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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욱의 對話(4) 이영관 도레이첨단소재 회장 

“글로벌 소재기업 유치하고 M&A 적극 나서라”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에 대한 수출 규제에 나선 지 두 달여가 지났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허둥대던 우리 정부도 소재 국산화를 위한 적극적인 재정 집행 및 관련 산업의 장기 경쟁력 확보 전략을 세우는 등 전열을 가다듬는 모양새다. 이번 수출 규제 사태는 당장 눈앞에 닥친 보복조치 대응과 별개로 우리 주력산업의 본원 경쟁력에 근원적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반도체·디스플레이 부문에서 글로벌 톱을 점한다지만, 막상 완제품 제조에 필요한 핵심 소재를 거의 전량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는 민낯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손욱의 대화 네 번째 순서로 이영관 도레이첨단소재 회장을 만났다. 이 회장은 1973년 옛 제일합섬 입사 이래 46년간 섬유화학이라는 외길을 걸어온 전문가다. 지난 1999년 380억원 적자 기업 CEO로 취임했던 이 회장은 도레이첨단소재를 지난해 매출 2조4325억원, 영업이익 1626억원의 초유량기업으로 바꿔놓았다. 이 회장은 강제징용노동자 배상이라는 정치적 이슈가 경제보복으로 이어졌다는 국민적 공분과 별개로 “일본의 수출 규제를 우리 소재·부품·장비 산업 발전을 위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도레이첨단소재는 일본 도레이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경상북도 구미에만 5개 공장을 두고 있다. 일본 도레이는 일본 내 9개 기술연구소에서 4000여 명에 이르는 연구개발 인력이 근무하는 기술 기업으로 유명하다. 매년 쏟아붓는 R&D 투자액만 8000억원에 달한다. 도레이첨단 소재는 모회사인 일본 도레이와 기술이전, 제품개발 등에서 유기적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 ‘불 꺼지지 않는 연구소’로 유명한 구미연구소는 자체 개발한 필름 소재를 일본 소니와 마츠시다에 수출하고, 삼성그룹 기술상 금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 섬유·소재 산업의 경쟁력을 한 단계 레벨업한 주인공이다. 도레이첨단소재의 필름공장은 이미 단일공장으로는 전 세계 최대 생산설비를 갖추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미래 섬유 소재로 각광받는 탄소섬유복합재료에서 국내 1위 기업으로서 시장을 이끌고 있다.

이 회장은 자타 공인 한국과 일본의 소재산업 전문가다. 이번 대담에서 이 회장은 일본의 소재·부품 산업이 왜 강한지, 한국이 관련 산업에서 새로운 강자로 거듭나기 위해선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20년 CEO 경력의 혜안을 고스란히 담아 전해주었다.

모노즈쿠리가 일군 소재 강국 일본


▎이영관 회장은 성급한 소재 국산화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국산화 자체에 올인했다가 글로벌 경쟁력이 없을 경우 오히려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손욱: 도레이첨단소재는 탄소섬유와 필름 등 기초 소재 부문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입니다. 이영관 회장님을 모시고 한국의 기초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조언을 구하고자 합니다. 먼저 전문가 입장에서 일본과 한국의 기초 소재·부품 산업의 현주소를 어떻게 진단하십니까?

이영관: 이번 사태로 많은 사람이 깜짝 놀랐을 겁니다. 우리가 최고라 자부하는 반도체의 주요 부품·소재를 일본에 의지하고 있다는 게 알려졌으니까요. 아마 이런 사실을 처음 접한 분도 있었을 테지요. 일본과 한국의 무역을 보면 현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2018년 한국의 대일(對日)적자가 241억달러입니다. 그중 부품과 장비·소재가 224억달러죠. 전체 무역역조의 93%를 부품·장비·소재가 차지한다는 뜻입니다. 해당 산업의 기술격차는 어느 정도일까요? 2017년 발표된 정부 자료를 보면 한국의 72개 중소 제조 업종에서 일본과의 기술격차가 업종마다 차이는 있으나 대개 1~3년이 뒤져 있다고 나옵니다. 특히 우리가 미래산업으로 육성하는 바이오, 디지털방송 등에선 3년 이상 벌어져 있다고 해요.

