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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모가 들려주는 예술가의 안목과 통찰(8) 우리 시대의 ‘초상화가’, 허영만 

주식으로, 도박으로, 돈과 삶의 가치를 묻다 

허영만(72)이라는 이름을 빼놓고 대한민국 만화사를 얘기할 수 없다. 1965년 문하생 생활을 시작해 ‘각시탈’, ‘무당거미’, ‘카멜레온의 시’, ‘날아라 슈퍼보드’, ‘미스터Q’, ‘비트’, ‘타짜’, ‘식객’ 등 54년간 그가 꽃피운 작품들은 울창한 콘텐트의 숲을 이뤘고 멀티유즈라는 탐스런 열매를 계속 맺고 있다. 지난 5월 한 종편에서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이라는 식도락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8월에는 주식 투자 체험을 다룬 만화책 『허영만의 6000만원』을 출간한 데 이어, 9월 11일 ‘타짜’ 시리즈 세 번째 영화 [타짜: 원 아이드 잭]이 개봉됐다. 칠순을 넘겨도 여전히 뜨거운 그를 만났다.

▎서울 자곡동 화실에서 만난 만화가 허영만. 그의 방에는 원고 쓰는 책상과 그림 그리는 책상이 따로 있다. “앞으로 건강 만화, 실버 만화, 정치 만화를 그려보고 싶다”고 말한다. / 사진:플레인컴
“주식은 제때 파는 게 진짜 기술”

서울 자곡동 그의 양지바른 화실 앞은 가을볕이 따가웠다. 35년 전 직접 지어 이사 온 2층 양옥집을 사무 공간으로 개조한 곳이다. 당시만 해도 일대는 허허벌판이었지만 지금은 거대한 SRT 수서역사를 중심으로 오피스텔 빌딩이 우후죽순처럼 늘어서 있다. 이곳에서 그는 아침에 출근해 만화를 그리고, 낮잠 자고, 다시 만화 그리고, 퇴근해서 술 한잔하는 규칙적인 일상을 줄곧 지켜왔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쉬는 시간 사이사이 주식 시황을 점검하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이다.

주식 투자, 해보니 어떠세요.

어이쿠,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냐. 하루에 18% 빠진 날이 있었는데, 어찌나 우울하던지. 우선 어려운 것이 종목을 선택하는 것인데, 주식 관련 책을 50권 넘게 읽었지만 거기엔 뭘 고르라는 얘기는 안 나와요. 진짜 어려운 것은 매도 타이밍을 잡는 거더라고. 이게 완전히 심리게임이야. 오르면 더 오를 것 같은 욕심에, 내려서 팔면 손해 볼 것 같으니 아까워하다가 시점을 놓치죠.

전문가 다섯 분과 함께하신다고요.

초단타매매 고수와 자산운용사 대표, 애널리스트 두 명, 개인투자가에 나까지 총 여섯이죠. 지난 4월에 각자 1000만원씩 내서 6000만원을 만들고 수익률로 등수를 매기고 있어요. 2017년에는 다섯 명이 600만원씩 낸 3000만원으로 주식 투자한 경험을 만화로 그려 4권짜리 『허영만의 3000만원』을 출간했는데, 이번엔 판돈을 키운 셈이지. 그 과정을 ‘증권플러스’라는 앱에 연재하고 있어요. 이번에 1권이 나왔고.

주식 투자를 시작한 이유가 만화 소재를 찾아서인가요, 돈을 벌려는 건가요.

소재죠. 그런데 재미를 주려면 벌어야지. 아니면 왕창 깨졌다가 확 복구를 하거나. 그런데 그렇게 드라마틱한 게 별로 없더라고. 게다가 시작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는데, 장이 계속 안 좋아 손해 막심이야. 지금 내가 마이너스 12%로 5등이고, 아주 부지런히 사고판 사람이 꼴찌야. 희한한 것은 한 종목 사서 묻어두고 있는 사람이 수익률 1등이라는 거지. 지난번 ‘3000만원’ 때 초단타매매로 혼자서만 150% 수익을 올렸던 그 사람이에요.

주식 만화는 언제부터 준비했나요.

30년 전에 하려고 했는데, 이게 공부를 보통 해야 하는 일이 아니더라고. 만화 그리면서 공부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재미있는 얘기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만뒀어요. 이번에는 선수들에게 투자하게 해서 그걸 만화로 그리겠다는 꾀를 부린거지. 스토리 안 써도 되고, 그들 얘기 들으면 재미도 있을 테고, 괜찮다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세상에 불로소득은 없더라고요.

주식으로 돈을 많이 벌 것 같으세요.

번 것 지키며 남아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듯해요. 증권회사 다닐 땐 잘하다가 독립하면 깨지는 사람도 적지 않고. 남의 돈과 자기 돈은 다른가 봐. ‘수성(守城)은 어떻게 하느냐’고 항상 물어보는데, 이런 말을 들었어. ‘현금 보유도 종목이다.’ 안 좋을 땐 쉬어가라는 얘기지.

돈을 좇지 말고 돈이 쫓아오게 해야 한다던데.

난 돈은 기다려야 온다고 말해요. 단타보다 가치투자 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법이죠. 그런데 기다리는 것과 쫓아가는 것을 병행하는 곳이 주식판이야. 그걸 잘하는 사람이 난사람이에요.

