 현대적인 집을 지었다. 우리는 최 회장 인터뷰를 앞두고 최종현 회장을 공부했다. 1962년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SK 경영에 뛰어든 최종현 회장은 1973년부터 1998년까지 25년간 그룹을 이끌면서 SK를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워 ‘제2의 창업자’로 불린다. 스스로도 ‘1.5세대 창업주’라고 지칭했다. 그는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유학파로, 서구 합리주의자의 면모를 갖고 있었을뿐더러 ‘미국식 경영’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경영 철학으로 ‘인간 위주의 경영, 합리적인 경영, 현실을 인식한 경영을 내세웠는데, 그중 인간 위주의 경영을 가장 중시했다. 그는 1970년 대에 이미 공식 석상에서 이런 말을 했다. “기업경영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 첫째도 인간, 둘째도 인간, 셋째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기업경영에서 가장 역점을 둬야 하는 것은 인간 위주의 경영이다. 이를 위해 사람을 사람답게 다룬다는 기본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 말로 끝나지 않고 서구적 개념의 경영 시스템도 구축했다. 1979년 선포한 SK만의 경영 시스템인 SKMS가 그것이다.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경영은 한마디로 최종현 회장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선친인 최종현 회장을 공부하니까 최 회장의 지금 행보가 잘 이해된다. 지금도 어떤 결정을 할 때 선친을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어린 나이에 (그룹) 회장이 되면서 아버님을 많이 따르고자 노력했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아버님은 어땠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아버님이 25년간 경영하셨고, 나도 이제 20년이 흘렸다. 이젠 나의 방식으로 결정한다.”

PHILOSOPHY: ‘나의 방식’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그 누구의 방식도 아닌 ‘나의 방식’으로 경영한다는 것이다. ‘나의 방식’이 정립되려면 철학이 기초가 되어야 한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왜 기업을 경영하는가?’라고 자문하고 답(가치)을 구해야 한다. 그다음 구한 답(가치)을 기업에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터뷰에서 최 회장은 “나는 기업경영의 중심을 돈이 아닌 행복에 맞추려고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행복은 SK 구성원, 파트너, 사회의 행복이다. 알다시피 행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아야 하고, 그 방법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가 올해 직원들과 100번 행복토크를 하겠다는 것은 그 방법을 알기 위한 노력이다. KPI(핵심성과지표)에 소설 밸류를 50%나 반영하겠다는 것은 강한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기존의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기업이 지속적으로 존속하기 위한 이윤추구활동 이외에 법령과 윤리를 준수하고, 이해관계자의 요구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사회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책임 있는 활동)보다도 한 단계 진화했다.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 경영을 단순하게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기업의 이윤 극대화와 지속가능 경영의 솔루션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한국 기업사에서 기업 철학의 진일보한 행적으로 기록될 수 있다.

BUSINESS: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경영’이 힘을 받고 있는 데는 어려운 경영 여건에도 SK그룹의 비즈니스가 크게 성공해왔다는 것도 한몫했다. 최 회장은 그룹 회장 취임 후 내수 중심이던 포트폴리오의 틀을 깨고, 사업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 과감한 글로벌 투자와 M&A에 뛰어들었다. 기존에 강점을 보유한 에너지·화학과 통신에서의 신규 투자 외에도 반도체 산업 진출이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미래 먹을거리로 바이오와 배터리 사업을 육성했다. 특정 지역에 머물지 않고 미국, 유럽, 중국, 동남아 등으로 뻗어나갔다. 20년이 흐른 오늘, 1998년 말 32조원에 불과했던 그룹 자산은 2017년 말 192조6000억원으로 500% 불어났다. 같은 기간 매출은 36조원에서 158조원으로 339% 증가했고, 순이익은 1000억원에서 17조3500억원으로 170배 성장했다. 최 회장이 사회적 가치를 고민한 것은 10년 전이다. 그는 “회장에 취임한 후 10년 동안은 철저하게 기업인으로 살았지만, 이후부터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13년 다보스포럼에서 사회문제의 혁신적 해결 방안으로 사회적 기업 확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SK그룹의 빠른 성장과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추구가 거의 같은 시기에 진행돼온 셈이다. 최근 몇 년간 SK의 글로벌 투자는 재계에서 가장 활발하다. 우려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지만, 성패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념촬영을 했다. 오른쪽부터 최태원 SK그룹 회장, 권오준 포브스코리아 편집장, 최영진 포브스코리아 기자. / 사진: SK그룹


INTERVIEW: 그는 솔직했다. 단 두 번 만남으로 한 사람의 인품과 스타일을 판단할 수 없지만, 인터뷰 내내 솔직담백한 어법으로 응했다. ‘동생(최재원 SK 수석 부회장)에 비해 좀 무뚝뚝한 것 같다’는 기자의 다소 짓궂은 질문에 “동생이 원래 그렇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반기업 정서에 대해서도 “대기업이 비판받는 가장 큰 이유가 ‘너 혼자만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것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다. ‘사회적 가치 경영에 대한 사회적 발언을 좀 더 하면 좋겠다’는 제언엔 “사회가 점점 극과 극으로 나뉘면서 발언을 하는 게 어렵다. 사회적 기업이나 소설 밸류 같은 이야기를 하면 한쪽에선 이념적으로 바라본다. 단지 우리 사회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뿐이다”라고 말했다. 특히 ‘(대기업 총수가) 왜 행복 이야기만 하냐’는 질문에 열정적인 모습으로 긴 시간 답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업은 구성원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회사의 목적을 ‘행복 추구’로 변화하기를 희망한다”고 말할 땐 인터뷰 내내 여유로웠던 표정이 사라지고 아주 진지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 인터뷰 말미에 ‘향후 어떤 경영자로 기억되고 싶나?’라는 물음에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없다. 다만 기업 구성원의 행복과 소설 밸류를 위해 노력한 사람 정도로 기억됐으면 좋겠다”말도 겸손하게 들렸다.

한 인간, 한 경영인을 당대에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현재 시점’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는 탓이다. ‘현재 시점’은 현재의 사회·경영 환경의 영향권에 포박돼 있다. 잘하고, 못하고는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나봐야 알 수 있다. 다만 우리는 역사에서 배우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현 시대정신과 흐름을 바탕으로, ‘오늘’을 바라볼 뿐이다. 최 회장의 사회적 가치 경영이 한국 재계 리더십의 물줄기를 바꿔 우리나라 기업들이 국민에게 사랑받고 존경받을뿐더러 향후 100년, 200년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1904호 (2019.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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