손욱: 일본은 이번 수출 규제로 특히 우리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타깃으로 삼아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이영관: 메모리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장비의 일본 의존도가 너무 높은 게 사실입니다. 반도체의 경우 50~96%에 달할 정도로 일본 업체에 과다하게 의존하고 있죠. 지난해 무역협회 자료를 보면, 반도체 부문에선 포토레지스트 베이커 98.8%, 포토레지스트(감광액) 93.1%, 에폭시수지 87.4%를 일본에서 들여오고 있어요. 디스플레이 부문에선 OLED 패턴형성 100%, 이송장비 95.8%를 일본이 점유하고 있죠. 이처럼 우리 소재·부품의 일본 의존도가 높은 건 오랜 산업 발전 과정에서 일본과 어쩔 수 없이 분업관계를 이루어왔기 때문입니다.

손욱: 일본이 기초 소재와 부품 산업에서 앞서나가는 배경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이영관: 보는 이마다 관점이 다를 테지만, 제 생각에 일본은 전통적으로 제조업을 매우 중시하는 산업 풍토를 가지고 있어요. 작은 사업이라도 대를 잇고 기술개발에 나서죠. 아주 사소한 것까지 뭐든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일본의 특징입니다. 이를 데이터화해서 품질개선에 나서는 거죠. 흔히 알려져 있는 모노즈쿠리 정신입니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최고의 물건을 만들어 내는 거죠. 패망 후 일본 부활의 토대가 바로 모노즈쿠리입니다. 반면 한국은 예부터 사농공상 구분이 강했어요. 이공계보다 문과를 중심에 두었죠. 일본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우리만큼 강하지는 않아요. 1960~1970년대만 해도 우수한 학생들이 앞다퉈 화공과나 전자공학과에 들어갔어요. 오늘날 우리 전자·화학 산업을 일으킨 근간입니다.

손욱: 도쿄 아키하바라에 유명한 붕어빵집이 있어요. 붕어빵 하나 먹으려 한참 줄을 서 기다려야 하죠. 실제 먹어보면 붕어 지느러미까지 팥이 들어 있는데, 겉은 바삭하고 안은 부드러워 맛이 좋습니다. 이 집이 무려 3대를 이어가는 가게예요. 우리 같으면 아버지가 성공한다 한들 아들이 붕어빵 가업을 이을까요?

이영관: 일본이 기업 성과를 장기적으로 평가하는 좋은 예군요. 도레이의 탄소섬유도 1962년 개발에 들어가 1971년부터 양산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거의 30년간 계속 적자를 봤어요. 그럼에도 도레이는 쇠보다 10배 강하고 무게는 4분의 1에 불과한 이 섬유가 언젠가 산업 소재로 각광받을 거란 비전을 놓지 않았습니다. 탄소섬유로 만든 비행기를 띄우겠다는 염원이었죠. 적자를 감내하면서 기술개발을 이어간 결과는 어떨까요. 전 세계 200여 곳의 탄소섬유 관련 기업 중 돈 버는 곳은 1~2곳에 불과합니다. 결국 도레이가 만든 탄소섬유가 세계 표준이 되었고, 비행기·로켓·인공위성에 도레이의 탄소섬유가 쓰이고 있어요. 한국의 어떤 대기업인들 30년 넘게 적자를 보면서 사업을 이어가겠습니까.

손욱: 우리는 전후 산업 기반을 갖춰온 역사가 짧고, 경제도 급격히 성장했어요. 내가 이기기 위해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경향이 강한 이유입니다. 이제는 경쟁해서 상대를 무너뜨리기보다, 협력해서 파이를 키우고 이익을 나누는 게 더 중요해졌어요. 그간의 태도를 반성해야 합니다.