“극악무도한 주인공 등장하는 노름 만화도 생각”


▎허영만 만화의 대표 캐릭터들. 2015년 4월 29일부터 7월 19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허영만展: 창작의 비밀’ 도록 표지에 쓰인 그림이다. 돋보이는 여주인공이 별로 없다고 그는 아쉬워한다. / 사진:플레인컴
이번에 개봉한 [타짜: 원 아이드 잭](감독 권오광)은 원작 만화와 많이 다르다. [타짜-신의 손](2014) 이후 5년 만에 제작된 영화로, 경상도 타짜 짝귀의 아들 도일출(박정민 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것과 도박 종목이 화투에서 포커로 바뀌게 되는 것을 제외하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배경을 현시대로 가져오면서 흙수저·공시생 등 젊은층의 불안한 심리를 녹여냈다.

원작과 다른 설정을 선생님이 다 OK해주셨다고 하던데.

에이, 그짓말. 시사회 갔더니 제작사 사장이 ‘많이 바꿨어요. 죄송합니다’ 하더라고요. 미국에서는 너무 바꾸면 중간에 스톱도 시킨다던데, 어느 정도 알았을 때는 이미 돈이 많이 들어간 상태라 중단시킬 수도 없었어요. 최대한 이익 내보려고 잘난 사람들 데려다 만드는 건데, 그걸 또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4편 ‘벨제붑의 노래’ 판권은 어떤가요? 감독 지정권 같은 것도 있나요.

4편까지 다 줬어요. 감독 지정권은 없어요. 알아서들 하는 거지. 1편 때 최동훈 감독이 워낙 잘했으니까.

노름 만화를 더 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죠. ‘타짜’보다 더 지독한 걸로. 내가 설정한 주인공들로 끌고 가려니까 다 물러터져서 말이야.(웃음) 도박판 사람들은 정말 니가 죽어야 내가 산다거든. 진짜로 독자들이 이를 가는 주인공, 이건 정말 악마다 하는 캐릭터를 만들어 도박 얘기를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내게 그런 성향이 좀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근데 얘기만 들어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하하.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졌죠. 원작자로서 비결은.

모두 26편입니다. 일단 재미가 검증돼 있죠. 제 만화에는 슈퍼맨이 없어요. 동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캐릭터, 그런데 다 사연이 있는. 그런 게 비결이랄까.

대사도 멋진 게 많죠. 그런 건 취재나 독서, 혼자 생각하면서 뽑아내나요?

글 작가가 있는 경우엔 그쪽에서 많이 나오고, 제가 생각나는 대로 쓸 때도 있죠. 제일 마음에 드는 대사가 『식객』에서 ‘이 세상 음식의 숫자는 어머니 숫자와 동일하다’예요. 별생각 없이 줄줄 썼는데, 그걸 뽑아 쓰는 사람이 생기면서 유명해졌죠.

캐릭터는 어떻게 만드나요? 일종의 초상화인데.

신문과 잡지에서 사람 얼굴만 모아 분류해놓은 파일이 4권 정도 있어요. 제목이 ‘마스크’야. 범죄자, 코미디언, 서양인, 아시아인의 얼굴을 다 모아놓았죠. 거기서 골라 몽타주 만드는 것처럼 조합해서 썼어요. 주인공의 경우, 성격과 스토리를 생각하면서 얼굴 정면 및 측면 스케치를 이리저리 많이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툭 튀어나와요. 『비트』를 그릴 때 그림체를 확 바꿨는데, 잡지 속 패션 모델들을 한참 스케치한 뒤에 주인공을 잡았죠.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성남시에서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만화가 30명에게 인물 이야기를 하나씩 맡겼는데, 나는 김원봉을 맡았어요. 열흘 전쯤 끝났죠. 근데 이 양반 요즘 시끄럽잖아. 연재가 어떻게 될지 몰라 책으로 낼까 생각중이에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라면.

한의사 3명하고 같이 『동의보감』을 매주 2시간씩 공부한 적이있어요. 10권 계획하고 2권을 냈죠. 그리면서도 참 재미있었는데 반응이 별로 없더라고. 그런 맥락에서 다양한 만화를 포용하지 못하는 포털이 섭섭하죠. 폭넓은 소재를 다뤄줘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니까. 난 요즘 젊은 사람들 생각을 모르니 이제는 노인을 위한 실버 만화를 그리고 싶어. 일본 만화 『황혼유성군』 같은 거. 그런데 그런 만화를 실을 데가 없네.

유튜브를 하실 생각은 없나요.

그게 또 일이야. 뭘 보여줄까도 생각하고, 편집도 해야 하고.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을 바에야 안 만드는 게 나아요. 게다가 일이 늘면 술 마실 시간이 줄어들잖아. 흐흐. 근데 유튜브와 만화가 같이 가는 것에 관심은 두고 있어요. 매체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내가 들어갈 자리를 아직 못 찾고 있지.

워낙 다양한 소재를 다뤘는데, 그래도 해봐야지 하는 장르가 있다면.

MBC 라디오의 [광복 60년] 같은, 정치 만화도 해보고 싶어요.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명예훼손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옛날에는 못 했는데, 속 깊은 얘기를 좀 해보고 싶어.


▎8월에 출간된 주식 투자 체험 만화 『허영만의 6000만원』 / 사진:플레인컴



▎태블릿 작업으로 만화를 그리는 모습. / 사진:플레인컴



▎김원봉 만화를 그리며 참고한 독일제 루가 권총 모형. 비비탄이 발사된다. / 사진:플레인컴



▎9월 11일 개봉한 『타짜: 원 아이드 잭』포스터. / 사진:플레인컴
※ 정형모는… 정형모 중앙 컬처앤라이프스타일랩 실장은 중앙일보 문화부장을 지내고 중앙SUNDAY에서 문화에디터로서 고품격 문화스타일잡지 S매거진을 10년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멋있는 것, 맛있는 것에 두루 관심이 많다. 고려대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한국과 러시아의 민관학 교류 채널인 ‘한러대화’에서 언론사회분과 간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함께 만든 『이어령의 지의 최전선』이 있다.

201910호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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