이영관: 일본인 특유의 협동정신이 일본의 소재·부품·장비 산업을 일으킨 주된 원동력이라고 봅니다. 현실적으로 한 회사가 모든 소재를 다 만들 수는 없어요. 일본은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분업화와 협동으로 세계적 명품 소재·장비를 만들어왔습니다. 미국 보잉787 드림라이너 비행기는 동체와 날개를 탄소섬유로 만듭니다. 도레이가 탄소섬유를 제조·가공해 이를 비행기 동체와 날개를 만드는 후지중공업이나 가와사키, 미쓰비시중공업 같은 대기업에 보냅니다. 여기에 기술력을 갖춘 수많은 협력회사가 부품을 납품해 동체나 날개를 조립하고, 이를 최종적으로 보잉에 납품하는 시스템이죠. 이때 대기업과 중소협력기업 간에는 기술지도, 개발, 자금지원 등이 마치 한 식구처럼 이루어집니다. 한번 인연을 맺으면 웬만해선 서로 배신하지 않고 대를 이어가며 협력하죠. 그러니 뛰어난 기술이 꾸준히 축적될 수 있어요.

손욱: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부문으로 국한하면 한국의 중간재 시장이 일본의 소재 산업을 성장시킨 측면도 있지 않습니까?

이영관: 맞습니다. 반도체의 경우 일본이 우리에게 크게 뒤처졌어요. 반면 소재·장비는 강하죠. 이유가 뭘까요. 1980년대 중반 들어 미국은 플라자합의로 엔화 가치를 높여놨습니다. 미일 반도체 협정으로 일본 반도체 산업을 강하게 압박했죠. 그사이 일본 경제에 버블이 꼈고, 결국 일본 반도체 산업이 무너졌습니다. 한편 그 사이 한국은 대기업 주도로 반도체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단행했어요. 그런데 우리에겐 장비와 소재가 없었죠. 일본에서 가져올 수밖에요. 일본 반도체 산업이 망했어도, 소재·장비 업체들은 한국 덕에 경쟁력을 유지하고 발전해온 겁니다. 요즘 수출 규제로 일본 소재의 한국 판매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지만, 이런 과정이 장기화되면 일본 기업들도 바뀔 겁니다. 얼마 전 일본 관계자를 만나 “너희가 그토록 자랑하는 99.999999%의 초순도가 정말 꼭 필요한 스펙이었는지 평가해볼 기회가 될 것”이라며 우스갯소리를 건넸어요. 이번 일을 계기로 한국이 국산화와 수입처 다변화에 나서면서 어느 정도 독립적 성과를 볼 겁니다.

손욱: 일본은 기업과 유관단체, 정부의 유기적인 협력으로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는 독특한 시스템으로도 유명하죠.

이영관: 정확한 진단입니다. 일본은 예부터 특정 현안이 생기면 기업과 단체, 경제부처가 한자리에 모여 머리를 맞대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요. 철저하게 분석해서 대책을 세우죠. 한번 만든 대책을 지속적으로 적용해가는 동시에 기업의 애로 사항을 청취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가 철저하고 꾸준하게 지원합니다.

손욱: 실제로 일본 공무원들은 특정 직군에 장기간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요. 기업인 못지않게 전문화하는 거죠. 우리는 로테이션이 너무 잦아요. 그러니 깊이를 갖춘 인재를 찾기 어렵죠.

이영관: 한국이 단기성과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산업화 역사 자체가 매우 짧지만, 성과는 선진국 이상으로 내야 했기 때문이죠. 주력 산업 대부분이 조립사업부터 시작된 배경입니다. 전자는 라디오·TV·냉장고 조립부터 시작했고, 자동차나 휴대폰도 조립이 근간이에요. 왜 그럴까요? 일단 조립라인 깔고 사람만 세우면 자금회수가 빠르기 때문이죠. 반면 소재는 한번 시작하면 10년, 20년 걸립니다. 산업 특성이 완전히 달라요. 우리는 긴 시간 기다리기 힘들어하고, 조금 안 되면 중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아요. 요즘 문제인 반도체·디스플레이도 초기에 기반이 없어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어요. 세트에 집중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재에 소홀했던 거죠.

성급한 국산화보다 장기 전략 세워야


▎손욱 회장은 현장의 기술자를 존중하는 풍토가 우리 기업에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인력을 존중하는 문화가 오늘날 소재 강국 일본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손욱: 일본도 산업화 초기에는 비슷한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습니까?

이영관: 일본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개별 업종의 고도화에 집중했고, 기업과 정부가 정책적으로 협력하면서 약점을 보완했죠. 일본에는 1000년 넘는 기업도 몇 곳 있습니다. 100년이 넘은 곳도 2만여 개가 넘는다고 해요. 품질과 무한추구(無限追求)가 일본 산업의 DNA입니다. 우리는 짧은 산업화 과정으로 인해 소재 국산화로 얻는 메리트보다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너무 큰 게 사실이에요. 기술개발에 성공할 수 있지만, 신기술을 적용에 실패했다면 그 시도 자체가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러니 과감한 기술투자와 개발에 나서기 어려렵습니다. 소재·부품 개발에 굉장히 보수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죠.

이와 달리 일본은 무한추구의 정신을 소재·부품 산업에서도 이어갔어요. 도레이의 예를 들어볼까요. 보통 쓰는 가느다란 섬유가 10㎛(100만분의 1m)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직경 1㎛ 섬유를 만들어냈죠. 최근에는 나노섬유가 나왔어요. 0.01㎛입니다. 나노섬유로 지구와 태양을 이으면, 그 실의 무게가 0.15g밖에 안 됩니다. 쌀 한 톨 수준이에요. 소재 개발을 향한 무한추구의 좋은 예입니다. 그런 실로 도대체 무얼 할까요? 혈액 투석용 필터 소재 대부분이 도레이의 나노섬유입니다. 이런 무한추구 DNA가 결국 7명에 이르는 노벨화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거죠.

손욱: 우리 기업과 산업계가 일본의 수출 규제를 넘어 소재·부품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이영관: 무엇보다 장기적인 안목과 전략이 시급합니다. 단순히 국산화를 사태 해결의 중심에 놓을 것이 아니라,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장기 전략을 먼저 수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대는 글로벌 분업 시대로, 모든 소재·부품을 한 나라가 만들 수 없어요. 급하다고 국산화에 올인했다가 정작 글로벌 경쟁력이 없으면 오히려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먼저 기업과 국가기관이 문제의 근원적 바탕이 무엇인지 긴밀히 조사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정부는 일시적 자금 지원뿐만 아니라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발전 전략 아래 적재적소에 맞춤 지원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국산화 자체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돼요.

손욱: 기술 국산화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자본과 오래 개발 기간이 소요됩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없을까요?

이영관:기술의 자체 개발은 말씀하신 대로 여러 현실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신 우리가 부족하거나 보유하지 못한 기술을 가진 외국 기업을 인수합병(M&A)하거나, 우수 기술을 가진 외국 기업의 한국 투자를 유치하는 방법이 효과적입니다. 도레이첨단소재는 일본 도레이의 탄소섬유 기술을 구미공장에 그대로 도입해 옮겨놓았어요. 로열티를 주고 기술을 이전받은 겁니다. 우리 기술자들이 생산하고 관리하며 기술개발까지 나서고 있죠. 폴리페닐렌설파이드(PPS)는 섭씨 300도까지 견디는 플라스틱인데, 이 기술을 보유한 곳이 전 세계에 얼마 없어요. 현재 도레이첨단소재가 자체 생산하고 있습니다. 일본 도레이와 기술협력을 통해 자체 개발에 따른 돈과 시간을 줄인 좋은 예죠. 기술은 머니게임과 달라서 일단 들여오면 우리 자산이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산업 정책의 일관성을 얘기하고 싶어요. 정권이 바뀌면 앞에 했던 건 모두 사라지고 말아요. 산업 정책은 중장기적 국가 플랜을 짜 일관되게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면 보완하되 큰 흐름은 그대로 가져가야 해요. 물줄기 자체를 휙휙 바꾸면 기업은 정신을 차릴 수 없어요.

손욱: 말씀을 들으니 일본 이화학연구소가 생각납니다. 1917년에 설립된 곳으로, 일본 소재산업이나 첨단기술의 바탕이죠. 기초과학을 연구하는 데 1년 예산만 1000억 엔에 달합니다. 3500명 연구원 중 노벨상 수상자가 3명 나왔죠. 한마디로 일본 기초 기술의 총본산이에요.

이영관: 최근 일본의 수출 규제로 인해 한일 갈등이 첨예한 상황이지만, 한국과 일본의 협력관계가 무너지는 건 우리 산업 경쟁력에도 마이너스 요인이 되기 쉽습니다. 사실 일본 제조 메이커가 한국에 와서 안정적으로 성장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도레이첨단소재의 경우 긴밀한 협력을 통해 그들의 첨단기술을 한국으로 이전할 수 있었죠. 일본 도레이는 9개 연구소에서 4000명의 기술 인력이 일하고 있어요. 이들의 성과를 우리가 공유할 수 있어서 남들보다 빨리 품질을 개선하고 신제품을 개발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한국과 일본 경영의 가장 큰 차이가 바로 스피드예요. 한국은 의사결정이 굉장히 빨라요. 일을 진행하면서 문제점을 동시에 해결하는 스타일이죠. 반면 일본은 사전에 문제점을 완벽히 해결한 후에 실행에 나섭니다. 그러니 늦죠. 삼성과 LG, 현대 같은 우리 대기업들이 글로벌 톱 메이커로 성장한 배경도 협력사들이 지근거리에서 그들이 필요한 부품과 소재를 대고, 산업 발전방향을 빠르게 공유한 덕분이에요. 현대 경영에서 스피드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의 강점과 일본의 장점을 조화롭게 적용해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손욱: 일본의 저력인 장인정신도 우리가 배워야 할 부분이죠. 그들은 기술자, 즉 기능직을 존중합니다. 우린 석박사만 존중하고 현장을 존중하지 않아요.

이영관: 도레이에 가면 동경대 화학과를 나와 30년간 섬유유제(오일)만 연구한 사람이 있습니다. 섬유유제 부문에선 세계 최고의 전문가죠. 서울대 화학과 출신에게 오일만 30년 연구하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연구자와 기술자를 존중하는 문화적 풍토가 절실합니다.

손욱: 경제와 산업 부문에서 바람직한 한일 관계의 미래는 어떻게 정립해나가야 한다고 보십니까?

이영관: 과거사 문제 등 한일 간 정치적 갈등이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경제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죠. 한일 경제인협회 회의에 가봐도 기업인들끼리는 서로 터놓고 이야기합니다. 그동안 정경분리 원칙이 잘 유지됐죠. 한국의 산업발전사를 보면 정부 주도 성장 전략과 지원, 우리의 기업가정신, 근면한 근로자들의 노력에 더해 많은 부분을 일본의 기술과 설비에 의존했어요. 한일 간 산업이 어쩔 수 없이 밀접하게 연관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이런 구조를 전부 바꾸기보다는 상생의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유치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사업에 나설 때 일본 도레이가 무조건 오케이하는 것도 아닙니다. 양측이 치열한 토론을 거쳐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는 설득 과정을 거치죠. 바로 역지사지입니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면 의외로 일이 쉽게 풀린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됐어요.

최근 한일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일본과 한국은 떠서 옮길 수 없는 이웃 국가다. 서로 싸우는 것보다 협력할 때 얻는 이익이 훨씬 크다”고요. 정치적 이해관계가 첨예한 시점일수록, 상호발전으로 미래를 도모한다는 자세로 차분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적당한 시점에 서로 모티베이션이 생기면 지금의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진 않을 겁니다.


※ 손욱 전 회장은… 40여 년간 삼성그룹에서 근무한 정통 ‘삼성맨’이자 국내 최고의 기술경영자(CTO)로서 평생을 혁신에 전념해왔다.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을 최측근에서 보좌했고, 삼성그룹의 프로세스 혁신과 정보시스템 구축도 그의 작품이다. 삼성인재개발원장, 삼성종합기술원장 이후 농심에서 현역 생활을 마친 손 전 회장은 현재 한국형리더십연구회 회장, 감사나눔운동 전파 등 사회문화 운동으로 또 다른 혁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 장진원 기자 jang.jinwon@joongang.co.kr·사진 전민규 기자

201910호 (2019.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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